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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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6)
  • 성광일보
  • 승인 2022.08.1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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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 시인·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김욱동 시인·소설가

“재식이 오나?”
“오냐 네 형님 오셨다 이놈아”
“미친놈, 어라 저건 누고?”
“응 부산 사는 우리 형이다.”
“아~ 너거 아부지가 공부 일등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그 형이가?”
“그래 인마들아, 공부는 정말 잘 한다. 이번에 대학교 들어갔다.”
“참말이가? 대학교 일 학년이면 내 동생뻘이네?”

불쑥 튀어나오며 한 여자애가 말을 건네자, 구석에서 끄트머리만 남은 담배꽁초를 손가락 두 개로 집게처럼 들고서 피우고 있던 남자애가 쏘아붙였다. 
“와, 동생뻘이면 니가 키울라꼬?” “이 문디 머스마 머라 카노?”

두 사람의 대거리가 방바닥에 한바탕 데구루루 웃음으로 굴러다녔다. 
소란이 가라앉자 웃음소리를 걷어 낸 윗목에, 가게에서 사 들고 온 비닐봉지에서 술이랑 과자, 오징어, 사이다 등을 쏟았다.
그동안 여자아이들은 부엌에서 씻은 여름 과일을 푸짐하게 내왔다.

 누구네 밭에서 서리해 온 것인지 수박과 참외가 가득 담긴 쟁반까지 펼치고는 모두 빙 둘러앉아 그곳에 모인 동네 청년들은 모두 거리낌 없이 곧잘 술을 마셨다. 
차례가 한 바퀴 돌았던지 술잔이 내 앞으로 오자 황망히 손사래 치면서 못 먹는다고 사양했다. 
모두 잠시 의외라는 듯 바라보다 그중 동생뻘 운운하던 여자애가 벌떡 일어났다. 

일어서는 기세에 잔뜩 긴장하는 사이, 마치 자기 집처럼 부엌에서 노란 고무밴드로 주둥이를 막은 흰 설탕 봉지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막걸리를 커다란 양재기에 절반쯤 붓고는 사이다와 설탕을 타서 억지로 입에 갖다 밀었다. 
“처음 배울 때, 나도 이렇게 묵었다”

잠시 밀어내다가 민망해하는 누나 뻘 된다는 여자애의 시뻘건 얼굴과 그 방에 모여있던 청년들의 얼굴이 함께 술 마신 공범이기를 재촉하며 닦달하는 시선을 피하듯 입술을 조금 열었다.
혀끝에 닿는 느낌이 유혹처럼 달콤했고, 알싸한 탄산 향까지 도는 단맛을 더해서인지 그런대로 견딜 만해 한 모금쯤 마셨나 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치밀어오르는 취기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마을 청년들의 이야기 밖으로 물러나 간신히 한쪽 벽에 기댄 머릿속이, 열어젖힌 지게문 안으로 들어오는, 메케한 모깃불 쑥 향기를 더하자 점점 몽롱해져 갔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깔깔거리며 웃다가 때론 저들끼리 은밀한 얘기들은 하는지 숨죽인 음성으로 속삭이듯, 들려오는 이야기가 토막토막 귓전을 스쳐 갔다. 
그들의 대화는 빠져들어 가는 잠의 입구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가물거렸다.
그러다 별안간 누구의 입에서인가 '선아'란 이름과 서울 계집애, 등의 단어가 과자봉지 뜯는 바스락거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자 몽롱한 잠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프리즘

“고기가 좀 나오나요?”
“..............?”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밤이 깊어 가끔 우는 풀벌레 소리 외엔 사방이 고요하게 어둠이 내린 시간이다.
잔잔한 수면에 서 있는 야광 찌 파란 형광 불빛이 밤안개가 피는 수면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가끔 잔물결이 일렁일 때면 형광 찌가 잠자리 날갯짓처럼 떠다니는 착시 현상 속에 빠지는 것을 쫓으며 어신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낚시 자리를 펴둔 방죽 위에까지 다가온, 여자의 목소리는 무척 예쁘고 귀엽게 들렸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지역 간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때라서 부산에서는 자주 듣지 못했던 탱글탱글한 서울 말씨였다. 
밤이슬에 젖은 풀들이 가지런히 누운 경사면 방죽을 미끄러지듯 내려온 그녀는 물속 그물망 위쪽에 주둥이를 모은 채 가쁜 숨을 쉬고 있던 6치, 4치, 짜리 붕어 예닐곱 마리가 담긴 살림망 가까이 다가가 어둠 속에서도 하얀 이빨을 반짝 드러내며 조심스럽게 살림망을 들어보고는 제자리에 놓았다. 

