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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5)명길랑 / 천주교 서울평협 전 대외관계 위원장

Ⅲ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 : 1945.2.4.∼2.11)

명길랑 / 천주교 서울평협 전 대외관계 위원장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소비에트 연방의 당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등 3개국의 수뇌가 회담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를 앞두고 연합국들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한 계획을 검토해야 했고, 전후 세계 질서를 규정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미·영·소 3개국 수뇌가 회담을 하였다.


회담 주제는 주로 4개 부분이었다. 첫째,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후 미·영·소가 분할 점령하고 전범과 전쟁 배상금 등 일련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둘째, 폴란드 문제는 폴란드 정부 구성과 국경, 구획 문제를 해결했다. 셋째, 국제연합 창설에 관해서는 전쟁이 끝나면 그 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 두기로 했다. 넷째, 소련의 대일(對日)참전 문제를 논의했다.

얄타 회담 전후의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戰況)은 유럽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역이 나치의 굴레에서 벗어났고, 1945년 봄 미국·영국·소련 등의 연합군은 동서 양쪽에서 독일 본토를 진입해 치열한 교전 중이었다.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 전쟁은 미드웨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국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고, 일본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한 상태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잡고 진행 중이었다. 한편 중·일 전쟁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무기와 장비의 지원을 받은 국·공합작 장제스 국부군과 중공의 팔로군이 만주 서남부와 북부 중국 방면으로부터 일본 만주 관동군을 공격하는 등 일본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 당시 일본의 항전 능력 평가에서 일본의 항복시기를 1947년경으로 예측했다.
그때까지 전쟁을 하면 피아간에 100만 명의 인명 손실을 초래할 것으로 판단하고 전쟁의 조기 종식과 인명피해의 최소화를 위해 소련의 대일 참전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미국 측 요청 배경에는 스탈린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당시 소련의 비밀경찰(NKVD)은 중국계 왕모(王某)가 이끄는 정보기관을 사주하여 일본이 만주에 정예부대 100만 명의 관동군과 한반도에 50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고 부풀려 미국 첩보기관과 OSS에 은밀하게 흘림으로써 일본군이 1947년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미국이 오판을 하게 만든 것이다.

미국의 오판은 어디서 온 것인가? 미국의 첩보기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는 유럽·홍콩·남부 중국에서의 첩보 활동은 활발했으나 일본의 만주 주둔 100만 관동군이나 한반도 내의 일본군의 실황 파악은 백지 상태였다. 왜냐하면 태평양 및 극동지역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자신의 관할권 안에서 자신의 명령권 밖에서 독자적으로 첩보활동을 용납하지 않아 OSS요원들의 극동지역과 태평양 지역에서의 첩보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성 전략국장 윌리엄 노도반(William Donovan)준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터까지 태평양을 세 차례나 날아와 맥아더에게 사정했으나, 거절당했다.
맥아더의 옹고집은 미국에게 중대한 과오를, 소련에게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소련은 극동에서 한 몫을 챙기겠다는 야욕을 품고 “만주에 정예 100만 관동군과 한반도에 50만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전력이 막강하다”는 모략을 생산해 냈다. 미국은 정보 부재로 인해 소련의 꾐에 말려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소련에게 대일 참전을 요청한다. 미국의 대일 참전 요청을 받은 소련 스탈린은 즉각 이에 동의하고 얄타에서 미·영·소 비밀의정서를 체결한다.〈1945.2.11. 미·영·소가 얄타에서 조인한 비밀의정서〉
미·영·소 3국 지도자들은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에서 종전이 된 후 2,3개월 내에 소련이 다음과 같은 조건하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가할 것을 동의함.

1. 외몽고(몽고 인민공화국)의 현상은 그대로 유지한다.
2. 1904년 일본이 배반적 행위로 침해되었던 과거 러시아의 권한을 회복한다. 즉 사할린 남쪽 부분과 그 연안 도서들은 소련에 반환한다. 대련(大連)의 상업 항구는 국제화되며, 이 항구에서의 소련의 우월적 이익은 보호되며, 소련의 해군 기지로서의 여순항(旅順港) 임대계약은 복원된다. 대련 항으로 연결되는 동중국(東中國) 철도(China Easttern Railroad)와 남만주 철도는 소련과 중국의 합작기업에 의해 운행되며 소련의 우월적 이익은 보호되고 만주에서 중국은 완전한 주권을 보유한다.
3. 쿠릴열도(千島列島)는 소련에게 양도된다. 외몽고와 위에서 언급한 항구와 철도에 관한 합의는 장제스 총통의 동의가 필요한 것으로 이해한다. 3대 강국의 수뇌들은 소련의 이러한 요구들이 일본 패망 이후 확실히 이행될 것임을 합의한다. 그리고 소련은 중국을 일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중국에 군사적인 도움을 제공하게 될 중·소간의 동맹조약을 국민당 정부와 체결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한다.

