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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70주년을 보며>-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적 애도김 석(건국대 철학과 교수)
김 석(건국대 철학과 교수)

80년 5월 광주가 끊임없이 영화, 연극, 소설, 시와 노래들로 다뤄지고 우리에게 소환되면서 광주민주항쟁으로 자리 매겨지고 있음에 반해 그간 제주 4·3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집단 기억 저편에 방치되어 있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가 처음으로 4·3 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도 참석했지만 여전히 들추면 안 될 것 같은 생채기처럼 남아 있는 게 4·3이다. 시기적으로도 오래되었고, 섬 지역이라는 특수성이 보태져 4·3을 마치 제주도만의 비극이자 돌발적 사태처럼 받아들이게 한 것도 있지만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억압한 폭력적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엊그제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이 70주년 추모식에 참석해 그간 제주에는 봄이 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봄을 알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한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이제야 제주의 상처가 제주 도민만의 아픔을 넘어 우리가 치유할 상처이자 제 자리에 놓아야 할 잃어버린 기억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상규명과 실질적 명예회복, 그리고 4·3의 완전한 재평가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장애물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4·3의 진실이 이제부터 재조명되고, 그간 숨죽여 울었던 유족이나 억울한 희생자들의 원통함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

이번 4·3 70주년 추모식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우리 사회가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으로 정착시켜야 할 사회적 애도의 중요성과 제도적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제주 4·3이나 광주 5·18 같은 민간인 집단 학살이나 폭력 사태는 당사자는 물론 우리 같은 제3자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긴다.

국가 폭력 뿐 아니라 세월호 같은 사고도 마찬가지로 큰 아픔과 해소되지 않은 죄책감과 우울함을 남기기에 그간 관련 단체나 민간의 노력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주로 감당하기 힘든 외상적 사건이 남긴 정서적, 정신적 후유증의 치료와 적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러면서 외상적 후유증을 의미하는 트라우마(trauma)가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정부나 지자체도 심리치료 지원에 주로 머문다.

사회적 비극을 트라우마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게 틀린 것은 아니나 그 보다 더 근원적인 해결은 사회적 애도에서 찾아야 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17년 「슬픔과 멜랑꼴리」라는 짧은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트라우마 원인이나 치유와 관련해 시사하는 매우 크다. 프로이트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정상적 슬픔과 병리적 상태인 멜랑꼴리를 구분한다.

슬픔과 멜랑꼴리는 둘 다 우울함, 슬픔, 무력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완전히 다른 정신적 상태로 슬픔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소된다면, 멜랑꼴리는 극단적인 망상이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슬픔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온통 빈곤해지고 우울해 보인다면, 멜랑꼴리에서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쪼그라 든다. 근거 없이 자기를 비하하고 욕하며, 심한 죄책감을 보이지만 그것에서 빠져나올 힘도 갖지 못한다.

그런데 둘을 나누는 결정적 기준이 바로 애도작업이다. 독일어로 슬픔은 traur인데 이것은 슬픔이라는 감정도 지칭하지만 그것을 표시하거나 슬퍼하고 있다는 동사적 의미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슬픔은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끊지 않으면서 슬픔의 정서를 드러내고 아파하는 심리상태로 이것을 통해 상실의 고통이나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면 어떤 계기로 슬픔을 상징화할 수 없거나 드러낼 수 없을 때 그것은 우리 안에 커다란 구멍이 되면서 자아자체를 제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슬픔의 원인이 실종되고, 자아 자체가 비난이나 고립의 대상이 된다. 우울증이나 멜랑꼴리에서 자아가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망상적 상태에서 근거 없는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학대나 공격성을 발휘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애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애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감당하기 힘든 외상을 경험하면 우리는 그런 사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서 대처하려고 한다. 이 때 공동체가 그것을 억압하고 부정적으로 대하면 개인은 자신의 경험을 끌어안을 수 없고 애도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결국 정상적 슬픔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면서 자아가 자아를 공격하는 악순환의 상태에 빠지는데 이것이 바로 멜랑꼴리이다.

4·3을 예로 들면 그 사건의 피해나 집단 학살, 고문, 폭력 같은 극심한 후유증이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는 것은 끔찍한 경험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이 자신의 경험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고 그것을 공동체의 기억에서 지우면서 한사코 망각을 강제당할 때 외상적 사건으로 작용한다.

그간 유족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빨갱이로 몰릴까봐 제대로 4·3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시급한 것은 4·3의 당사자들이 폭도가 아니며, 당시 남북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 헤게모니의 희생양으로 내몰렸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국가적 작업이다. 사회적 애도는 이런 진상규명에 더해 희생자들의 희생을 공동체가 기리고 아파해주는 사회적 의례를 동반해야 한다.

사회적 애도가 있어야 끔찍한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지 않고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슬픔이 된다. 과거 우리 전통에는 씻김굿 같은 훌륭한 사회적 애도의 모델이 있었다. 씻김굿은 망자의 원혼을 달래는 것 뿐 아니라 망자의 한을 풀면서 가족들에게 부채의식을 덜어주고 공동체가 이를 추인하는 훌륭한 집단치료의 예시이다.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다.

광진투데이  kjtoda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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