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수화통역사의 길 “울고 웃는 일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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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수화통역사의 길 “울고 웃는 일의 반복”
  • 강서양천신문사 강인희 기자
  • 승인 2017.06.30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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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성 양천구 수화통역센터장

어린 시절 고열을 앓아 청각을 잃게 된 유재성 양천구수화통역센터장. 갑작스럽게 청각장애를 갖게 된 그는 한때 주변의 놀림과 상실감으로 힘든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전화위복 삼아 자신과 같은 농인(聾人)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35년을 수화통역사로 살아왔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갑작스레 찾아온 장애…현실에 굴하기보단 새로운 도전을 선택

5살 무렵 갑작스럽게 찾아온 청각·언어장애라는 병은 당시 어린아이였던 유재성 센터장에게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안겨줬다. 대부분의 청각장애인이 만 5~7세경 발생한 고열로 인해 감기, 뇌수막염, 홍역 등의 병을 앓게 되면서 청각과 함께 언어능력을 상실한다. 그 역시 그렇게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됐다.

보통 청각·언어장애인을 볼 때 단지 말을 하거나 듣는 것에만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장애의 아픔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자 고통의 연속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유 센터장처럼 후천적인 이유로 장애를 갖게 됐을 경우 상실감은 더 크게 작용한다.

그는 “집에선 부모님과 형제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며 “누구와든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수어’를 쓰는 수밖엔 없었다”고 했다. 말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그에게 소통의 유일한 방법은 수어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가 느낀 타인의 시선은 장애가 있는 자신을 늘 놀리는 듯했고, 스스로 만든 편견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두게까지 만들었다.

유 센터장은 그 시절을 회고하며 “학교, 동네, 교회 등 사람을 만나는 모든 공간에서 다들 저를 놀리는 것만 같아서 너무 힘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그를 붙잡아준 건 늘 곁에 있던 부모님과 형제들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유 센터장은 어려운 유년시절을 견딜 수 있었고, 장애에 대한 고통을 이기고 농인들을 위한 수화통역사가 되었다.

언어를 잃은 청각장애인이 수화통역을 한다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할 터. 그러나 그는 수화통역이 단순히 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으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가 농인과 일반 수화통역사 사이에서 수어를 통해 보다 정확하게 마음을 읽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는 “어려운 농인들을 위해 수어를 통한 통역·상담·교육을 지원하고자 수화통역사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인력 부족의 현장, 통역을 넘어 상담시설도 필요

지난 35년간 농아인협회 및 수화통역센터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유재성 센터장은 수화통역사로 살아온 긴 시간만큼이나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간의 이야기를 다 풀어내려면 책으로 여러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라며 농담 섞인 말도 건넸다. 이 말은 수화통역사의 길이 쉽지만은 않다는 얘기기도 하다.

손짓으로 하는 수화통역 현장에선 웃고 우는 일이 반복된다. 특히 수화통역을 하는 이가 많지 않아 일손이 부족한 현장에선 매순간 시간과의 싸움이 이어진다. 양천구에서만 해도 출입국사무소, 경찰서, 검찰청, 법원 등 관공서는 물론 이대목동병원, 시립서남병원, 홍익병원 등 의료기관을 방문한 구내·외 주민들에게 수화통역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은데 그만큼의 손이 부족한 것도 유 센터장이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양천구의 청각·언어 장애인의 수는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5위. 관공서와 대형 병원이 밀집돼 있어 타 지역 주민들의 방문이 잦다는 지역 특성을 반영하면 현재 양천구수화통역센터에 근무하는 4명의 직원만으로는 수화통역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유재성 센터장은 “노원구수화통역센터는 수화통역사 1명을 추가 지원하였고, 농아인을 위한 쉼터도 개소해 3명의 직원을 추가 배치했다”면서 “각 자치구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자체적으로 수화통역센터의 운영 형태를 보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천구도 수화통역 환경의 개선과 장애인들의 편의 증진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유 센터장은 수화통역센터의 수장이기 이전에 수화통역사이자 장애인당사자다. 장애인들이 일상에서 겪는 고통과 불편은 고스란히 그의 이야기가 되어 가슴에 와 박힌다.

최근 그가 특히 염려하는 이들은 ‘독거농아노인’이다. 그는 “이분들이 갑자기 연락이 두절돼 집을 찾아가면 대부분 쓰러져 있거나 아픈 상태로 방치돼 있다”며 “급하게 응급실로 옮겨도 의사와 환자 간 대화가 불가해 며칠간은 수화통역사이자 보호자가 되어 병원을 지키는 일이 왕왕 발생한다”고 했다.

가족과의 단절 또는 소통의 부재 등으로 혼자 살아가는 독거농아노인이 늘고 있지만, 이들의 고충을 들어줄 상담소가 전무하다는 것도 유 센터장은 아쉬움으로 지적했다.

그는 “수화통역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일부분일 뿐, 대화가 안 되면서 발생하는 오해와 갈등, 관계의 단절 등 원론적인 문제는 결국 장애인당사자와 그 가족의 몫으로 남게 된다”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상담시설도 조만간 꼭 생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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