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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렬 선생이 마장동서 아이들을 위해 기획했던 이웃 직업인과의 대화 《직업을 말해줘》와 함께. 왼쪽부터 명영순 송경민 윤상임나는 2016년 2월 1일의 블로그를 보고 있다. 제목은 '다시 색전술'. 블로그 주인장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지금 막 수술을 위한 사전 조처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다. 그의 왼팔엔 링거가 연결돼 있고, 제모크림을 발라 털을 녹여떨어뜨린 터라 겨드랑이엔 약냄새가 남아있다. 사람들이 모두 자는 밤에 홀로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가, 오늘 찾아갈 그 사람 이홍렬이다. 그의 글.“병원에서 노인들을 보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20대의 젊은이를 보면 안타까움이 가슴으로 밀려오고 어린 아이가 부모와 함께 휠체어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 온다. 그렇다면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을 보면? 열심히 살다 이제 쉴 때가 된 사람을 보는 느낌? 아니면 앞으로 돌진하다 돌부리에 넘어져 쉬는 가련한 중생?몸이 아프니 겸손해졌다. 잘난체 하던 젊은 시절에는 남들을 참으로 자주 무시했다. 무엇이 그리 잘 났다고 그랬는지 알고 보면 자랑할만한 것도 없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으나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죽도록 사랑하다 보면 진정 사랑을 알겠지. 병실의 환자들이 코를 고는 시간에 나 홀로 글을 쓴다.”- http://m.blog.naver.com/ipleelee 중생전의 이홍렬얼마 더 살지는 모르지만, 죽도록 사랑해야지“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겠으나”라고 썼던 그는 2018년 1월 3일 고인이 됐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다 보면 진정한 사랑을 알겠지”라고도 썼다. 그가 베푼 사랑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왜 풍납동에 살고 있던 그가, 마장동에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지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오바마 대통령을 초대하려던 '직업을 말해줘'> 기사 참조] 알고 싶었다. 이홍렬과 함께 '직업을 말해줘'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윤상임, 송경민을 만난 이유였다. 근처 사근동에 살고 있는 이홍렬의 형수 명영순 님도 자리에 함께 했다. - 이홍렬 선생은 <직업을 말해줘>의 기획자이자 기록자였다. 마장동 홍익교회 하마방에서 시작해 5년여 가까이 많은 직업인들을 모셨었다. 초대된 강사들중엔 이홍렬 선생과의 인연으로 오신 분들이 다수라고도 들었다. 이홍렬과 마장동과의 인연을 듣고 싶다.명영순 : “시동생(이홍렬)의 고향은 제천이었다. 그후 워낙 많이 옮겨 다녔다고 들었다. 강원도로도 천안으로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 1960대 후반 1970년대 초 서울로 왔을 때, 터를 잡은 곳이 청계천변 판자촌이었다. 8만원 전세금인가를 주고. 홍렬은 마장동 동명국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청계천변엔 판자촌이, 하류와 중랑천변으로 '개미굴(토굴을 파고, 그 위에 비닐과 판자로 얹댄 임시거처)'이 많았던 때다. 가난한 삶의 풍경이 이곳 마장동 사근동 송정동 용답동 일대에서 펼쳐졌었다. - 명영순 : “남편 홍식이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마음에 큰 짐을 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비가 오면 우산 장사를 하고, 겨울엔 호떡장사, 여름엔 하드통을 메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들었다. 집안 사정상 벌 사람이 없으니 벌어야 했을 거다. 다들 고생을 많이 했겠지만….”- 이홍렬 선생의 과거 이력이 궁금하다. 어떤 분이셨나?명영순 : “형제는 2남2녀였다. 홍렬에겐 형과 누나가 있고, 여동생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남편 사랑에 대해선 한이 없다고 하셨더랬다. 굉장히 다정다감한 성격이셨던 것이고, 홍렬은 아마 아버님을 닮은 듯하다. 