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신(亂臣)으로 죽었으되 충신(忠臣)으로 묻히다-사육신(死六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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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신(亂臣)으로 죽었으되 충신(忠臣)으로 묻히다-사육신(死六臣)
  • 광진투데이
  • 승인 2018.01.0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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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수/건국대학교 사학과교수
한정수/건국대학교 사학과교수

눈을 감고 만고충절(萬古忠節)의 대명사를 손꼽으라 한다면 누가 먼저 떠오를까?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그동안의 충절 교육 탓인지 가장 먼저 나온다. 그다음으로는 역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를 읊었다고 하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다. 단종 복위를 꿈꾸며 죽음을 마다한 사육신(死六臣: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개), 그리고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를 지은 김상헌(金尙憲), 대마도 감옥에서 순절한 최익현(崔益鉉),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순국한 이준(李儁) 열사 등이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순서는 달라질 수 있겠으나 대략 비슷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충절(忠節)의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충절은 『국어사전』에서는 충성스러운 절개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조금 더 풀이하자면 군주와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고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지금은 왕정체제가 아니므로 나라를 위하여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이제는 국가권력 혹은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폭력을 감안하여야 한다. 

때문에 충절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며, 나라보다는 국가로 수렴되는 정의(正義)를 포괄하여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여전히 모호할 수도 있지만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을 보다 더 추구할 필요를 내세웠다. 때로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새기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는 80년대 이후 여러 시민운동을 일컬을 때 '민주화운동'이라 칭하며, 촛불운동도 그 연결선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사실 이 같은 충절과 애국, 정의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사회에서 전통적인 가치로 손꼽히는 대의명분이라면 대체로 '정의'와 같은 개념이 될 수도 있다.(물론 당연히 똑같은 개념이자 가치로 놓을 수는 없다.) 스스로 최고의 선으로 충절의 가치를 위에 올려놓고 죽음을 다해서라도 이를 이루려는 것이 그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정몽주, 사육신, 김상헌, 최익현, 이준 등이 해당한다.

다만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가치를 지키려다 죽음을 맞아 절의를 지켰고, 태종은 자신이 주도하여 살해하였던 정몽주를 1401년(태종 1)에 익양부원군에 추증함으로써 그 뜻을 높였다. 그리고 1517년(중종 12)에 정몽주는 조선왕조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상헌이나 최익현, 이준 등은 당대에 곧바로 충절을 다한 인사로 숭앙되었다.

그런데 사육신은 이와 차이가 있었다. 성삼문 등은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 등의 정치농단과 대권장악 기도 등을 빌미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일으켰을 때 정난공신에 책록되었다. 또 이후 단종이 1455년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물러나자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성삼문을 즉위를 도운 공신이라 하여 추충정란좌익공신(推忠靖亂佐翼功臣)으로 삼았다. 이 내용만 본다면 성삼문 등이 세조를 해하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한 것은 해석의 여지가 있다. 때문에 세조는 1456년(세조 2) 6월 성균사예 김질(金?)과 그 장인 정창손(鄭昌孫) 등이 성삼문 등의 세조 시해와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하자 직접 성삼문을 국문하면서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라 할 정도였다. 그만큼 성삼문 등이 후일을 기약하면서 상왕 단종을 위해 비밀리에 거사를 도모하였음이 거꾸로 와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에서는 이를 병자년에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병자(丙子)의 난'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차적으로 모반에 참여했던 이들은 자결 및 옥사하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거열형 등으로 무참하게 죽었다.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이들 사육신의 충절에 대한 평가는 조선왕조 내에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것은 세조의 등극을 부정하여야 하는 것인데다가 단종 신원과 복위가 반드시 함께 언급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세조 자신이 이들을 난신(亂臣)이라 지목하여 처형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세조의 사면이 없다면 당연히 평가조차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사육신을 충절을 다한 신하로 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성종 대에 활약한 남효온(南孝溫)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사육신의 전기를 남기면서 “누가 신하가 못되리요마는, 지극하도다, 여섯 분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으리요마는, 크도다, 여섯 분의 죽음이여!"라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남효온의 입장에 대해 선조 임금은 그들에 대해 “아조(我朝)의 죄인"이라 단언하였다. 하지만 그리고 이 같은 절의에 대한 평가가 사림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면서 사육신은 단종을 위해 충절을 다한 신하로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후대에 세조의 유조가 있었다는 부분이다. 사실 세조 스스로가 그러한 말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691년(숙종 17) 12월 성삼문 등 6인을 복작하고 제사를 지내게 한 후 민절(愍節)이란 사당의 편액을 내려주면서 쓴 기록에 “당세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분부에 성의(聖意)가 있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실로 세조(世祖)의 유의(遺意)를 잇고 세조의 성덕(盛德)을 빛내는 것이다."라 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숙종의 조치를 명분화하는 데에 전대에 이루어졌던 논의가 참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사육신에 대해 '당대의 난신이나 후대의 충신'이라는 언급이 세조에 의해 이미 있었다는 것, 다음으로 세자 예종에게 내린 『훈사(訓辭)』 서문에서 “나는 어려움을 당했으나 너는 태평함을 만나야 된다.”라 하여 사육신에 대한 자신의 처분을 따르지 않아도 됨을 암시했다는 것, 셋째로 세조 자신이 공주 동학사에 행차해 단종과 사육신 등에 대한 제사 설행을 명했다는 것이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훈사』 서문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둘은 사실 근거가 없었다. 나아가 서문의 내용조차도 확대해석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였을까를 보자. 숙종은 1688년에 태어난 어린 세자를 생각하여야 했다. 어린 왕을 위해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한 사육신의 사례는 그야말로 충절의 대명사로 꼽을만 했다. 따라서 숙종은 그동안 사육신에 대해 세조에게 이미 충절을 다한 사육신 등을 용서하려는 뜻이 있음을 들어 근 250여년 만에 사육신을 충절의 신하로 재평가하기에 이를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숙종의 결정이었지만 그동안 조정에서 수백년 동안 온 나라의 신민이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해결하였다는 의미가 반영되었다.

이후 노량진에 있던 육신총(六臣塚)에는 1691년(숙종 17) 민절사(愍節祠)가 세워졌고, 이듬해에 민절서원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이 같은 사육신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진 후 숙종은 노산군에 대하여 단종이라는 묘호를 올려 신하와 군주가 모두 역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하였다. 민절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 그러나 1954년 이후 다시 복원되기 시작해 1978년에는 위패를 봉안한 의절사(義節祠)를 두면서 기존 사육신과 함께 병자의 난에 죽은 김문기(金文起)까지를 모시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본다면 사육신으로 상징되는 충절은 단지 사육신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온 나라 신민이 바라는 것,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 혹은 '당대의 천명이나 인심과는 배치되지만 천의(天意)에 해당하는 것'이 끝끝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은 이처럼 산천은 의구하더라도 '정의구현'을 이루는 방향으로 흘러온 것이다. '정의'롭게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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