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김한의원 김연수 관악중앙교회 원로장로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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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김한의원 김연수 관악중앙교회 원로장로가 걸어온 길
  • 금정아 기자
  • 승인 2022.03.29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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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하는 삶, 건강한 삶 40여년’평생 남을 위해 살자고 결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발전기금 전달식. 김연수 박사(좌측)과 경희대학교 조인원 총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발전기금 전달식. 김연수 박사(좌측)과 경희대학교 조인원 총장

김한의원 김연수 원장은 19684, 이곳 신림동 판자촌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당시 주민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고생은 말로 하기 힘들 정도였죠.”

89세의 김 원장은 남다른 고난을 헤쳐 온 기적적 존재이기도 하다. 1950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열일곱 나이에 학도병으로 군대에 입대, 부대이동 중 마침 용변을 보기 위해 대열에서 이탈했는데, 그 순간 폭격을 받아 부대원들은 모두 사망했으나, 자신만 살아남은 기적의 사나이였다. 이일을 겪은 김 원장은 그 때 하늘이 내 생명을 주셨으니 평생 남을 위해 살 것이라고 결심했으며, 한약방을 하다 돌아가신 선친의 업인 한의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평생 남을 위한 김 원장의 덕망과 인품은 널리 알려져 있다. 수많은 환자는 물론 전임 구청장들과 서울시장, 부시장을 역임한 인사들도 지금껏 김 한의원을 찾아와 김 원장이 처방한 약을 복용하는 것은 정직과 신의로 쌓아온 두터운 인품의 소산이라 하겠다.

모교인 경희대 한의대에 대한 사랑도 남다른 김 원장은 한의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모교 발전기금과 장학금으로 거금을 기부했다.

이로 인해 봉사하는 한의사’. ‘나눔을 실천하는 한의사’, ‘신림동의 슈바이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림동 달동네 판자촌에서 첫 개업을 한 김 원장은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무료 진료에 나섰다. 직접 찾아오지 못하는 돈 없는 환자, 거동이 불편한 환자, 응급환자 등은 왕진 가방을 들고 찾아갔다.

심지어 살림집과 붙어있는 한의원의 벨이 새벽 2~3시에도 울려댔고, 진료비를 내지 못하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김 원장은 마다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왔다가 건강을 회복하고 정신까지 맑아져 삶의 의욕을 되찾고 돌아갈 때면 언제나 보람을 느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인술을 베풀어 신림동의 슈바이처’, ‘도시 빈민촌의 아버지’, ‘허준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도 이따금 과거에 진료비를 내지 않고 사라졌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 치료비를 들고 찾아 올 때도 있는데, 그런 날이며 새삼 의료인으로서 남은 생도 낮은 곳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싶다는 각오를 새긴다.

김 원장은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어렵게 공부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려고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전차를 탈 돈을 아끼려고 남대문에서 장충동까지 걸어 다녔고, 친구 집을 전전하기도 했으며, 낮에는 노동을 하고 야간학교를 다녔다. 그때 청량리역 부근은 논밭이었고, 거기엔 천막교회가 있었는데, 교회의 한 칸을 빌려 청소를 하고 숙식을 하면서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의대 재학 중에는 당시 조영식 총장의 배려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다. 그 은혜를 항상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재학생들을 위해 많은 장학금을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총동문회와 한의대 동문회 발전을 위해서도 물심양면으로 기여해 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공로로 200311월 모교와 총동문회로부터 자랑스런 경희인상을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건물 내에는 김연수실이라는 실습실(침구실)도 마련되어 있다.

김 원장은 자녀들을 모두 의료인으로 성장시켜 어려운 지역과 외딴섬 등을 주기적으로 찾아가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9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젊은 의사와 같이 직접 환자를 진료하고 있음은 바로 봉사하는 삶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최소한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기부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에게 20여 년간 장학금을 지급하고 1976년엔 관악·동작 합구 한의사 82명이 합심하여 관악구청 민원실에 한방 무료진료실을 개설했다. 6년간 영세민 수만 명을 무료 진료하는 사랑의 인술이 널리 알려져 KBS 대한뉴스에 방영됐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 영광스러운 국민훈장 목련장과 1986년 동백장 및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김 원장은 부인 이명원 여사와의 사이에 21녀를 두었으며, 장남 김용준 박사(중앙대)는 피부과 전문의사로 강변역 오라클피부과 원장으로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차남 김성준 박사(경희대)는 한국기독한의사 회장으로 해외의료봉사에 헌신적이며 신림동 김한의원에서 김연수 원장과 함께 김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사위 손영익 박사(서울대)는 서림동 예인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명절 때면 해외 무료진료 활동을 하고 있다.

김연수 원장의 전문진료 과목은 부인병으로 그 중에서도 불임증 환자 진료를 많이 보고, 부원장 김성준 박사는 침술에 유명세를 타서 단골 환자가 많다고 한다.

김연수 원장은 안동중, 동북고, 경희대 한의과대학 졸업, 중앙대 대학원 석사, 경산대 대학원 한의학 박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관악구 한의사회 회장, 민주평통 관악구 초대회장, 경희대한의과대학 총동문회장, 중앙대대학원 총동문회장,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총동창회 고문 겸 수석부회장, 서울시의회 보건복지분과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 서울대 총동문회이사, 극동방송국 운영위원, 대구·경북도민회 자문위원, 서울시 의정회 부회장,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영세민 무료 진료로 국민훈장 목련장, 동백장 수상, 국민포장, 대통령표창, 경희대 조인원 총장 감사패, 서울대 오연천 총장 감사패, 중앙대 박범훈 총장 공로패, 납세의무를 성실히 하여 국세청장 표창패를 받았다.

김연수 박사는 지난날 KBS, MBC 극동·기독교 방송 한의상담10여년간 하여 전국으로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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