우리집 아이들이 아파 열이 나면, 아이들을 업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오곤 했던 게 시동생 홍렬이었다. 명절때면 제사 장만에 손을 보태주는 이도 홍렬이었다. 형은 숭실대 전자공학과를, 홍렬은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으니 형제가 이과적인 성격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둘다 음악에 심취하고, 사진도 찍고, 책을 읽고 글쓰는 일을 엄청나게 좋아한 사람들이었다. 형제가 그런 점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이상주의셨죠. 발이 땅에서 떨어진 듯한이홍렬 선생은 간암 투병중에도 마장동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꿈을 잃고 생기가 가셔버린 아이들을 위해 '직업을 말해줘'를 기획하고 진행을 도맡아 했다. 창간호이자 종간호가 된, <직업을 말해줘> 소식지를 발행했다. 거기에 그는 썼었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없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꿈을 선사하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식사에 지인을 초대하여 손님의 직업에 관하여 자녀와 손님의 직업에 관하여 자녀와 손님이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한다고 합니다.아이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나요? 그러면 신뢰를 함께 주어야 합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부모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 자녀들을 전적으로 믿고, 자녀들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우리들의 아이들은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윤상임 : “선생님은 이상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 사는 분 같았죠. 아이들한테 책을 주세요. 당신이 읽던 책들. 영어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이예요. '자신에게 좋았고 좋아했던 책이니까, 아이들도 좋아할 거다!' 그런 거죠. 박물관 가고 음악회 가고 그런 것도….(웃음)”송경민 : “이홍렬 선생님과 매미우화를 밤새 보았던 일이 기억나요. 땀이 삐질삐질 나는 여름밤, 모기한테 뜯기면서 선생님과 함께 세림아파트 내 숲에서 있었어요. 밤에 탈피를 하니까. 저는 그 전엔 매미 자체가 안 보였었어요. 아이들하고 엄마들, 주변분들도 모두 다 참여 가능한 자리였어요. 영상도 제작해서 저희들과 공유해 주셨더랬죠.”- 윤상임 : “교회서 공부방을 했어요. 형편도 어렵고 학력이 달리는 아이들과 함께 하니까, 다른 분들이 '학업진도'나 성적과의 관련성 이런 것도 엄청 신경쓰는데, 이홍렬 선생님은 태평이세요. '아이들은 놀아야 하고, 스트레스도 없어야 한다.' 뭐 그러시는 거죠. 저는 수업에 사람이 올까 안 올까 걱정이 많은데, 선생님은 '없으면 놀지, 하나라도 있으면 하고.' 그러시는 거죠. 걱정이랑 해탈이랑 둘이 쿵짝이 맞았던 거 같아요.”송경민 :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하면 관심들을 가지실 테니까 <영어성경학교> 같은 것도 열었어요. 그러면 미국식 영어랑 영국식 영어를 구별해서 듣도록 준비를 해오시고요. 어원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관련 이야기들도 쭈욱 풀어주시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 청교도들을 알아야 영어 단어와 문장이 제대로 이해되기도 하니까….”왼쪽부터 이홍렬의 손그림전, 사진전 그리고 스마트폰 개인사진전. 그는 이웃의 가게, 공간에서 자신의 재능과 우정을 나눈 사람이었다.한 알 밀알이 떨어져 땅에서 썩으면 이홍렬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일을 좋아하는 사진가요 편집인이었다. 마을에서 섹소폰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던 예술인이었다. 그는 그 재능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재능을 이용해서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그가 기획한 <직업을 말해줘> 영상을 채운 것은 그의 사진과 그의 편집기술이었다. 그는 그린 그림들과 사진들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화이트큐브, 하얀 전시실의 벽면이 아니라 삶의 터와 가까운 가게와 카페에 걸었다. 