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문화를 깨뜨리고 상생 공동체를 만들어야: 반복되는 갑질 논란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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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문화를 깨뜨리고 상생 공동체를 만들어야: 반복되는 갑질 논란을 보면서
  • 서울로컬뉴스
  • 승인 2017.08.1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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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석 교수/건국대 융합인재학부

사회가 좀 조용하다 싶을 때면 터져 나오는 게 갑질 논란이다. 최근 현역 육군 대장 부부가 사령관 공관에 근무하는 현역 장병들을 대상으로 개인 용무는 물론 심지어 아들 생일 파티나 운전까지 잡일을 시켰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학대하다가 군 인권센터에 진정서가 접수되어 군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국방부 중간발표에 따르면 일종의 호출 벨인 전자 팔찌를 채우고 24시간 대기시키면서 수시로 불러 일을 시키고 마음에 안 든다고 얼굴에 음식을 던진 것, 일을 잘 하지 못한다고 베란다에 가두거나 영창에 보낸다고 협박한 것 등 신고내용의 상당부분이 사실이라고 한다.

모 대기업 회장은 운전기사에게 갖은 폭언과 욕을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운전사를 수시로 갈아치우다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군 장성이나 대기업 오너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백화점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종업원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무리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이른바 갑질이 자주 발생한다.

갑과 을은 민법에서 계약 체결의 쌍방을 일컫는 말로, 거래 관계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갑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계약에 명시된 한도를 넘는 무리한 일을 부탁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하고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갑질이라 부른다. 갑질이 만연하다 보니 이 단어도 '재벌'이나 '김치'처럼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영어사전에 등재돼 나라망신 시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하청업체에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에 더해 인격이나 정서적으로 괴롭히면서 노예처럼 대우하는 갑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대학교수가 논문지도를 핑계로 대학원생을 과도하게 부려먹거나 인분교수 사건처럼 폭행하고 괴롭히는 것,  직원들에게 상사나 기업주가 믿는 종교를 강요하고, 연예인 지망생에게 성 접대를 요구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한국형 갑질이다. 창업주가 기독교를 믿는 모 의류업체는 직원들에게 무조건 교회출석을 의무화하고 심지어 월급에서 십일조를 낼 것을 종용하기도 해서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
왜 갑질 논란이 끊임없이 되풀이 될까? 갑질을 일부 개인의 부도덕성 탓이나 우연한 일탈로 간주하면 안 된다.

필자는 핵심 원인의 하나를 우리의 공동체 문화가 서열화 되어 있고, 차별적이고 권위적인 가부장적 지배구조가 고질적으로 사회의식을 지배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가까이는 조선시대 사농공상의 구별부터 멀리 삼국시대 신라의 골품제도 까지 한국의 공동체 구조와 문화는 과도하게 차별적이고 위계적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혈통에 의한 차별이 존재했고, 농사짓는 양인을 지지기반 삼아 실용적 유교정신으로 건국한 조선도 나중에는 양반과 상놈의 구별 뿐 아니라 양반 내에서 지배질서에 참여하는 지배층과 지방의 향반을 구분한다.

현대 사회에 오면 혈통, 신분의 질서는 무너졌지만 그 자리를 돈이나 권력 같은 새로운 힘이 파고든다. 우리 내부에는 언제나 갑과 을이 존재한 것이다.

공동체가 위부터 아래까지 촘촘히 서열화 되어 있고, 차별의식이 사람들 사이에 일반화되면서 민주주의와 평등의식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도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위계 문화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위계적 공동체에서 기득권을 차지한 지배층은 배타적으로 자신들의 지배와 정치력을 행사하고 경제적 분배까지 좌우하면서 격차가 더 벌어지고, 다시 아래로 수직적 지배관계가 중층적으로 확산되는 피라미드 구조가 일반화된다.

따지고 보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나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비선실세 논란도 이런 권위적인 공동체 문화가 낳은 병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유독 혈연, 지연, 학연 등 인맥구조가 득세하고 실제로 영향력을 미치는 것도 위계적 공동체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정치사상의 쟁점은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을 벗어나 어떻게 하면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선을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전통적인 논쟁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공익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면서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문제인데 현대사회에선 개인과 공동체의 선을 일치시켜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보편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마이클 샌덜 같은 정치학자, 알랭 바디우 같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같은 급진 사상가들이 공동의 선이나 새로운 보편주의 이념 제시에 관심이 많다. 지젝 같은 이는 현대 자본주의 문제는 더 이상 착취가 아니라 지배질서에 들어오는 사람들과 거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의 벽이 공고화되는 데 있다고 비판하면서 공동의 선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아주 새로운 공산주의 모델을 정치적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정치 질서와 법을 바꾸고 새 제도를 만드는 구조적 개혁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와 개인의 이익을 조화시키고,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사회관계를 근본적으로 평등한 공동체로 바꾸기 위해서는 의식을 개조하는 심층적 노력이 절실하다. 갑질을 하는 개인에게 문제를 돌리지 말고 인간을 도구처럼 다루고 생산성과 효율성 논리로 사람의 가치를 계량화하는 천박한 위계문화 타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 구조가 본질인 봉건적인 공동체 문화를 개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면서 공동체의 선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는 상생 공동체로 바꾸어야 한다.

지구촌 시대에 상생 공동체는 우리의 이익만이 아니라 다 같이 공생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적 요청이다. 우리처럼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사회 갈등이 내부 구성원들 간에 소모적으로 전개되면서 공동체가 붕괴되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상생과 협력의 공동체 건설만이 갑질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고 장기적으로 우리가 생존하는 길이다. 공생을 위한 보편주의 모델의 연구와 발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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