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峨嵯)와 아단(阿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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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峨嵯)와 아단(阿旦)
  • 광진투데이
  • 승인 2018.03.15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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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수/건국대학교 사학과교수

이제 입춘(2월 4일)도 벌써 지났고, 우수(2월 19일), 정월대보름(3월 2일)도 지났다. 겨울잠을 자던 만물이 깨어난다는 경칩은 3월 6일이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봄이 기다리고 있다. 기지개를 켜며 광진구의 주산인 아차산을 문득 바라다본다. 지난 2월 뻑적지근하게 북녘손님들을 맞았던 워커힐호텔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아차산? 왜 이런 이름이 산에 붙어있지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자료를 뒤져보았다.

아차산은 우리 광진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을 아(峨), 우뚝솟을 차(嵯)를 쓰고 있어 매우 높다라는 의미로 전달되지만 실제 아차산의 표고는 287m에 불과하다.(295.7m라고도 하는데, 아차산 입구의 표지석에는 285m이다)

그러나 서울시 해맞이 장소로도 유명하며, 한양 도성과 관련한 외 사산 중 하나로 꼽힌다. 광진구의 주산이기도 하다.

이 아차산은 고대사학계에서 매우 주목되는 유적을 품고 있다. 백제 도성을 방어하는 기능을 갖춘 산성의 존재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으며,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오는 아단성(阿旦城)은 아차산성으로 비정되고 있고, 최근에는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하여 세워진 아차산 보루군 등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또 신라의 북진을 막다가 전사한 고구려 온달장군 관련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북한산(北漢山)'명 기와가 출토되어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후 북한산주의 산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와는 약간 다르지만 새천년 들어오면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배용준씨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의 촬영 셋트장이 워커힐호텔 뒤쪽에 지어져 운영되고 있다.

이 산자락의 이름은 현재 아차산(峨嵯山)으로 한자 표기를 거의 일원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러 자료들을 확인해보니 아차산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언제 조사되었는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마을사람들은 아끼산·아키산·에께산·엑끼산 등으로도 불렀다 한다. 19세기 중반 무렵 편찬된 《경기지》양주조에는 악계산(嶽溪山)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악계산이라는 이름은 아끼, 아키, 에께, 엑끼 등과 모두 음은 통하고 있어 흥미롭다.