누구나 밥 먹으러 와서, 차한잔 하며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 이웃의 풍경이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그 사진들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홍렬의 블로그 제목은 <오래 살지 말자 즐겁게 살자>다. 정신없이 앞으로 내딛다가, 고개를 들고 더 높은 곳을 향하다가, 어느날 다가온 죽음 앞에서 그가 찾은 것은 '사랑'이었다. 그가 남긴 블로그 기사를 차근차근 살피고, 그에 대한 이웃을 말들을 다시 재생해 듣는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쫓아 신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았다. 그의 죽은 자리에 어울릴만한 성경 단어가 내게도 생각났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덧붙이는 글>마장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신동한 할머니, 동명초 후문에 있던 문방구 한양슈퍼에서(아래 사진은 젊은 시절 신동한 님)이상돈, 사랑의 다리 세운 사람. 마장동 동마파출소장을 역임했다.지난해 마장동을 찾았다가 두 분의 인상적인 분을 만났었다. 한 분은 1970년대초, 마장동에서 순경과 파출소장을 역임했던 이상돈 선생. 그는 한영중고 앞 청계천에 '사랑의 다리'를 놓은 사람이었다. 당시 청계천변과 하류 중랑천변은 가난한 이들이 대규모로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생계를 꾸려가느라 교육의 현장에서 밀려난 어린이, 청소년들도 많았다.  이상돈 선생은 그들을 위해서도 애향기술학원을 짓고, 한글과 타자, 편직술등 직업교육도 했다. 겨울 내복도 장갑도 변변히 없는 버스안내양들을 위해서도, 넝마를 주워 파는 청계천다리 아래 재건대 아이들 위해서도 이상돈 선생은 힘을 썼다. 마장동서 <청계천박물관 이야기갤러리전>을 진행할 때는 동명초등학교 후문서 장사를 하고계신 한양슈퍼 신동한 할머니도 만났다. 50여년 가까이 문방구를 하셨던 할머니는 우리에게 그동안 간직해 왔던 문방구 제품을 모두 기증해 주셨다. 그리고 5만원의 후원금까지.(이상돈 선생님도 기부금을 주겠다고 하셨다). 마장동에서 만난 이 어른들은 한결같이 불쌍한 이웃들 아이들을 위하여 한없이 주고싶어 했다. 마장동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는 사람들의 땅이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1-25 21:07

전길영 선생, 그는 삶터의 삶을 기록한다. 그 기록은 남아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원동업1.뼛속까지 왕십리 도선동 사람 전길영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이는 교보생명 창업주 신용호 선생의 말이다. 이 말씀을 오마주 삼아 다시 말하고 싶다.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문화를 만든다”. 땅은 그 시대를 품고 있다. 땅의 생긴 모양과 그 위치는 그곳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서의 땅, 이 땅에서 생겨난 문제에 적응하고 응전하면서 사람의 삶도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다.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삶 역시 그 땅과의 인연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한해 동안 이곳 성동의 땅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려는 이유다. 그들이 만든 문화는 우리가 사는 땅에서 우리에게 양식으로 자라고 있다.930년경 전길영의 부친 정명록이 운영한 제일농원이다 지금의 왕십리로 교보생명 빌딩 근처였다.<성동문화원 제공>1945년경 전길영의 아내 김종분이 찍은 왕십리 전차다 왕십리는 기동차와 전차와 경원선이 함께 다닌 교통의 요지, 성동의 중심이었다.<성동문화원 제공>◆땅의 이야기 들려준 전길영 선생2021년 내가 만난 가장 인상 사람 둘을 고르라면 '뼛속까지 왕십리도선동 사람 전길영' 선생과 마장동에서 순경-경찰을 하셨다가 은퇴를 하신 이상돈 선생이다. 두 분을 처음 만난 것은 모두 책에서였다. 아흔을 넘긴 전 선생님과 '그분 돌아가셨다 하던데' 했던(죄송합니다) 이선생님을 모두 현실에서 직접 만나 뵈었다. 그들로부터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자료를 살피며 인터뷰를 하게 된 게 그래서 '신기했다'. 지난 12월 6일부터 10일까지 닷새간 열렸던 성동문화재단 성동별곡의 성과공유회에서 나는 이 두 분의 이야기를 전시했었다. 개관식날 참석하기로 사전에 약속했던 두 분이 모두 그 시기 '병상'에 누웠다. 