미국 측의 대일참전 제의를 받아들인 스탈린은 민첩하게 대일전 준비에 착수했다. 독일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와자 스탈린은 1945년 3월부터 유럽 쪽의 소련 병력을 극비리에 조금씩 극동 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4월에는 소련과 일본 간에 1941년 4월에 체결된 중립조약 불연장(不延長)을 일본에 통고했다.

스탈린은 대일전을 준비하면서 전후에 획득할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분주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4월 12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병으로 사망하고 부통령 해리 트루먼( Harry S. Truman)이 대통령으로 등장했고, 4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자살했고,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했다.

소련의 대일 참전은 얄타 회담의 약속대로 독일 패망 3개월 후쯤인 8월 하순으로 예정되었다.
한편,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과학자들은 뉴멕시코 주의 알라모고르도(Alamogordo) 군사지구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트루먼이 원폭실험 성공 소식을 알게 된 것은 그가 회담을 위해 포츠담에 머물며 영국 처칠 수상과 회담하고 있을 때 스팀슨(H. L. Stimson) 전쟁성 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나서였다.

Ⅳ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 : 1945.7.12.∼8.2)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미·영·소 3국 수뇌가 독일 베를린 교회의 포츠담 체칠리엔 호프만 궁전(Schloss Cecilienhof)에서 열렸다. 이 궁전은 붉은 기와지붕과 검은 나무로 벽면을 장식한 ㅁ(미음)자 형 2층(일부 3층) 건물이다.

1917년 독일 호엔촐레른 왕가 빌헬름 황태자가 아내 체칠리에를 위해 지은 집이다.
이곳에서 미국·영국·소련 세 나라의 수뇌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질서 재편을 위해 논의 했다.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은 1945년 7월 26일 미국·영국·중화민국·소련이 발표한 선언이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 내용은 “포츠담 선언”으로 공포되었다. 이 포츠담 선언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수상 처칠,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서명했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했으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가이도·큐슈·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할 것이다”

제1∼5항 : 서문,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민과 일본 인민에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한다.
제6항 : 군국주의 배제
제7항 : 일본국 영토의 보장 및 점령
제8항 : 카이로 회담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제9항 : 일본군의 무장해제
제10항 : 전쟁 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 부활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인 인권 존중의 확립
제11항 :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 :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점령군의 철수
제13항 :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가득찬 포츠담 선언이 7월 26일에 발표되자 일본은 3일 후인 7월 29일 포츠담 선언의 내용을 무시하겠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런 일본의 행동에 미국은 의아했다. 왜냐하면 며칠 전 일본 정부가 7월 13일 전쟁 종결 방법을 모색하고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겠다고 스탈린에게 제안한 사실들을 미국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이 먼저 전쟁 종결 중재를 스탈린에게 의뢰했다는 뜻이고 스탈린은 일본의 제안에 대해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일본이 7월 29일 포츠담 회담 내용을 전면 부인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 하루 전인 7월 28일 일본이 스탈린에게 두 번째 강화 중재를 제안해 왔고 그 사실을 스탈린을 통해 이미 트루먼에게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전쟁을 끌낼 수 없다고 공포하고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를 요청한 일본 군부의 진짜 속셈은 포츠담 선언에 명시된 조건을 다 수용하기 보다는 완화된 조건으로 협의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서 지지만 어떻게 지느냐?”를 생각했던 것이다.

포츠담 회담 기간 중에 스탈린은 참모총장 안토노프(A. B. Antonov)를 시켜 소련군의 대일 참전 시기를 8월 중순 이후로 결정했노라고 미국 측에 통고케 했다. 또 얄타 회담에서 체결한 비밀 의정서에 의거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소련이 참여 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는 참전 요청서를 미국 측으로 받아 그 요청에 소련이 응하는 형식을 취했다.

7월 24일 안토노프 장군은 미국의 마샬(George C. Marshall)장군에게 소련이 대일본 전쟁을 선포한 다음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할 것이라는 의사를 전했다. 이어 그는 마샬 장군에게 “미국이 소련과 함께 한국 해안에서 군사작전을 펼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마샬 장군은 "일본의 주요 부분을 점령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의 전력이 약해질 때까지는 한반도에 대한 육·해군의 합동작전을 예정하고 있지 않다”고 해답 했다.

마샬 장군의 이러한 답변이 한반도를 소련이 점령하고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라는 뜻인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소련의 대일전 참여에 대한 치밀성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7월 26일, 미·소 참모총장 간에 조인된 협정에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할 경우 한반도·만주·동해를 미국과 소련의 공·해군 작전지역으로 분할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분할 안은 나중에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작성한 미국의 '일반 명령 제1호'에 들어있는 38선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었던 사안이었다. 위에서 소련군 참모총장이 말했듯이 미국의 합참은 그때서야 소련군이 한반도를 공격할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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