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역설과 건강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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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역설과 건강한 사회
  • 광진투데이
  • 승인 2018.08.0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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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교수/건국대학교 융합인재학부

폭염이 온 천지를 녹이고 지치게 하던 7월 어느 날 갑작스레 전해진 정치인 노회찬 의원의 자살 속보에 같이 뉴스를 본 지인과 난 큰 충격에 빠졌다. 지인은 “가짜 뉴스 아냐? 하며 속보를 믿지 못하는 눈치였고 나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그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고 애도의 물결이 확산 되는 가운데 잠시 시간을 내어 신촌 세브란스에 조문을 다녀왔다. 가고 오는 내내 여러 생각과 질문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돌았다. 독자들 중에도 “노회찬 의원 보다 더 심한 잘못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멀쩡히 잘 사는 데 왜 비교적 양심적인 분들만 이렇게 비난을 못 견디고 자살을 할까” 생각한 사람도 적잖게 있으리라.

망인이 무고하고 죄가 없다는 게 아니라 생전에 그의 검소한 삶을 알게 되면서 돈 4천 만원을 받았다고 죄의식을 느끼며 투신할 수밖에 없었다면 특활비나 기타 뇌물 때문에 죽어야 할 사람이 대한민국에 너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양심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정작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사람은 당당하고 오히려 그렇게 안 해도 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많은 학생들을 구조해 ‘파란바지 의인’이라 불린 분이 벌써 몇 차례나 자해를 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이분은 더 많은 학생들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자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배를 버리고 자기만 구조된 선장이나 승무원들이 괴로워하거나 부끄러워 못 견딘다는 소식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 과연 인간에게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성이 있는지 회의감이 들 때가 많다.

성선설의 대표적 주자인 맹자는 인간 속에 도덕의 뿌리가 되는 네 가지 근본 덕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 양심이나 죄책감과 제일 가까운 것이 ‘수오지심’(羞惡之心)일 것이다.

수오지심이란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의(義)의 기원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仁)의 뿌리로 불쌍한 이를 조건 없이 가엾게 여기는 공감의 마음이라면 수오지심은 불의를 경계하고 싫어하는 준엄한 양심이다.

맹자는 이런 마음이 인간 본성에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내재하고 있어서 교육을 통해 그것을 키울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기반 해 도덕정치를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의 주장처럼 인간의 선한 행동이나 양심을 선천적 본성으로 보기엔 뭔가 부족하며 위에서 말한 바대로 개인적 편차가 그리 심한지도 납득이 어렵다.

양심은 인간의 본성 같아 보이지만 그 보다는 사회화의 결과로 만들어 진다고 말하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사회화는 개인적 맥락에서 각각 다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양심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의 효과, 즉 아이가 최초 욕망을 억압하면서 아버지의 법을 수용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인간 아이는 무제한의 충동을 느끼고 만족을 추구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면서 부모의 요구를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배운다. 사회적 삶의 필요성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본능을 사회적 요구에 맞게 실현하면서 일정 부분 욕망도 포기해야 함을 배운다. 이 과정은 사람마다 다른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이는 정신병적 상태에 빠진다. 부모의 목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닮고 싶어 하는 이상으로 아이에게 느껴진다.

초자아는 인간이 타자와 공존하고 공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문명도 어느 순간 초자아의 형태로 강요되는 법을 수용하면서 본능을 억압한 결과로 가능하다. 문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근친상간 금지나 무차별적 공격성이 먼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최초 억압이 성공하면서 그 통제를 양심의 형태로 지속시켜 주는 것이 초자아의 역할이다.

그런데 초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울증이 대표적인데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우울증은 비대해진 초자아가 자아를 괴롭히는 심리구조다. 자아가 실제로 잘못을 범해서가 아니라 초자아를 내면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근거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의 자기비난이나 심한 죄책감은 근거가 별로 없고 위험할 수 있는 심리적 증상이다. 지나치게 강한 초아가의 부정성이 드러나는 것은 트라우마(Trauma)도 마찬가지다. 트라우마는 강렬한 공포나 충격 경험에서 비롯되기기도 하지만 죄책감의 상태로 내부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사람을 괴롭히기도 한다.

예컨대 사고를 당했다가 자신만 구조된 경우 죽은 이에 대해 평생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친구가 끔찍하게 죽은 경우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하면서 이것이 극복 불가능한 외상이자 병처럼 작용해 정상적 삶을 힘들게 한다. 이처럼 초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문제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는 초자아가 도덕적 삶에 필수 조건이다. 건강한 사회는 초자아가 제대로 작동하고 도덕적 기준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다. 범죄나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고도 전혀 가책을 못 느끼고 그것이 당연시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정신병적 사회다. 정신병은 타자에 대한 공감이 불가능한 구조다.

사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면 지나치게 한 사람을 공격하거나 나는 괜찮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된다 식의 이중적 태도도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노 의원의 죽음이 한 사람의 지나친 결벽증적 태도에서 비롯된 개인적 비극처럼 끝나지 않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사회적 초자아가 확립되는 새로운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사회적 가치가 모두에게 인정되어야 개인 양심도 제대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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