그들은 이미 위태하게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있었다. 하루바삐 만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길영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성동문화원이 매년 발간하는 책 <근현대 사진 이야기전>이었다. 2009년부터 매해 빼놓지 않고 발간해 왔으니 어느새 13권째다. 그 안에 자주자주 전길영 선생의 제공 사진이 있었다. 이상돈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책 <마장동-수도권 최대 축산물 단일 시장>이었다. '2013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축산시장과 마장동 사람들의 삶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 이상돈이란 이름을 다시 위 <이야기전>에서 만났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판한 왕십리 지금은 재개발된 왕십리 도선동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발자취가 담겨있다전길영은 왕십리서 1928년에 났다. 지금은 헐린 전풍호텔 인근이 그의 집터였다. 당시엔 그곳은 세단쯤 되는 복숭아밭이었다. 그는 날리는 복숭아꽃 그늘 아래서 요람에 안겨 흔들렸을 것이다. 기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일성은 '그리운 고향 왕십리'였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깔려 운행을 하는 곳. 미나리꽝 배추장다리가 지천이던 이곳에 눈과 몸이 큰 잠자리 천지가 무수히 날았다. 밤이면 개똥벌레들이 '빛의 군무'를 추던 곳이 여기 왕십리고, 도선동이었다. 길영의 가족들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다. 전길영까지 13대째다. 하여 전길영은 서울토박이회 회원이다. 서울에 오직 하나 남아있는 중구의 토박이회를 그는 자주 찾았었다. 그의 조상은 나라의 녹을 오랜 동안 먹었고, 전길영의 부친 전명록은 왕십리에서 100여년 전에 이미 가게를 차리고 기업을 운영했다. '제일농원'은 왕십리에서 동대문으로 향하는 신작로에 자리를 잡아 장차 번성할 가문의 뼈대를 세우고 있었다. 현재 마장동 세림아파트 자리에 있던 한영중고등학교가 강동구 명일동으로 옮겨갈 때, 부친 전명록은 그곳에 소유하던 땅 전풍농장터 4,130평을 희사해 한영외고의 터가 됐다. 동국대 46학번, 1회 졸업생 전길영은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장교교육을 받고 전장에 나섰다. 제대후에는 한창 그 시대에 첨단 산업이던 '자동차 수리'업에 종사했다. 그는 도선동장도 했다. 그가 동장을 하던 1963년, 자택에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수염을 길게 단 할아버지들, 머리를 곱게 쪽진 할머니들이 자리를 채웠다. 당시에는 마을에 변변한 연회홀도 없던 때여서, 그의 부인 김정분 여사가 음식을 차려 냈다. 전길영의 동생 결혼식때 가족들이 모인 곳은 그네 집안의 가택이다. 예전에는 대청마루가 넓었는데, 거기 온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부인 김종분이 결혼 전 찍어서 갖고 있던 1946년의 왕십리 전차 사진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기록이다. 보노라면, 시대의 기록이란 결국 사람의 한 살이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왕십리2동 뒤편, 무학봉 근처에는 현재 수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거기 왕십리kcc스위첸 아파트도 있다. 이 아파트를 들어가 외편 길로 오르면 거기 뒤편 절벽에 마애불이 서있다. 신라 흥덕왕 2년 827년에 지어졌다는 절 안정사가 헐리고 남아있는 흔적이다. 도선동의 동명은 신라 고승 도선대사에서 왔는데, 도선의 탄생연도가 역시나 827년이다. 앞으로 5년 뒤인 2027년이면 이 절(터)의 역사는 1,200여년이 된다. 왕십리도선동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전길영 선생의 흔적은 도선동 동민회다. 이것은 전길영 개인의 기록만이 아니다. 200년전 영정조시대 산제치성제로부터 이어져 오는 마을축제와 제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동민회가 있는 도선동 360번지는 한때 개인 소유로 뺏길 뻔했던 마을총유재산이다. 그걸 찾느라 전길영 선생과 도선동 사람들이 함께 나섰더랬다.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함께 마을을 이루고 문화를 길러 다시 그네들이 사는 땅을 바꾼다는 증거가 여기 있었다. 