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린다. 발걸음이 점차 무디어질 무렵 잣나무 숲이 나왔다. 이곳의 잣나무는 수령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경사면에 무리지어 뿌리를 내리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는 동안 몸과 마음은 안정이 되고 시야가 넓어진다. 맑은 공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산속 풍경과 교감하는 것만으로도 육체적, 정신적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한결 평온해진다. 산길 경사면의 기울기가 완만해지고 걷기가 편안해질 무렵 능선에 도착했다. 뒤따라오던 H가 볼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곧 잊게 되는데 사람들은 왜 그리 참을성이 없는지….’ 하고 중얼거린다.
지인 중에 맞벌이 부부로 3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하다가 최근 헤어진 사람이 있다. 주위 사람들은 이들의 이혼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둘이 있는데 모두 결혼해서 살고 있으며 이들 부부 또한 그동안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지내왔다. 하지만 이들이 갑작스레 헤어지기로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돈 때문이었다. 평생 같이 벌어서 재산을 증식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집안일에 관련된 돈 문제로는 자주 의견 대립이 있었다. 어찌되었건 나이 들어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헤어짐을 주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는데 산 아래 동강의 짙푸른 물이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환영 인사를 한다. 산과 물과 하늘빛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동강의 초가을 정취는 인간사 희로애락의 감정을 마음껏 희롱하고 있다. 다만 자연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자기감정에 취해 일상의 잘잘못을 가리려 애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라연’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사진 몇 장 남기고 다시 산 위로 걸어 올라갔다. 산행을 시작해서 50여 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잣봉을 산행 거리나 소요 시간만으로 계산하면 분명 큰 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굽이굽이 휘돌아 치는 동강과 어울려 멋진 경관을 연출하는 모습을 본다면 결코 평범한 산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절벽에 뿌리를 내린 노송 군락지는 동강의 푸른 물과 어울려 천혜의 비경을 이룬다. 능선 가까이 갈수록 산길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는데 할머니가 어린아이 손을 잡고 동네 마실 다니듯 서서히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 길이다.
산꼭대기 정상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평소 자연스러웠던 표정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굳어지는 내 모습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어색하게 보였나 보다. 나를 보며 웃으라고 한다.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정상으로부터 약간 내려간 곳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했다. 두 사람이 풀어 놓은 도시락이 진수성찬이다.
이번 산행에 동행한 H는 나와 같이 외벌이 가장이다. 대부분의 외벌이 가정이 그렇듯 가정에서 경제권은 여자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외벌이라 해서 금전 문제로 생각이 복잡해지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가용 범위 내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늘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싸 온 도시락을 서로 맛있게 나눠 먹으며 반주까지 한 잔씩 하고 식후에는 커피도 마셨다. 커피 향이 코끝으로 행복을 연신 날라다 준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간질인다. 잠시 세상사 잊고 자연과 하나 됨을 느낀다.
인간관계를 수수授受 관계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인데 이러한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세상 고락을 함께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리라. 하지만 수수 관계의 본질은 자신의 본성과 이기적 관점에 우선하기 때문에 물질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관계가 더욱 복잡해진다. ‘돈이라면 마귀도 마음대로 부린다.’는 일본 속담처럼 돈 문제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주고받는 일에 더욱 익숙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관계까지 돈으로 해결하려는 풍토는 조금 지나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네 시간여의 산행을 마치고 출발지였던 봉래초교 거운분교 앞에 도착했다. 산행을 일찍 시작한 관계로 오후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무엇을 하나 더 할까 고민하다가 동강에서 래프팅을 즐기기로 했다. 진탄나루를 출발한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노를, 젓기도 보트 위에 올려놓기도 하면서 편안하게 어라연 풍경에 빠져들어 갔다. 가이드는 보트를 호젓한 곳에 대고 우리에게 어라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어라연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내가 머무는 곳으로 쉼 없이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막힘이 없다. 높은 곳은 채워서 넘고 낮은 곳은 자연스레 흘러 넘는다. 가다가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가고 비켜 가기도 하지만 한번도 남을 탓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너른 곳에 이르면 자만하지 않고 주변 풍경을 모두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여 한 폭의 멋진 수묵화를 그려낸다. 어둡고 굴곡진 곳을 지날 때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두려움을 극복한다. 천길 벼랑 끝에 서서는 이산의 아픔을 노래하다가도 낙하 뒤에는 이내 한자리에 모여 애락을 함께 한다. 물은 절대로 흩어지지 않고 모이는 습성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물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생명을 키우지만 결코 누군가로부터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남의 주장을 억제하거나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오직 베푸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한참을 흐르는 물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있는데 가이드의 힘찬 구령이 떨어진다. 우리는 다시 힘을 모아 ‘영차’를 따라서 했다. 보트 안의 사람들은 물에 흥건히 젖어있었지만 마냥 행복한 표정이다.
급류 지역을 지나자 강물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나는 작은 보트 위에서 인생을 낚는 어부가 되어 미명未明에서 광명光明까지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잣봉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 흘러내리는 동강의 맑은 물은 주변 환경과 한번 스쳐 지나는 인연일 수도 있지만 사랑 그 수수함에 대해서는 많은 진실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큰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행복의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상호 계산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정이 우선시 되었을 때 사랑의 깊은 감정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랑의 수수 관계란,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받는 것으로 감사하되 도를 넘어서는 안 되고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때 느끼는 마음 구조라 생각한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차에 오르는데 손전화기 진동음이 느껴진다. 모처럼 강원도까지 갔으니 영월 문곡리 횟집에 가서 송어회 많이 들고 오라는 집사람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