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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 고<廣津考>한정수/건국대 사학과 교수
한정수/건국대 사학과 교수

광진구(廣津區)의 구 이름에는 광나루가 들어가 있다. 그런 만큼 광나루의 역사와 그에 얽힌 일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광나루의 개발은 이미 백제 때부터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백제의 도성과 아차산 등이 마주하고 그 사이로 한강이 흐르면서 나루가 생겨 번성할 수 있었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백제 정절의 상징 코드인 도미(都彌)의 부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도미진 혹은 도미나루가 떠올려질 따름이다. 물론 이는 고구려가 일시 아차산성을 축조하고 경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도미진은 조선 초에 이르러 광진의 위쪽에 있었던 도미진(度迷津, 도미는 渡迷로도 쓰이고 있음)으로 바뀐 듯하다. 하지만 기록 등이 미흡하여 짐작으로만 그칠 수밖에 없다.

아단산 즉 아차산에서의 해돋이 모습이나 아차산에서 보는 한강의 굽이굽이 물줄기는 분명 서울에서 볼 수 있는 풍광 중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사람들이 땔나무를 위해서든 소원을 빌기 위해서든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광나루가 개발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광나루와 그 일대의 본격적 개발은 한양 도성의 개발에 따라 이루어졌다. 물론 고려 왕조에서도 남경(南京) 개발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었기에 한강의 곳곳에 이르는 나루 개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단지 고려 중기의 시성(詩聖)이라 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임진나루에서 사평나루〔沙坪津〕를 건너는 과정을 시로 읊어 그 개발이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실 광나루 개발의 공은 모두 조선 태종(太宗, 1367~1422)에게 돌려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태종에 의해 살곶이목장 개발이 완료되어서이다. 

또한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지금의 시루봉〔甑山〕아래에 이궁(離宮)과 함께 그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세종 1년(1419) 2월 낙성식을 하면서 정자 이름을 낙천정(樂天亭)이라 명명하였다. 낙천정 이궁이 세워진 것이다. 이후에도 세종은 태상왕인 태종을 생각하여 낙천정을 염두에 두면서 그 북쪽에 정자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재위 14년(1432)에 세워진 화양정(華陽亭)이었다. 세종의 역할도 매우 크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광나루라는 행정명은 태종 10년 상왕인 정종이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제사하고 돌아올 때 광나루에 나아가 영접하는데서 처음으로 보인다.

이후 광나루는 현 구리에 있는 건원릉 참배와 연결됨으로써 본격 성장하게 된다. 이후 건원릉을 비롯한 동구릉이 구리에 조성되면서 국왕의 왕릉 참배가 계속되었고, 그 어로가 동대문과 살곶이다리를 거쳐 광진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 후기에도 숙종이나 영조, 정조 등의 경우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에 나아갈 때 용주(龍舟)를 타고 광나루를 건넜으며, 그 직전에는 광나루에 주정소(晝停所)를 설치하여 임금이 낮에 잠시 머물며 수라를 들기도 하였다.

특히 정조는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에 행차할 때에는 배다리를 설치토록 하는 어제(御製)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내린 바 있었다.

1414년 태종은 상왕인 정종과 동교에서 매사냥을 하고 광나루에서 술자리, 음악과 춤을 베풀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처음으로 경기도관찰사의 청을 따라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하는 사람들의 출입 등을 점고하기 위해 좌도수참별감이 광진·용진 별감을 겸하게 하였다. 광나루에 관방(關防)으로서의 의미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후 광나루에는 나루 관리를 위한 위전(位田)을 지급하여 나룻배로서 공선(公船)과 뱃사공을 두어 운영하게 하였다.

동시에 광나루 개발은 교통로와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광주(廣州)에서 광나루를 거쳐 동대문으로 통하는 요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세종 대에 경상북도에서 도성에 이르는 도로로 지목되면서 더욱 그 의미가 커졌다. 청도(淸道)·문경(聞慶)·연풍(延豊)·괴산(槐山)·음죽(陰竹)·이천(利川)·광주(廣州)를 경유하여 광나루를 건너 도성에 이르게 하는 길이 이에 해당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광나루에는 나루와 함께 역원으로서 광진원(廣津院)이 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한양 도성은 외사산(外四山)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데, 북쪽의 북한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 그리고 동쪽의 용마산과 아차산이 이에 해당하였다. 광나루는 이 가운데 용마봉과 아차산이 흘러 한강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상으로도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본래 신라 때 북독(北瀆)이라 하여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와 풍수 상의 위상이 있자 태종은 이미 한양 도성의 개발이 거의 완료된 태종 14년(1414) 3월에 내시별감을 보내 '광진의 신〔廣津之神〕'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세종은 호랑이 머리를 광나루에 빠뜨려 가뭄을 해소하고자 한 바 있었다. 이러한 내용이 반영되어 광나루 아래쪽에는 양진사(楊津祠)가 세워져 용에게 제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이후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양진사는 봄과 가을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제사를 행하는 대상이 되었다.

광나루는 한양 도성에서 보았을 때 동쪽 교외에 해당하였으며, 여기서 한강을 건너면 광주, 이천 혹은 원주로 이어졌다. 그러한 관계로 광나루는 한양을 떠나게 된다는 심리적 경계선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태종 대에 자색이 매우 빼어났던 기생 어리(於里)에게 빠져 결국 세자의 자리에서 폐해진 양녕대군이 광주로 갈 때 이곳 광나루에서 배를 탔다.

계유정란으로 인해 왕위를 숙부 세조에게 내놓았던 단종은 사육신 사건으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영월 유배지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도 단종은 화양정에서 세조가 보낸 환관 안노의 전송을 받았다. 이후 단종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유배길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광나루는 이후 선조 때에도 한강의 나루 중 남쪽 길과 통하는 길 중 한강나루, 노량나루, 양화나루 등과 함께 대로(大路)로 구분지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퇴계 이황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광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선조 때 종실 사람 일부는 이를 기회로 사선(私船)을 사들인 뒤 왕래하는 행인에게 배삯을 빙자하여 의복과 식량을 빼앗고 모리(牟利)하여 원성을 산 바 있었다.

어쨌든 이 같은 모리가 횡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광나루가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창했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후손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영조 대에 주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당시 광나루 풍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광나루 강물 위 물결은 출렁대는데 / 무수한 돛단배들 저녁구름 헤치누나 / 선창에 사모 젖혀 쓴 많은 길손 가운데 / 누가 그대인지 알 수가 없구려”(『미호집』권1, 시)

이를 이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광나루에 다다른 풍광을 노래한 바 있었다. 그는 그 풍광과 함께 광나루의 의미까지도 곁들여 읊었다.

즉, “종횡으로 이어진 수륙의 길목 / 강가의 버들 도성문으로 이어지고 / 소와 말은 배가 작다 서로 다투니 / 어룡은 물이 시끄럽다 싫어 하네”(『다산시문집』권1, 시)라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광진교와 잠실대교 밑을 보면 김원행이나 정약용이 노래했던 풍광과는 사뭇 달라졌다. 5월의 길목에 강바람을 타고 한강의 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요트들이 넘실거리고 공원화된 한강공원에는 강바람을 느끼려는 많은 향락객과 자전거 등이 넘쳐나고 있다.

광나루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폭넓게 만나는 나루 역할을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는 듯하다. 더불어 광진구에서는 광진 개발에 혁혁한 역할을 한 태종과 세종을 위한 기념시설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제안해 본다.

광진투데이  kjtoda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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