추신: 유튜브에서 <왕십리 고향 전길영 작사 김성수 작곡>을 검색하면 시인 전길영의 '노래가 된 시'를 들을 수 있다. <성동의 사람들_전길영_땅은 사람을 사람은 문화를>을 검색하면 전길영의 위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원동업 기자 <iskarma@daum.net>도선동동민회_매년 음력 10월 1일이면 애향봉에서 산신제를드린다. 200여년 전 영정조 시대부터의 산제를 계승하고 있다.안정사는 2027년이면 1천2백여년의 역사를 갖게되지만 이미 헐렸다 . 안정사 터 뒤편에 남은 마애불과 표지판만이 그곳의 역사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전길영 선생은 그가 담양전씨의 후손임을 잊지 않는다 옆의 아령은 아흔다섯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옛아령이다상왕십리역에 세운 왕십리 도선동 홍익동 유래비다 홍익동은 홍익인간에서 왔다 도선동공원에는 도선과 무학이 만나는 조각상도 있다.현재의 왕십리 도선동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길은 없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1-13 14:05

<원동업이 만난 사람> 마장동축산물시장 상인과 주민 “함께 도시를 다시!”사진 왼쪽부터 이상희 이사장, 주민 박주환, 마장주민자치회장 김영진, 잔재물협동조합 총무 심현수,새해에는 주식시장의 황소처럼, 탐스러운 돼지처럼 복되시라 빌었다.마장동은 에너지 발전소다. 대성연탄이 있었고, 한전 내연발전소, 고려가스가 있었던 과거 때문만은 아니다. 우시장이 오랜 동안 있었고, 도축장이 있었던 역사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는 마장동축산물시장이 있다. 대한민국 고기의 상당 부분을 충당하는 주역이다. 그러니 대한민국 혹은 서울 사람들의 에너지가 여기서 온다. 45년이 훌쩍 넘어가는 마장동 먹자골목은 한우 고기를 제대로 먹고자 하는 이들이 작정을 하고 온다.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고기를 사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고기 익는 마을'도 진작 문을 열고 있다. 서문쪽으로 주로 한우가, 북문의 족발과 곳곳에 돼지고기 천지인 곳이 여기 마장동축산물시장이다. 관광객, 소비자가 방문하면 행복한 경험이 덤으로 온다.  이상희(왼쪽) 서울동물성잔재처리협동조합 이사장이 박주환 주민의 제안을 듣고있다.교통난과 냄새, 마장동 접근 가로막는 장애물그러나 이런 '에너지 생산-소비지'의 이면에 그림자도 있다. 외부인들을 가로막는 난제들이다. 교통난과 냄새-한번 왔던 손님은 다시 오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때문이다. 시장엔 3,500여 개의 정식 업소들이 혼재해 있다. 큰 업소엔 지방 도축장서 온 냉동탑차가 줄지어 고기를 내린다. 소매점으로 도매점으로 고기를 운반하는 오토바이들이 복잡하게 곡예를 한다. 바쁘면 카트와 수동수레도 동원된다. 한 사람 겨우 빠져나갈 만큼의 공간이 없어 차량은 정체를 이룬다. 당연히 위험도 상존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큰 문제도 있다. 냄새다. 축산물시장에 들어서면 맡아지는 이 냄새는 반갑지 않다. 내부의 상인들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가끔 오는 이들이야 '잠깐!'이지만, 주변 주민들로서는 '눈엣가시' 아니, '코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냄새의 주범은 고기 이외의 축산물에서 나오는 부산물들(혹은 폐기물들)이다. 마대에 실려 운반되다 흘러나오거나 제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해 부패하면, 냄새는 '지독한 혐오물'이 되고 만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이 과제와 오랜 동안 씨름해온 이상희 서울동물성 잔재물처리 협동조합 이상희 이사장을 만났다. 축산물시장의 교통난과 냄새는 주변 주민들에게는 큰 고민거리다.오토바이는 잔재물을 실어나른다 마대 대신 플라스틱을 쓰자는 운동이 한참이지만, 아직은 갈길이 멀다 - 소개를 부탁드린다. “열세살에 고향 경주에서 이곳 마장동에 왔다. 권투를 10여년 계속하다가 스물다섯살인 72년경 고기장사를 시작했다. 늘 보고 접하는 게 그쪽 일이니까. 내가 장사를 시작한 때는 이미 도축장도 생긴 때였다. 나는 여기 축산물시장상인연합회 2대 회장도 하고, 지금은 마장동 잔재물처리협동조합서 일하고 있다. 50년째 마장동 상인이다.”- 잔재물? 설명을 좀 해주신다면?“소 돼지 잡으면 고기와 뼈를 바르는 정형작업을 한다. 고기를 빼면 모두 잔재물이다. 부산물이라고도 한다. 시장에선 뼈는 뼈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선별한다. 이런 것들을 선진국에선 폐기물 취급한다. 미국 일본 블란서에선 오히려 돈 받고 치운다. 