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세운 9월의 6·25전쟁영웅 박정모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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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세운 9월의 6·25전쟁영웅 박정모 대령
  • 서울로컬뉴스
  • 승인 2018.08.27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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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호/서울지방보훈청 보훈과
오제호/서울지방보훈청 보훈과

6·25전쟁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중앙청 태극기 게양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비록 많은 국민들이 기억하는 교과서 속의 사진은 1959년 서울수복 9주년 재연행사 시 촬영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와는 별개로 대한민국의 상징이었던 중앙청 돔에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한 것은 6·25전쟁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국민들에 뇌리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또 하나의 비화가 있었다. 아래에서 소개할 9월 이달의 6·25전쟁영웅과 관련되기도 한, 숨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인천상륙작전으로 6·25의 전세를 바꾸는 데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의 다음 목표는 서울 탈환이었다. 美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대가 선봉이 된 서울수복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9월 25일에는 서울 시가지에 진입했고, 이튿날 새벽에는 서울시청을 탈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탈환한 서울시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한 것은 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박정모 소위를 비롯한 해병대 1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원들이었다.

이렇게 수도 서울의 상징인 시청 탈환의 주역이 된 이들은 대한민국의 상징인 중앙청도 미군이 아닌 국군이 먼저 탈환하여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유엔사령부의의 군령에 따라 한국 해병대의 진격로는 시청-을지로였고, 중앙청은 미국 해병대가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즉 미국의 작전구역이었던 중앙청은 정상적으로 작전이 진행될 경우 미군에 의해 탈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청 점령을 외국군에게 양보할 수 없었던 박 소령은 대대 본부의 허락을 받아 소대원을 이끌고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작전에 돌입했다. 미군이 아직 진격하지 못한 중앙청은 여전히 북한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박 소령과 소대원들은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중앙청에 진입하여 잔존 북한군을 제압한 이들은 9월 27일 오전 6시 경 천신만고 끝에 중앙청 돔에 올라 태극기 게양에 성공했다. 이어서 한미 연합군이 서울 전역을 점령함으로써 공식적으로는 9월 28일이 서울수복일이 되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한국 해병대의 중앙청 태극기 게양은 미국 작전구역에 대한 침범으로 간주되어 책임자는 군법에 회부될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 해병대 지휘관은 대한민국의 상징인 중앙청 탈환에 한국군이 먼저여야 한다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열정과 애국심을 높이 샀다. ‘세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는 요지의 트루먼 대통령 명의의 표창이 한국 해병대로 전달된 것이다. 소대원들에게 작전의 공을 양보한 박정모 소위의 배려에 따라 미국 동성훈장은 양정모 이등병조에게 수여되었다.

이처럼 ‘9·28서울수복’의 상징이자 수복작전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중앙청 태극기 게양에는 박정모 소위와 소대원들의 비화(秘話)가 있었다. 그리고 이 숨겨진 이야기를 가능게 한 박정모 소위의 국군으로서의 기개와 결사(決死)의 열정의 바탕에는 뜨거운 애국심과 투철한 구국의지가 있었다. 이후에도 금곡전투, 원산상륙작전,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서 활약한 박정모 소위는 1961년 대령으로 예편하였고, 정부로부터 을지, 화랑, 충무 3개의 무공훈장과 국방부장관 표창 등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국가보훈처에 의해 2018년 9월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지난 2010년 84세의 나이로 서거했지만 중앙청 태극기 게양의 순간이 그렇듯 ‘박정모’라는 이름 석자는 명예롭고 또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의 역사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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