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20) 응봉산 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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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20) 응봉산 개나리
  • 성동신문
  • 승인 2021.03.2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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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산에서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민 참여 운동의 성소로 다시 태어난 응봉산
응봉산 개나리 (사진;서성원)
응봉산 개나리 (사진;서성원)

○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응봉동 

◆ 응봉산 개나리, 출생 비밀

그때가 몇 년일까. 개나리 축제를 한다고 했다. 개나리를 보려고 응봉산을 찾아갔었다. 성동구에 살지 않았을 때다. 산은 낮았다. 하지만 험했다. 돌산이었고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통과하는 서울시민은 응봉산 동쪽과 남쪽 사면을 본다. 그쪽이 특히 그랬다. 가파른 바위 사이 사이에 개나리가 있었다. 세상은 온통 샛노랬다. 
'이렇게 위험한 델 어떻게 심었지?' 

살다 보니 성동구에서 살게 되었다. 그것도 응봉산이 빤히 보이는 동네에서 말이다. 봄이면 응봉산은 노랗게 피어났다. 응봉산 개나리는 나에게 봄을 전하는 전령사였다. 어디 나뿐인가. 서울시민 모두에게 봄을 알렸다. 그만큼 유명했다.
'저 험한 산에다 누가 개나리를 심었을까?'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상을 했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 그가 방탄차를 나고 올림픽대로를 시찰하는 중이었다. 방탄차가 김포공항에서 여의도를 거쳐서 압구정에 들어섰다. 
“저거 왜 저 모냥이야!”

수행한 사람은 화들짝 놀라서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그의 지휘봉 끝에 응봉산이 찍혀있었다. 강 건너에 있었지만 멀리서 봐도 헐벗은 돌산이었다. 달동네 아이처럼 꾀죄죄했다. 수행원이 즉각 대답했다. 
“네, 당장 조치를 취하겠씀따!”
“저런 것들 내가 어떡하라고 했어? 어!”
“네, 모조리 덮어뿌라고 했슴따! 낼 당장 조치를 취하겠슴따!”

수행원은 머릿속으로 녹색 페인트를 떠올렸다. '천 통이면 되겠지.'
이 얘기는 나의 상상이지 실제는 아니다.

응봉산 돌산에 있는 개나리. 서성원ⓒ

◆ 서울올림픽이 낳은 응봉산 개나리

1981년 9월 30일, 올림픽 개최도시 결정 투표에서 서울이 이겼다. 염보현 서울시장은 그해 10월 23일, 서울시에 올림픽준비기획단을 만들었다. 여기에 도시정비담당과 조경녹화담당이 있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81년 10월 23일,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지시를 내린다. “서울 지역 내 한강의 골재와 고수부지 활용 방안을 검토할 것.” 이에 힘입어 한강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한다. 82년 9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86년 9월에 준공한다. 한강종합개발 사업으로 올림픽대로를 건설하고 고수부지(둔치)를 만들고 유람선을 띄운다. 

응봉산이 '개나리산'으로 변모한 건 1987년께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시민아파트와 달동네가 철거되면서 도시 정비가 이뤄졌다. 하지만 돌산이던 응봉산은 보기에 흉했다. 녹화 사업을 다급히 추진하던 서울시는 병충해와 추위에 잘 견디는 개나리로 묘목을 정했다. 응봉산 전체에 1만 그루 가량을 심었다. 올림픽대로를 따라 김포공항에서 잠실 주경기장으로 향하던 외국 선수단이 돌산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014.3.28. 중앙일보>


◆기후 위기를 극복해보자는 이들이 나서서 시민참여 운동을 시작한 응봉산

2020년 코로나19가 지구에 창궐했다. 바이러스는 2021년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했다. 비대면 생활을 하려고 했었다. 
평범한 일상이 바뀌자 수입이 없거나 줄어든 이들은 생계를 걱정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바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기후 변화가 일으키는 재앙 중의 하나라는 것을. 

