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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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 강서양천신문사
  • 승인 2022.11.2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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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강서문화원장
김진호 강서문화원장

 

지난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다. 세계 언어 중에서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는 언어는 한글뿐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진 ‘훈민정음 해례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443년(세종25년)에 창제된 후 1446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은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에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간하도록 했다.

약 500부 정도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례본은 불행하게도 1940년 이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만 존재할 뿐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았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가로 20.1㎝, 세로 29.3㎝의 해례본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예의, 해례, 정인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중요한 해례본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1940년 국문학자인 김태준(1905~1949)이 그의 제자인 서예가 이용준(1916~?)으로부터 가문의 선조가 여진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그 상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을 하사받아 세전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안동에 함께 내려가 이용준이 내어준 훈민정음을 보니 해례본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용준이 보여준 책에는 첫머리 두 장이 없었다.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했던 연산군 시절 부득이 첫머리 두 장을 찢어버렸다는 얘기에 두 사람은 그 두 장을 복원하기로 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로 특선할 정도로 글씨를 잘 쓰는 이용준이 안평대군체로 복원하였다.

실제로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용준의 집안에서 내려오던 것이 아니고 처갓집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에서 반출된 것이라는 사실은 훗날 알려지게 되었다.

고문서가 150원에서 200원에 거래되던 시절 김태준은 해례본을 간송 전형필에게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에 매입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본 간송은 소개해준 김태준에게는 1,000원의 사례금을, 이용준에게는 매입 대금으로 1만 원을 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 시절이라 한글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고 따라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는 세상 밖으로 소문을 낼 수 없는 시절이었다. 간송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도 해례본을 품속에 품고 다녔고 잘 때는 베개에 넣어 지켰다.

그렇게 지켜낸 해례본은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1956년 홍문관에서 학계의 연구를 위해 영인본을 출판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자 간송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고, 이렇게 출판된 영인본을 통해 많은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한글을 연구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로 사형을 당한 김태준, 그의 제자로 월북하여 북한에서 산 것으로 전해지는 이용준, 그리고 그들로부터 해례본을 매입하여 세상에 선을 보인 간송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한글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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