우리는 상품으로 본다. 가공하면 마가린도 만들고 쇼팅도 만들고 비누도 생산되니까. 해서 우리도 '폐기물법'을 만들자 했고, 환경부 농수산부를 거쳐 법제정이 됐다. 한 30년 됐나? 그런데 '폐기물법'은 그 규정이 되게 엄격하다. 해서 부산물-잔재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게 우리 협동조합의 시작이다. 사실 우리 협동조합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임무랄까? 과제를 안고 출발했다.”- 과제와 임무? 그게 뭔가?“고기가 들어가는 모든 정육업소에서 가공이 끝나면 잔재물이 나온다. 여지가 없지. 그걸 감자탕집 국밥집 도가니탕집 순대국집 같은 곳에서 사들인다. (마장동이 시민들 에너지 발전소란 게 이런 의미다) 그런데 여기가 도매로 하니까, 그 업소서 영업한 뒤 남은 뼈들, 기타 폐기물을 다시 이쪽서 회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축산물시장에서 나오는 잔재물이 하루 150톤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잔재물이 150톤쯤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모든 잔재물을 옮길 때, 마대자루를 썼다. 거기서 흘러나온 유지들이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냄새의 원인이 됐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성동구청과 함께 노력해 온 게 우리들이다.”마장도시재생 사업의 핵심이었던 처리장 해결 난항- 축산물시장에 오면 풍겨오는 냄새는 어려운 문제다. 그간 해결하고자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지 알고 싶다. “전 고재득 구청장도 애를 많이 썼는데, 하치장을 만들 장소가 없었다. 중구난방이니 그걸 정리하지 못했지. 정원오 구청장이 당선된 뒤 만났다. '오랜 동안 마장동서 일하시고, 회장도 하셨으니,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더라. 서로 노력을 많이 했다. 서울시에서 사무관으로 있다가 성동구청으로 오신 김재겸 교통건설국장이 나와 같이 다녔다. 대성유니드 근처 길거리의 집게차 기름차 같은 거라든가, 주변에 포장마차 같은 거를 거의 다 정리했다. 이후에도 지역경제과 조현용 팀장, 청소과 홍종철 과장도 함께 큰 애를 쓰셨다.”- 도시재생이 시작됐을 때,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유지처리 시설의 건립이었다. 경과가 어떻게 되었나?“현재 마장동 525번지에 건물을 짓고 있다. 원래 그 자리에 하치장 만들고, 유지처리를 깨끗이 해 민원이 안 들어오게 하는 목표가 있었다. 10억 예산도 받아서 가건물을 지으려 했는데, 주변 현대아파트에서 '들어오는 입구라 안 된다'는 민원이 있어 하지 못했다.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 마장도시재생사업을 하게 된 거다. 예산 130억을 받아 건물을 짓고, 거기 지하에 유지처리장이 들어가도록 했다. 현대아파트는 물론 마장동의 세림이나 기타 아파트와도 만나고 동의를 구했지. 차량도 밀폐된 걸로 바꾸고, 지하에서 처리하고, 처리용기도 마대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밤이나 새벽 운송 등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최근 아파트에서 반대 민원이 심했던 걸로 안다. 그래서 그 방안이 다시 취소됐다. 왜 반대하는지 정말 모르겠고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다.”이상희 이사장은 오랜 검토와 협의를 거쳐 추진돼 온 안이 막판 뒤집힌 데 대해 여러번 깊은 아쉬움을 토했다. [이 문제에 전력투구해 온 마장도시재생 강헌수 센터장의 '사직' 역시 이에 연유를 둔다.] '그런 시설을 하면, 축산물시장이 앞으로도 대대손손 유지될 것을 염려하는 아파트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애써 이해해도 그렇다. 시장은 먼저 박힌 돌. 굴러온 돌에 밀려 나는 게, 그들로서는 '정당한 일'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로서도 이곳은 삶의 터이니까. 아파트가 설 때, '시장은 이전됩니다'라는 '말'을 듣고온 주민들로서도 할말이 없는 게 아니지만….”청소, EM살포, 용기변경 등 노력 계속해와. 큰 문제 같이 풀어야  -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다. 그래도 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많은 부분 개선도 됐다고 하던데. “마장동축산물시장 하수관은 중랑하수처리장으로 연결된다. 전에 현대아파트 지을 때, 하수관을 이곳에 연결하려던 시도가 있었는데, 큰일 날 일이라고 우리가 막았다. 