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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이상호 정책위원장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칼럼

이상호 정책위원장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K의 어린 시절, 그 시대 누구나 그랬었지만 자장면은 꽤 귀한 음식이었다.

지금이야 전화만 하면 집안까지 배달해주는 시절이지만 당시에는 일부러 발품을 팔아야만 먹을 수 있었다. 자장면 집 주인 입장에서는 굳이 배달을 하지 않아도 수익이 짭짤했으니 배짱 장사를 할만도 했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은 사정이 달랐다. 비가 내리니 손님은 뜸했을 것이고 당일 자장은 꽤 많은 양을 남겨야 했다.

비 오시는 날! 냄비를 들고 자장면 집을 찾아 가면 평소보다 싼 가격에 자장을 담아 주고는 했다. 어린 시절! K는 집안에 기여를 할 것이 없었다. K의 장애를 낫게 하기 위해 헌신하셨던 부모님의 얘기를 그저 묵묵히 침묵으로 감내해야만 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이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 분들과 나누시던 헌신의 기억들은 고스란히 K의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K는 장애를 원하지 않았지만 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K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혹독할 정도로 K의 형제들을 단련시켰다.

K의 치료 문제로 어머님은 몇 달이고 집을 비우는 일이 생겼고, 당시 열 살이었던 K의 누나는 온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야만 했다. 재정을 담보해야 했을 아버님은 열심히 직장을 다니셨지만 어머님과 K가 없는 스산한 집안 풍경이 싫어 꽤 많은 술자리를 일부러 만들어 늦게 귀가 하시곤 했다. 열 살짜리 큰 누나만 바라보고 있는 나머지 삼 형제는 부실한 밥상과 마주앉아야 했다.

아버님이 돌아오실 버스정류장 처마 밑에서 사남매는 늦게 오시는 아버님을 원망하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아버님은 그 술 취한 정신에도 어머님의 고생을 얘기하며 눈물을 훔치는 K의 형제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혼찌검을 내시곤 하셨다. 불과 열 살, 여덟 살, 여섯 살, 네 살짜리 꼬맹이들을 말이다.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아끼시며 K의 치유(spontaneous-내재하는 힘에서 생기는, 자연발생적인)를 도맡아 왔다. 치료(나는 장애는 차별을 강요하는 장애사회를 가슴 아프게 경험하고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가 되지 않을 경우 당신의 자살과 K의 타살까지 결의하며 말이다.

죽음을 결의한 사람은 누구도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세계 어디를 가도 강인하기로 유명한 우리의 어머니보다 더더욱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어머니는 몇 수십 배 강인함을 가진다. 운명과 숙명이 교차되며 그것에 저항하는 순간 인간은 무서울 정도의 위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치료과정의 고단함보다 부모님은 이후 장애인이 된 아들과 함께 치유해야 할 마음고생이 더욱 컸던 것 같다. 불쌍한 형제들이었다. 모든 것을 항상 K에게 양보해야 했었고, K를 돌보기 위해 강해져야 했다. 부모님은 사후 K의 안위를 더욱 걱정했던 것이다.

K를 놀리는 동네 아이들은 형제들에게 거의 폭행 수준의 테러를 감당해야 했고 K의 친형은 몇 살이나 많은 이들과 맞짱을 뜨며 승승장구했다. K의 형은 이른 시절! 벌써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생들을 패고 다녔다.

형과 K는 모유를 먹지 못하고 자랐다. K의 치료로 인한 고생 덕에 모유가 돌지 않아 암죽으로 아이의 허기를 달래야 했고, 어머니는 K가 남긴 암죽으로 꽤 긴 시간을 연명했다. K의 형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볼 수 없었으니 큰누님이 끓여 냈던 암죽으로 허기를 연명했고, 그나마 쌀이 떨어질 때에는 밀가루와 미원으로 암죽 흉내를 내어 허기를 달래야 했다.

