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 많고 왕십리 등 교통요지인 성동에 차들의 역사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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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 많고 왕십리 등 교통요지인 성동에 차들의 역사 빼곡하다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1.10.15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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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 자가용 모아 민정합동 순찰도 하고, 친구아빠 차 타고 사진도

<성동신문 창간20주년, 성동문화원과 함께 하는 사진으로 보는 성동100년> 제10회 차(車)

성동구는 교통이 발달한 곳입니다. 왕십리역은 예로부터 경원선과 중앙선이 통과했고, 현재는 지하철 2호선과 5호선 그리고 신분당선까지 다니죠. 한강으로 강변북로가, 청계천으로 내부순환로가, 중랑천으로 동부간선도로가 설치돼 나란히 달립니다. 교통의 발전 즉, 바퀴가 생기면서 인간은 생산력과 문명의 효율성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문자와 불과 같은 발명품 못지않게 바퀴 역시 인간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왔습니다. 차(車)는 인간의 행동범위를 '인간적인 것' 이상으로 넓히면서 한편으로는 편리와 풍요를, 한편으로는 파괴와 오염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동의 지난 풍경을 차의 변화와 함께 따라가 봅니다. 
왕십리 오거리엔 여행자거리가 조성돼 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동상이 인상깊은 이곳 공원은 성동소방서 부지였습니다. 

▲사진1: 서울역사박물관[윤재석, 나의 살던 서울은, 청어 중)
▲사진1: 서울역사박물관[윤재석, 나의 살던 서울은, 청어 중)

<사진1>은 1966년 6월에 찍힌 이 풍경은 동대문에서 출발한 기동차가 청계천을 넘어 마장동으로 접어드는 때를 잡았습니다. 스스로 동력을 내는 기차를 기동차(汽動車)라 했는데, 기차를 운영했던 경성궤도는 이후 전선을 댄 기차를 병행해 달립니다. 광나루와 뚝섬나루까지 달렸던 이 기동차는 일제강점기엔 군량미와 부식, 전사한 군인을 실어오곤 했고, 왕십리 배추, 성수동 무 같은 농작물들도 날랐답니다. 청계천 판잣집들, 고개를 빠꼼히 빼고 구경하는 아이들, 방역의 풍경을 봅니다. 차에는 시대가 담겨 있습니다.

<사진2>엔 차를 끄는 소가 있는데, 이를 우마차(牛馬車)라 불렀습니다. 정선, 영월 강원도 벌목 나무들이 '뗏목' 형태로 뚝섬나루에 닿으면, 이 나무들 운반을 우마차로 했었죠. 일제시대에는 왕십리에 있던 마루보시라는 운송회사는, 해방 후에 대한통운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진3>은 1960년대 왕십리에서 마포까지 다녔던 전차입니다. 지금도 유럽의 거리에는 이런 트램이 여럿이라고 합니다. 아직 흙길을 다니는 이 기차만 달라졌을 뿐, 학교 가는 아이들, 직장 가는 어른의 풍경이 지금과 그때가 똑같습니다.  
한양대와 왕십리오거리 사이 행당교가 있습니다. 행당교 아래 경원선-중앙선이 직각 방향으로 다니고, 그 아래 다시 기동차가 다녔던 토끼굴이 있으니, 보기 드문 삼겹길입니다. 

사진<4>에 보이는 기동차는 1968년까지 운행했고, 현재는 지하보차도가 되었습니다. 

<사진5>는 금호동이고, 현재는 볼 수 없는 삼륜차가 세왕용달이란 로고를 달고 있습니다. 지붕에는 펑크를 대비한 바퀴까지 얹었으니 든든합니다. 이 차는 금호동 산동네 사는 가난한 이들의 이삿짐, 자대들도 날랐을 것입니다. 

<사진6>은 초등학교 1학년 행당초등학교 친구들입니다. 소풍을 다녀온 날 친구 아빠의 차에 올라타 사진을 찍었습니다. 살짝 자동차가 움직였을 수도 있겠죠. 차 위에서 보는 근사한 풍경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겠습니다. 

<사진7> 오토바이는 수박을 묶는 나일론 끈을 잔뜩 실었습니다. 당시 삼천리에서 만들던 '업무용' 자전거는 앞핸들에 든든하게 지지대가 연결돼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실어도 견딜 수 있어야 했으니까요. 많은 청소년들 소년들도 어릴 적부터 일들을 해내곤 했습니다. 

<사진8>은 용답동의 자동차 정비소입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 보이던 연두색 택시가 눈에 띕니다. 도시가 차 없이 운용될 수 없으니, 정비소 또한 도시의 필수시설입니다. 

<사진9> 14대의 자가용은 우범지대를 순찰하고 청소년들을 선도하고자 마련된 민관합동기동순찰대입니다. 

<사진10>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친구들 뒤편으로 경원선-중앙선이 다닙니다. 빨라진 기차들, 많아진 집들과 사람들, 철로로 사람이 걷던 시대는 이제 갔습니다. 교통에서, 차에서 어떤 변화들이 또 생기게 될까요? 그 생활의 도구들이 항상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원동업 성수동쓰다 편집장】 
 

▲사진2 : 김운억 제공 1955-1963 왕십리오거리(현 성동소방서 왕십리119센터 자리)
▲사진2 : 김운억 제공 1955-1963 왕십리오거리(현 성동소방서 왕십리119센터 자리)
▲사진3 : 안향림 제공 1960년대후반경_왕십리서 마포가는 전차
▲사진3 : 안향림 제공 1960년대후반경_왕십리서 마포가는 전차
사진4 : 조인형 제공 1963년경 행당동
사진4 : 조인형 제공 1963년경 행당동
▶사진5 : 최화영 제공 1972 금호2가동
▶사진5 : 최화영 제공 1972 금호2가동
사진6 : 양금자 1977년경 삼륜차 행당초1학년들
사진6 : 양금자 1977년경 삼륜차 행당초1학년들
▲사진7 : 염귀복 제공 1978년경 행당동
▲사진7 : 염귀복 제공 1978년경 행당동
▲사진8 : 김수환 제공 1982년경 용답동 정비소
▲사진8 : 김수환 제공 1982년경 용답동 정비소
▲사진9 : 이상돈 제공 1983년경 마장동
▲사진9 : 이상돈 제공 1983년경 마장동
▲사진10 : 황귀례 제공 1988년경 마장동기찻길
▲사진10 : 황귀례 제공 1988년경 마장동기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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