생활하수와 연결될 일이 아니니까. 하수관 청소도 기름이 껴 굳으니까 자주자주 한다. 도시재생이 들어오고 물청소도 화·목에 두 번씩 한다. 습식청소차가 들어왔다. 펀펀마주아리 같은 사회적기업(대표 박진옥, 예비사회적기업) 등에서 EM도 대로변 하수구와 오염이 심한 곳에 뿌린다. 마대를 오랜 동안 써왔는데, 플라스틱 통으로 바꿨다. 전에는 독수리 발톱으로 마대를 잡아올렸는데, 지금은 각 업소에서 통에 담아 소규모로 운반해서 처리한다. 구청에서도 단속을 강화했다. 업소나 수거업체도 영업정지 같은 강한 제재를 여럿 받았다. 이젠 다들 조심해서 최대한 흘리지 않고 처리하려고 노력하는 점도 달라진 점이다.”3대 마장우시장 상인연합회 이경래 이사장은 마장동 축산물시장 상인들에 대해 다음처럼 평한 적이 있다. “뭉치자 하면 안 뭉치는 데 일등이고, 협조해 주자 하면 십시일반 협조하는 데도 일등이에요.” 현재 마장동축산물시장상점가 진흥사업협동조합의 협회원 수는 대략 800여 곳이다. '조합'이 상인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면서, 내적인 규율에 의해 시장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면 '조합 가입률'은 중요한 선결 요인이 될 것이다. 마장도시재생 상인과 주민들의 상생협의체에서 주민대표를 맡았던 김영진(마장동 주민자치회 회장)의 말.“시장에서 50년 동안 마대 자루를 썼잖아요. 그걸 플라스틱으로 바꿨어요. 그거 보고 시장 상인들이 이렇게도 하는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한번 바뀌는 게 중요한 거지, 바꿀수 있고, 바뀔 수 있다고 봐요. 우리들이 더 소통하면서 노력해야겠지만.”'고기는 먹겠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일'은 나몰라라 해온 건 우리 관습-습관이었다. '고기는 옳지만, 냄새는 그르다'고 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우리 책임을 다른 곳으로 미룰 수 없다면, 제대로 달려들어,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풀어가는 일이 남았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지구 멸망의 상황에서 길을 찾는 이들의 응전을 보여준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마장동 주민의 제안> 박주환 선생이 고안한 트램 설계 및 구상도(가안) 교통난과 냄새 해결할 근본적 해결책 써보자.시장 누비는 트램 어떤가? 박주환 선생 세림아파트 한마음공동체 총무이자, 전에는 이곳 대표자회의 회장이었던 박주환 선생은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최근 참여했다. 마장용답사근의 생활권 위원회다. 입안을 위해 주민의견을 듣는 이곳에서 박주환은 최근 하나의 중요한 제안서를 냈다. <마장축산시장 환경개선방안 제안서>다. 시장의 교통난과 환경(냄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아이디어다.  - 제안서의 핵심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면? 현재는 냉동탑차와 오토바이 등이 마구 엉기면서 교통난을 만든다. 잔재물도 제각각 처리하면서 오염되고, 이로 인해 냄새도 가시지 않는다. 마장동 시장을 남북축과 동서축으로 궤도를 설치하고, 특수한 설비를 갖춘 트램(레일을 달리는 노면전차)을 설치해서 중앙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트랩이 설치되고 운영되는 이외의 곳은 공간이 남고, 관광자원화도 될 수 있다. [그림 참조] -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데 사실 많은 비용이 든다. 마장동서 운영됐던 기동차 같은 설비차를 새로 설계해야 하고, 중앙관제센터 설치도 해야한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내가 근무했던 포항제철과(광양제철소) 현대제철에서의 경험이다. 복잡한 과정이 중앙서 처리된다. 무엇보다도 상인들이 먼저 이를 이해하고 동의하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사실 어려운 것은 후자일 수도 있겠다.” 박주환 선생은 이상희 이사장과도 만났다. “십분 박주환의 제안을 이해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이이사장의의 결론은 간명했다. “초기에 조성될 때라면 몰라도…, 현재 50여년 굳어진 상황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첫 제안일 뿐. 제안은 두루 사람을 거치며 수정되고 검토될 것이다. 변화는 진행중이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1-13 1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