분유 한 통 살 정도의 돈이 모이면 꼭 K와 그의 형을 먹이겠다던 아버님의 다짐은 암죽이 다할 때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가족은 꽤 긴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자식과 부모가 결코 원하지 않았던 단절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비 오는 날! 자장을 얻어 오는 것은 K의 담당이었다. 무엇 하나 가족을 위해 해내야 할 것이 없었던 K는 우연히 친구에게 얻어들은 자장을 싸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된 후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자장면이 200원쯤이었고 그 돈을 모아 자장을 사오면 배불리 먹어주는 형제들을 보며 K는 행복했다. 가족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K의 보람이었다. 비장애인이 걸어서 십분 거리를 K는 한 시간을 걸어야 당도 할 수 있었다. 자장면 집 아저씨는 몸도 불편한 아이가 얼마나 먹고 싶었겠냐며 다른 이들이 시샘을 할 정도로 더 얹어 주곤 하였다.

비 오는 날 K는 우산을 쓰지 못한다. 걸음도 불편하니 우산이 그 어려운 걸음을 더욱 불편하게 한 것이다. 우비를 쓰긴 했지만 장대비는 곧 K의 온몸을 젖게 만들었다.

더욱 심안 저 깊은 곳을 아리게 만드는 것은 넘어지는 것이었다. 우비를 쓰고 절름거리며 냄비를 들고 오는 길은 K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날에는 자장을 담은 냄비는 비와 함께 뒹굴어야 했고 깨진 무릎에는 피가 흥건히 고이곤 했었다.

그 어린 나이에 K는 깨달은 것이 있다. ‘비 오는 날에는 울어도 된다! 티가 나지 않으니 실컷 울어도 된다!’ 바지에 구멍만 나지 않는다면 깨진 무릎은 감취질 것이니 다시 발길을 돌려 자장면 집으로 향했다. 걱정으로 동생을 기다리던 형제들은 대략 눈치를 채고 있었다. 허나 동생의 마음고생을 짐작하는 터라 맛있게 먹어주곤 했다. 물론 동생 눈치 채지 못하게 속울음을 내며 말이다.

어느 날! 비님이 오시고 다시 자장냄비와 함께 길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K는 어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흠씬 두들겨 맞을 줄 알았던 K와 형제들은 웬일인지 지갑을 들고 따라서라는 어머니의 명을 듣게 된다.

자장에 찬밥을 비벼먹었던 것이 전부였던 형제들에게 그날 어머니는 탕수육까지 사주셨다. 그 후 K의 주머니에는 자장을 살 200원이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꽤 긴 시간을 맴돌아야 했다. 그 후 K와 형제들은 평생 어머니가 자장면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다.

 

에필로그 [epilogue 혹은 뒷 담화문]

곧 한국사회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한다. 확실치는 않지만 4월 20일은 ‘곡우’이며, 일 년 중 가장 비가 오지 않는 날이라고 한다. 이 의미는 일 년 내내 집안에만 있어야 할 장애인에게 일 년 중 단 하루라도 외출과 나들이를 하라는 국격의 지엄하신 배려인 듯하다.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로 정해진 것은 전두환 정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최초의 장애인 성문법인 장애인복지법도 전두환 정권에서 제정되었다. 다만, 일본의 장해자복지법을 원문 하나 바뀌지 않고 같다 붙이기를 시전했으며, 그 끝은 노력 조항이었다. 모든 법안이 할 수 있다, 로 끝난 것이다. 즉, 안 해도 된다는 말이다.
전두환 정권은 장애인의 권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닌 광주를 피로 물들인 국민 학살정권의 도덕적 반전을 꾀했던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제 곧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다가온다. 노숙인, 성적 소수자, 학교 밖 청소년, 이주민, 새터민 등 한국사회의 수많은 소수자들 모두 1300원만 있으면 버스를 탄다. 장애인만 빼고 말이다. 일 년 중 가장 비가 오지 않는 곡우이며,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이 그래서 서럽다.
지역사회의 모든 지도자 분들께 기원한다. 장애인으로 대신 살아줄 수 없다면 차별과 장벽에 맞서 싸우는 것은 장애인당사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장애정책을 결정하는 선택과 결정의 권한은 장애인 당사자의 몫이다.
‘Noting about us without us! 우리를 빼고 우리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멕시코 민족해방 운동 슬로건)’

강서양천신문사  gsyck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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