또 그 이전 조선시대 여러 기록에도 한자의 차이는 약간씩 있으나 아차산(峨嵯山)이라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양촌 권근이 고려시대 지어진 《신지비설((神誌秘說)》의 내용을 언급하는 중에 '동쪽 양주 남행산(南行山)이 직형(直形)으로 목덕이 되고'라 한 부분이 있다. 이때의 남행산은 고려시대 남경(南京)과 관련되므로 아차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공민왕 대에 과거에 급제하고 공양왕 대까지 벼슬을 한 조운흘이 73세로 죽자 후손들이 고양주(古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냈다는 데서 아차산이 확인된다. 이에 앞서 고려 숙종 때 남경천도와 관련하여 풍수도참을 정리한 김위제가 소개한 《신지비사(神誌秘詞)》에도 권근이 언급한 내용의 원전이라 할 내용이 확인된다. 《삼국사기》에는 '아단성(阿旦城)'과 함께 '아차성(阿且城)'이 보인다. 또 앞서 언급했듯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단성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렇게 보면 현 아차산의 이름 갈래는 크게 아단 계열, 아차 계열, 악계 계열, 남행산 계열로 분류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이름이 아단이었던 것을 보면 사실 악계는 고유성을 갖기보다 암석과 계곡이 있는 산 정도의 의미를 가지므로 의미가 약하다. 아단의 아(阿)는 처음을 뜻하며, 단(旦)은 아침 해돋을 무렵을 뜻한다. 이를 고려하면 아단산의 이름이 백제 때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성백제인들이 아침 해, 특히 새해 첫 해를 이곳에서 맞으면서 아달 혹은 아단이라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남행산은 풍수도참을 언급하면서 나온 것으로 실제 산 이름을 뜻하였다고 보기는 조금 어렵다. 그렇다면 아단과 아차로 대별되는데, 사실 《삼국사기》에서 '아단(阿旦)'이라 한 것과 '아차(阿且)'로 표기한 것은 약간의 착오로 볼 여지는 있다. 본래는 '아단(阿旦)'이 보다 많이 나온 데다가 현 아차산에서의 해맞이를 고려하면 그렇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아차산(峨嵯山)'이라는 한자이름은 고려 말 조운흘과 관련한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된다. 물론 어떠한 관련 기록도 없이 묘소를 정한 것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아마도 시문에 능하였던 조운흘이나 당시 사람들이 '아차(阿且)'라 잘못 불리던 명칭에 산의 형세를 뜻하는 높을 아(峨), 우뚝솟을 차(嵯)를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의미는 중국 섬서성 경양(涇陽)에 있는 '차아산(嵯峨山)'에서 가져왔으리라 여겨진다. 이 차아산의 옛 이름은 '형산(荊山)'이었다. 중국 바이두에서는 이에 대해 '천하제일분경(天下第一盆景)'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아차산의 명칭과 관련해 덧붙인 이야기이다. 《두산백과사전》에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휘(諱)를 '단(旦)'으로 고쳤고, 이 때문에  '단(旦)'이 들어간 산천의 이름 등을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다는 것이 소개되고 있다. 그럴 듯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미 아차(阿且)라는 명칭이 착오로 쓰여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먼저 사용되었기에 견강부회한 측면이 있다.

이와는 다르지만 아차산 이름 유래와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맹인점쟁이 홍계관(洪繼寬) 이야기이다.

사실 그의 생애와 관련한 대목은《조선왕조실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러 문집에서는 그의 죽음이 연산군 혹은 명종 대에 있었으며, 그 계기가 그의 점복 때문이었다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신복(神卜)'이라 칭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명성을 확인하고자한 임금 앞에서 그가 새끼를 잉태한 쥐의 숫자까지 맞췄지만 이를 알지 못한 국왕의 명으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 결과 임금이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라 한데서 그가 형을 당한 고개를 아차고개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아차고개가 있는 산이라 아차산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홍계관이 물론 신복이라 할지라도 그가 고작 쥐의 숫자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쥐꼬랑지에 불을 붙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얘기와 관련되었다면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정황이 없다.

조선시대에 참수형 집행 장소는 노량진 건너편 노들강변의 새남터, 삼각지로터리에서 공덕동로터리 쪽으로 가면 나오는 당고개, 서소문 밖 네거리, 무교동 일대였음을 고려하면 사실 아차산과의 관련성은 당연히 떨어진다.

이처럼 현재의 '아차산(峨嵯山)'의 이름은 본래 '아단(阿旦)'에서 출발했지만 사뭇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차아산과 같은 형상을 가짐을 주목하고 또 발음이 비슷한 것을 들어 아차산을 썼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1779년 이엽이 쓴 <북한도봉산유기>에서도 아차산을 '차아산(嵯峨山)'이라고 하였다.

현재 광진구에서는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해맞이축제를 아차산 해맞이광장에서 행하고 있다.

사실 원래의 아차산이 갖고 있는 위상과 함께 이 같은 행사와 관련하여 본다면 현재 기정사실화 되어 있지만 아차산이라는 이름보다는 시작과 해맞이의 의미를 듬뿍 담고 있는 '아단(阿旦)'이라는 명칭이 그 역사성과 함께 보다 정확하다 여겨진다. 단순 착오 혹은 태조 이성계의 개명 휘인 '단(旦)'의 피휘, 중국의 명산 이름의 차용, 근거가 부족한 이름유래 등 보다는 '아단산'의 명칭의 복구가 훨씬 낫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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