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업이 만난사람] 고 이홍렬을 기억하는 명영순, 송경민, 윤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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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업이 만난사람] 고 이홍렬을 기억하는 명영순, 송경민, 윤상임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2.01.25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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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하다보면 사랑을 알겠지”자랐던 마장동서 사랑을 살다
고 이홍렬, <직업을 말해줘> 기획하고, 많은 재주를 사랑에 투자하다
이홍렬 선생이 마장동서 아이들을 위해 기획했던 이웃 직업인과의 대화 《직업을 말해줘》와 함께. 왼쪽부터 명영순 송경민 윤상임

나는 2016년 2월 1일의 블로그를 보고 있다. 제목은 '다시 색전술'. 블로그 주인장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지금 막 수술을 위한 사전 조처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다. 그의 왼팔엔 링거가 연결돼 있고, 제모크림을 발라 털을 녹여떨어뜨린 터라 겨드랑이엔 약냄새가 남아있다. 사람들이 모두 자는 밤에 홀로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가, 오늘 찾아갈 그 사람 이홍렬이다. 
그의 글.
“병원에서 노인들을 보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20대의 젊은이를 보면 안타까움이 가슴으로 밀려오고 어린 아이가 부모와 함께 휠체어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 온다. 그렇다면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을 보면? 열심히 살다 이제 쉴 때가 된 사람을 보는 느낌? 아니면 앞으로 돌진하다 돌부리에 넘어져 쉬는 가련한 중생?
몸이 아프니 겸손해졌다. 잘난체 하던 젊은 시절에는 남들을 참으로 자주 무시했다. 무엇이 그리 잘 났다고 그랬는지 알고 보면 자랑할만한 것도 없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으나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죽도록 사랑하다 보면 진정 사랑을 알겠지. 병실의 환자들이 코를 고는 시간에 나 홀로 글을 쓴다.”
- http://m.blog.naver.com/ipleelee 중

생전의 이홍렬

얼마 더 살지는 모르지만, 죽도록 사랑해야지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겠으나”라고 썼던 그는 2018년 1월 3일 고인이 됐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다 보면 진정한 사랑을 알겠지”라고도 썼다. 그가 베푼 사랑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왜 풍납동에 살고 있던 그가, 마장동에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지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오바마 대통령을 초대하려던 '직업을 말해줘'> 기사 참조] 알고 싶었다. 이홍렬과 함께 '직업을 말해줘'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윤상임, 송경민을 만난 이유였다. 근처 사근동에 살고 있는 이홍렬의 형수 명영순 님도 자리에 함께 했다. 

- 이홍렬 선생은 <직업을 말해줘>의 기획자이자 기록자였다. 마장동 홍익교회 하마방에서 시작해 5년여 가까이 많은 직업인들을 모셨었다. 초대된 강사들중엔 이홍렬 선생과의 인연으로 오신 분들이 다수라고도 들었다. 이홍렬과 마장동과의 인연을 듣고 싶다.

명영순 : “시동생(이홍렬)의 고향은 제천이었다. 그후 워낙 많이 옮겨 다녔다고 들었다. 강원도로도 천안으로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 1960대 후반 1970년대 초 서울로 왔을 때, 터를 잡은 곳이 청계천변 판자촌이었다. 8만원 전세금인가를 주고. 홍렬은 마장동 동명국민학교를 다녔다.”

- 당시 청계천변엔 판자촌이, 하류와 중랑천변으로 '개미굴(토굴을 파고, 그 위에 비닐과 판자로 얹댄 임시거처)'이 많았던 때다. 가난한 삶의 풍경이 이곳 마장동 사근동 송정동 용답동 일대에서 펼쳐졌었다. 
- 명영순 : “남편 홍식이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마음에 큰 짐을 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비가 오면 우산 장사를 하고, 겨울엔 호떡장사, 여름엔 하드통을 메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들었다. 집안 사정상 벌 사람이 없으니 벌어야 했을 거다. 다들 고생을 많이 했겠지만….”
- 이홍렬 선생의 과거 이력이 궁금하다. 어떤 분이셨나?
명영순 : “형제는 2남2녀였다. 홍렬에겐 형과 누나가 있고, 여동생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남편 사랑에 대해선 한이 없다고 하셨더랬다. 굉장히 다정다감한 성격이셨던 것이고, 홍렬은 아마 아버님을 닮은 듯하다. 우리집 아이들이 아파 열이 나면, 아이들을 업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오곤 했던 게 시동생 홍렬이었다. 명절때면 제사 장만에 손을 보태주는 이도 홍렬이었다. 형은 숭실대 전자공학과를, 홍렬은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으니 형제가 이과적인 성격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둘다 음악에 심취하고, 사진도 찍고, 책을 읽고 글쓰는 일을 엄청나게 좋아한 사람들이었다. 형제가 그런 점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