그때까지도, 지금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그녀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교칙에 따라 머리를 빡빡 깎은 나보다 나이가 더 있어 보이게 긴 머리였고, 고운 말씨와 귀여운 자태는 순식간에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다시 방죽 위로 올라가 두고 내려온 낚시 가방 따위를 양손에 나눠 가지고 위태롭게 내려오는 것을 잠시 멍하게 보다 재빨리 다가가 짐을 받았다. 
“곁에서 해도 괜찮죠?”
“............그라이소.”

투박한 경상도 말투를 조심스럽게 다듬어 내느라 목에 가시가 걸린 사람처럼 자꾸만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칸델라의 카바이드가 타면서 나는 '쉭쉭' 소리가 요란하지만, 꽤 밝게 주위를 비추는 불빛을 통해서 조금 전 들어주었던 여인의 낚시도구를 살폈다.
그녀가 펼친 낚시 가방 안에는 값이 나감 직한 고급 낚싯대와 도구들이 잘 챙겨져 있었고 살림방과 받침대들도 전에 김해 수로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낚시를 자주 다니는 마니아들이 사용하던 것 같이 무게감이 있었다. 

그녀가 낚싯대 하나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흔적이 남은, 이전에 누군가 낚시를 한 자리로 풀도 없고 돌 따위로 밑자리를 마련해 둔 곳에다 좌대를 마련했다.
그녀가 도구를 다 펼 때까지 계속해서 간데라 불빛을 그쪽으로 비춰 주었다. 
가끔 고맙다는 묵례를 보내면서 서두르지도 어색함도 없는 익숙한 솜씨로 낚싯대를 모두 펼쳐두고는 낚시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몸을 묻었다. 
“떡밥은 무엇 쓰시나요?”
“예, 구포 떡밥을 씁니더. 물에 게면 빨갛게 되는 것 말입니더”
“전에 아버지와 낚시를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어디서 오셨심니꺼?”

자꾸만 투박하게 튀는 사투리가 신경 쓰였지만, 궁금증을 덜어낼 수가 없어서 찌가 깜박거리는 두 칸 대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하얀 손가락으로 수면 앞쪽에서 경사면 조금 위에 있는 마을 중 가운데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앞쪽에 세 채 있는 집 중에서 가운데 집이 이모네 집이에요.”
“....................네.”
“약 3개월 전 이곳에 왔어요.”
“매일 집에만 갇혀있기에 갑갑했는데, 오늘 저녁 툇마루에서 못을 보니, 야광 찌 불빛이 깜빡거리기에 누가 낚시를 하나보다 반색하며 이모네 헛간에 쌓아둔, 몇 안 되는 짐을 뒤져 아버지가 쓰시던 낚싯대를 끄집어냈어요.”
“.......................네.”
“이 동네 사시나요?”
“아입니더 부산서 사는데 여름 방학하고 외삼촌 집에 놀러 왔심니더.”
진학문제로 부모님과 다투다 동생 저금통까지 털어서 대구로 가출한 사실은 차마 말할 수 없어 입속에다 묻어두었다. 
“그럼 고등학생?”
“네 고 3 입니더.”
“그럼 대입 준비에 정신없이 바쁠 텐데?”
“방학도 되고 해서 며칠 동안 머리도 식힐 겸 왔심더.”
“공부 잘 하나 봐? 고3인데 쉴 여유도 있는걸 보면.”
“남에게 뒤 쳐지지 않을 만큼만 합니더.”

은연중에 그녀와의 나이 차이를 가늠하며 입질도 없는 낚싯대를 챔질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키를 돋우었다. 
"그럼 나보다 2살 어리네?" 
"그럼 대학생 입니껴?" 
"응 올봄에만 해도, 그랬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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