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과 풍수(용대기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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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과 풍수(용대기 55)
  • 성광일보
  • 승인 2022.08.0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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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老泉)김흥국
광진투데이 편집위원장
삼오지리학회장역임
현재 한국현공풍수학회장
신화씨엠씨(주)대표
노천(老泉)김흥국

우리는 지금, 본 연재의 마무리 단계로 치우천황의 업적들을 나열하면서 민중 속에 뿌리내린 전래유산이나 민속놀이 등의 근거를 배달국이나 고조선에서 찾고 있다.
첫 번째 유산으로, '치우천황^용문양'을 증명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치우도깨비(도철)란 잘못된 주장과 원인을 밝혀보았다. 이는 중화족의 악의적 모략에서 시작하였고 일제가 교과서를 통해 도깨비를 기정화한 것이다.

두 번째 유산으로, '치우 깃발^용대기'란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결과로, 오늘날 전래하는 기절놀이, 기세배놀이, 기접놀이를 비롯한 유사한 명칭의 농기세배, 깃절놀이, 기맞이, 기싸움, 기뺏기놀이 등이 유래되었으며, 이 놀이의 중심에 큰 용그림의 용대기를 펄럭이며 연희를 펼치는 것이 증거라 하겠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치우상징 치우독기를 증명해 보자.

용대기가 전시에 최고 지휘자의 위치와 움직임을 전군에 알리는 깃발이었다면, 독기는 최고 지휘자의 존재 위치를 내부에서 인식하는 표식이다.
다시 말해 수천 년 전에는 기술상 대형 군막을 만들지 못해 여러 개의 작은 군막을 사용했을 것이다. 지휘본부 군막을 비롯해서, 병장기 보관, 숙식 군막 그리고 중요한 정보나 작전은 또 다른 군막에서 명령을 내리고, 필요에 의해서 주변의 직속 부하 군막도 방문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전령이나 긴급정보를 보고할 상황이 되면 지휘자를 찾기 위해 여러 천막을 우왕좌왕하지 않고 독기가 있는 군막을 찾아 신속하게 대면했을 것이다.
그래서 용대기와 독기는 최고 지휘자의 식별 코드이기에 수천 년의 전통이 이어져 조선의 왕들도 행차에도 용대기와 독기를 셋트로 이동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용대기는 용대기나 교룡기로 남겨졌고 독기는 들고 다니는 번거로움을 피해 최고 사령관의 투구 머리에 높이 올려서 최고 지휘자의 표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이러한 내용이 사실인지 최고 사령관의 영정을 통해 증명해 보자.

치우독기와 최고 사령관의 투구 장식이 같은 독기 양식이며, 고종황제는 투구 이름도 “툭기 투구"라 명명했다.
그림의 첫 번째는 뚝섬의 수도박물관에 전시된 치우 독기이다. 두 번째는 고려 때 장군 투구이며, 세 번째는 고종의 톡기투구로 일본 국립박물관의 '오구라 컬렉션'에 전시되어있다. 오구라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합동전기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조선의 문화재를 불법강탈 및 강제매입, 도굴 등의 약탈문화재 컬렉션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2차대전 패망 후 1100여 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으며, 사후에 아들이 1982년 일본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으며, 이를 발견한 한국의 "(사)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가 "고종황제 투구 환수위원회”를 만들어 조선왕조의 유물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 박물관 가츠야실장은 "물품을 수집한 경로는 잘 모르겠다.”면서 당시 오구라는 조선왕조의 유물들이 서구열강에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집한 것으로 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약탈한 신라 금동관모 등 39점은 일본의 국가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가 높다. 언젠가 찾아야 할 조상의 유물들이다.
나머지 그림은 신라, 고려, 조선의 대표 장군들이 독기를 투구에 꽂아서 최고 지휘자임을 표시한 영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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