2020년 한국은 여름에 긴 장마가 이어졌고, 미국이나 호주는 산불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2023년, 서울시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후 위기가 닥쳐오는데 손 놓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 첫걸음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원하는 시민에게 응봉산에 화분을 두는 기회를 준 것이다. '응봉산 시민 화분두기'를 인터넷으로 신청받았다. 응봉산에 둔 화분은 가능하면 자연 상태로 두었다. 비와 바람과 햇빛 속에 두었다. 이렇게 되자 응봉산에 화분을 둔 사람은 날씨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뭄이 오면 응봉산을 지나칠 때 자기의 화분이 목말라 하겠다고 떠올렸다. '응봉산 시민 화분두기'를 응봉산으로 정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서울시민이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 이용할 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강변북로에서 그랬다. 그리고 인간의 실수로 헐벗은 산이 되었고 그것을 덮어버리려고 다급하게 개나리를 심어야 했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응봉산이 적격이었다. 

첫해에는 한 달에 10명의 시민에게 기회를 주었다. 12월에서 2월 사이는 빼고 9달을 실시했으니까 90명이 참여했다. 다음 해에는 '응봉산 시민 한 식물 심기'로 바뀌었다. 신청자가 크게 늘어났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났던 것이다. 특히 서울의 동부권 시민들의 참여가 많았다. 이들은 승용차로 통행할 때 응봉산을 스쳐 갈 기회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응봉산에는 다양한 꽃과 풀과 나무가 자랐다. 하늘이 거두는 생명들이었다. 

응봉산 개나리 축제 모습. 서성원ⓒ

◆시민 인터뷰 기록

2023년, '응봉산 시민 화분두기'에 참여했던 이대동 씨(광진구)의 인터뷰 기록이 남아있다.
김대동 : “화분 놓을 때, 짜릿했어요.”
기자 : “이 운동에 참가하는 게 그렇게도 감동적이었나요?”
김대동 ; “아뇨. 절벽을 탔거든요. 이왕이면 잘 보이는 곳에 화분을 두고 싶어서요.”
기자 : “아, 네에. 응봉산 근처로 다닐 일이 자주 있으신가 봐요. 그리고 느낀 건 없었나요?”
김대동 : “지구가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는 걸 실감했죠. 내 화분처럼요. 사람은 몸으로 체험해봐야 깨닫게 되나 봐요.”
이렇게 긍정적인 시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2025년, '응봉산 시민 한 식물 심기'를 반대했던 이기적 씨(강남구)의 인터뷰는 사뭇 다르다.
“전형적인 전시 행정이죠. 보기 흉하다고 덮어두려 했던 옛날의 그 짓이나 이게 뭐가 다르죠? 응봉산에서 뿌리내려야 하는 생명들은 어떤가요. 돌산에 살아보라는 건 끔찍한 형벌이죠. 그렇잖아요. 애초에 기후 변화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인간들의 수작 그 자체부터 잘못된 겁니다. 기후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사람이 거스르겠다는 거예욧. 어림도 없는 짓이지.”

◆  응봉산 스토리 세계에 알려져

2027년, 응봉산은 서울시민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해에는 적당하게 비가 내렸다. 폭염과 혹한이 없었다. 시민이 심은 꽃과 개나리가 어우러진 응봉산 봄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름에도 푸른 식물이 산을 덮었다. 가을이 되자 꽃향기가 났고 꿀을 모으려는 벌들이 분주하게 하늘을 날았다. 응봉산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흐뭇했다.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를 지나치는 차에서 말이다.

응봉산 스토리는 해외까지 퍼져나갔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은 응봉산을 보고 싶어 했다. 서울시티투어 차량은 서울숲을 들렀다. 서울숲 전망대는 응봉산을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시민들이 심은 식물로 응봉산은 그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특별했다. 사람들은 응봉산을 바라보며 기후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했다. 쉬우면서도 간단치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응봉산을 바라보며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의 발길이 일 년 내내 성동구로 이어졌다.

<서성원 작가 itta@naver.com>

1972년 미군 병사가 촬영한 응봉산.
금호동 쪽에서 바라본 모습인데 주택들이 빼곡하다.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s5we/22109064672
1972년 미군 병사 사진, 응봉산 정상 부분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s5we/221090646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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