이상주의셨죠. 발이 땅에서 떨어진 듯한

이홍렬 선생은 간암 투병중에도 마장동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꿈을 잃고 생기가 가셔버린 아이들을 위해 '직업을 말해줘'를 기획하고 진행을 도맡아 했다. 창간호이자 종간호가 된, <직업을 말해줘> 소식지를 발행했다. 거기에 그는 썼었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없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꿈을 선사하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식사에 지인을 초대하여 손님의 직업에 관하여 자녀와 손님의 직업에 관하여 자녀와 손님이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나요? 그러면 신뢰를 함께 주어야 합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부모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 자녀들을 전적으로 믿고, 자녀들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우리들의 아이들은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윤상임 : “선생님은 이상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 사는 분 같았죠. 아이들한테 책을 주세요. 당신이 읽던 책들. 영어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이예요. '자신에게 좋았고 좋아했던 책이니까, 아이들도 좋아할 거다!' 그런 거죠. 박물관 가고 음악회 가고 그런 것도….(웃음)”

송경민 : “이홍렬 선생님과 매미우화를 밤새 보았던 일이 기억나요. 땀이 삐질삐질 나는 여름밤, 모기한테 뜯기면서 선생님과 함께 세림아파트 내 숲에서 있었어요. 밤에 탈피를 하니까. 저는 그 전엔 매미 자체가 안 보였었어요. 아이들하고 엄마들, 주변분들도 모두 다 참여 가능한 자리였어요. 영상도 제작해서 저희들과 공유해 주셨더랬죠.”

- 윤상임 : “교회서 공부방을 했어요. 형편도 어렵고 학력이 달리는 아이들과 함께 하니까, 다른 분들이 '학업진도'나 성적과의 관련성 이런 것도 엄청 신경쓰는데, 이홍렬 선생님은 태평이세요. '아이들은 놀아야 하고, 스트레스도 없어야 한다.' 뭐 그러시는 거죠. 저는 수업에 사람이 올까 안 올까 걱정이 많은데, 선생님은 '없으면 놀지, 하나라도 있으면 하고.' 그러시는 거죠. 걱정이랑 해탈이랑 둘이 쿵짝이 맞았던 거 같아요.”
송경민 :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하면 관심들을 가지실 테니까 <영어성경학교> 같은 것도 열었어요. 그러면 미국식 영어랑 영국식 영어를 구별해서 듣도록 준비를 해오시고요. 어원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관련 이야기들도 쭈욱 풀어주시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 청교도들을 알아야 영어 단어와 문장이 제대로 이해되기도 하니까….”

왼쪽부터 이홍렬의 손그림전, 사진전 그리고 스마트폰 개인사진전. 그는 이웃의 가게, 공간에서 자신의 재능과 우정을 나눈 사람이었다.

한 알 밀알이 떨어져 땅에서 썩으면 

이홍렬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일을 좋아하는 사진가요 편집인이었다. 마을에서 섹소폰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던 예술인이었다. 그는 그 재능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재능을 이용해서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그가 기획한 <직업을 말해줘> 영상을 채운 것은 그의 사진과 그의 편집기술이었다. 그는 그린 그림들과 사진들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화이트큐브, 하얀 전시실의 벽면이 아니라 삶의 터와 가까운 가게와 카페에 걸었다. 누구나 밥 먹으러 와서, 차한잔 하며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 이웃의 풍경이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그 사진들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홍렬의 블로그 제목은 <오래 살지 말자 즐겁게 살자>다. 정신없이 앞으로 내딛다가, 고개를 들고 더 높은 곳을 향하다가, 어느날 다가온 죽음 앞에서 그가 찾은 것은 '사랑'이었다. 그가 남긴 블로그 기사를 차근차근 살피고, 그에 대한 이웃을 말들을 다시 재생해 듣는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쫓아 신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았다. 그의 죽은 자리에 어울릴만한 성경 단어가 내게도 생각났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덧붙이는 글>
마장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신동한 할머니, 동명초 후문에 있던 문방구 한양슈퍼에서(아래 사진은 젊은 시절 신동한 님)
이상돈, 사랑의 다리 세운 사람. 마장동 동마파출소장을 역임했다.

지난해 마장동을 찾았다가 두 분의 인상적인 분을 만났었다. 한 분은 1970년대초, 마장동에서 순경과 파출소장을 역임했던 이상돈 선생. 그는 한영중고 앞 청계천에 '사랑의 다리'를 놓은 사람이었다. 
당시 청계천변과 하류 중랑천변은 가난한 이들이 대규모로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생계를 꾸려가느라 교육의 현장에서 밀려난 어린이, 청소년들도 많았다.  

이상돈 선생은 그들을 위해서도 애향기술학원을 짓고, 한글과 타자, 편직술등 직업교육도 했다. 겨울 내복도 장갑도 변변히 없는 버스안내양들을 위해서도, 넝마를 주워 파는 청계천다리 아래 재건대 아이들 위해서도 이상돈 선생은 힘을 썼다. 

마장동서 <청계천박물관 이야기갤러리전>을 진행할 때는 동명초등학교 후문서 장사를 하고계신 한양슈퍼 신동한 할머니도 만났다. 50여년 가까이 문방구를 하셨던 할머니는 우리에게 그동안 간직해 왔던 문방구 제품을 모두 기증해 주셨다. 그리고 5만원의 후원금까지.(이상돈 선생님도 기부금을 주겠다고 하셨다). 
마장동에서 만난 이 어른들은 한결같이 불쌍한 이웃들 아이들을 위하여 한없이 주고싶어 했다. 마장동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는 사람들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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