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체로 거른 깨달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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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체로 거른 깨달음의 노래'
  • 성동신문
  • 승인 2019.06.1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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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和政)·화옹(和翁) 이계묵(李啓默)

3,심우도(尋牛圖)

*소(牛)를 보았다,

꾀꼬리는
나무 가지에서 울어 대고

날은
따스하고

바람은 살랑 살랑 불어
언덕 위
버드나무 푸르네!

다만
다시 이곳에서

회피 할 수 없으니
삼삼한

두각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네.

黃鶯枝上一聲聲 日暖和風岸柳靑
只此更無廻避處 森森頭角畵難成 <三見牛頌>

소 찾아 나선지 한해가 지난 대목입니다. 처음 소 찾으려 나설 때가 늦가을 아니었습니까? 매미가 울었으니까, 늦가을이었죠, 꽤나 찾아 헤맸습니다, 찾아 헤맨 보람이 나타났습니다, 견우(見牛)소를 봤으니까요, 소를 바로 눈앞에서 본 것이 아니라, 발자국 따라가다 보니, 저 만치 숲속에서 소가 보인 것입니다, 때가 때인지라 나무 가지에서는 꾀꼬리가 꾀꼴~ 꾀꼴~하고 울어 됩니다. 날은 따뜻한 봄이라 바람은 살랑 살랑 불어대고 언덕에 버드나무는 잎 싹을 티 워서 파릇파릇하고 그대로가 호시절 아닙니까? 소 찾는 사람이 소를 봤으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 심적心的 기쁨을 첫句와 이구二句로 표현 한 것입니다.

삼구(三句)는 목동(牧童)의 의지(意志)를 표현(表現)한 것입니다. 소를 봤으니 여기에서 소 찾는 것을 그만(회피)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가 내가 찾는 소인지. 남의 집 소인지 확인해 본 것이 사구 말구 송(四句 末句頌)입니다. 삼삼(森森)한 두각(頭角)을 그려 보는데 그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삼삼(森森)은 숲이 울창한 것을 말합니다. 두각(頭角)은 소머리 뿔 아닙니까? 견우 송(見牛頌) 그림을 보면 꼬리와 몸통은 보인데 머리는 숲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 소가 내소인지, 남의 집 소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비유하면 망상인지 본심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머리 뿔을 그리려고 해도 그릴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뿔을 봐야 내 소인지 알 것 아닙니까?

확실히 봐야 그릴 터인데 꼬리만 봤으니 긴가? 만가합니다, 왜! 곽암선사가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하다보면 천 생각 만 생각 일어납니다, 그런데 생각이 조금 쉬었다고 그 마음이 본심(本心) 견우(見牛)인가? 아닌가? 하고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한 대목입니다. 망상(妄想)이 조금 쉰 다고 본성(本性)을 본 것은 아닙니다, 소꼬리만 본 사람이 소 본 것은 아니잖습니까? 어떤 분은 견우(見牛)가 견성(見性)이라고 말을 합니다, 천만의 말씀 입니다. 마음공부 안 해 본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런 말 따라 가면 죽습니다.

사견(邪見)입니다, 잘못 본 것입니다, 곽암선사는 실 참 실구(實參實究)한 선지식(善知識)입니다. 종장(宗匠) 아닙니까? 한 시대(時代)를 풍미했던 대선지식(大善知識)입니다, 심우 도는 체험에서 나온 가르침입니다. 소를 본 것은 마음공부가 조금 되어가는 것을 말 한 것입니다. 화두가 조금 들린 것뿐입니다, 화두가 일여(一如)해야 하는데 하다 보면 끊기거든요, 망상(妄想)이 조금 쉰 정도입니다, 망상(妄想)이 조금 쉰 것 것이 본심(本心)은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오늘은 곽암선사 견우 송(見牛頌)을 들었습니다. 소 찾는 것이 마음 찾는 공부입니다. 그러니 소 찾는 것을 마음 찾는 공부로 돌리십시오. 수행 덕담(德談) 한마디 할까요, 당처투과 철오 자성(當坐透過 徹悟自性)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자성自性을 확철대오(廓徹大悟)하자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마음들 닦아서 모두 다 함께 부처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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