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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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3)
  • 성동신문
  • 승인 2019.07.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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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랑 / 비젼전략경영컨설팅 원장

제2절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명길랑 / 비젼전략경영컨설팅 원장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시점으로 보지만 침략을 당한 나라마다 침략을 당한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시점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미국인들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를, 아프리카인들은 1935년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 했을 때를, 아시아인들은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를 침공 했을 때를, 각각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Ⅰ 이탈리아의 침략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삼고, 1935년 12월 5일,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에티오피아를 기습 점령했다. 이것은 대공황에 따른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외 침략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무솔리니는 아프리카 북부와 그리스 등을 침공했으나 1943년 7월 영·미군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다(7.25). 바돌리오는 즉각 영·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 항복 하였다. 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 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포고 하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 일종의 내란 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다. 1946년 5월 왕제가 폐지되었다.

Ⅱ 독일의 침략
정권을 장악한 후 히틀러는 국가 정비에 힘을 쏟았다. 국내 정비로 힘을 기른 독일은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워 침략을 시작했다. 1938년 3월 12일, 독일군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이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했다(1938).

평화 유지를 바라던 영국과 프랑스는 무솔리니·히틀러와 함께 뮌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독일이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데텐 합병을 승인하였다. 이 뮌휀 협정에 서명한 히틀러는 1939년 3월 16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까지 무력으로 합병하였다. 이것은 뮌휀협정의 위반이다.

이어서 히틀러는 독일과 폴란드 단치히를 연결하는 폴란드 회랑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의 요구를 거부했다. 1939년 5월 독일과 이탈리아는 '독이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조약 체결국 중 한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다른 한 나라는 전심전력을 기울여 지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39년 4월, 영국·프랑스·소련은 전쟁을 피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기세를 꺾기 위한 회담을 했다. 회담 기간 중 소련이 한 때 유럽 안전 방위 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을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성의를 보이지 않아 실패했다. 이에 소련은 1939년 8월 '독소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폴란드 침략에 대항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은 노르웨이, 덴마크, 네델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차례로 점령하고, 1940년 6월 5일,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여, 페뎅을 수반으로 한 비시괴뢰정부를 수립하였다. 프랑스 드골 장군은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여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resistance : 저항운동)가 조직되어 프랑스 해방 운동을 전개하였다.

영국이 독일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자 독일은 장기간에 걸쳐 영국 공습을 단행했다. 그러나 영국의 저항이 계속되자 히틀러는 추축 진영을 강화하기 위해 1940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의 3국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발칸반도와 아프리카로 진출하였다.

유럽 대륙을 장악한 독일은 '독소상호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향해 진격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식량과 코카서스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은 단기간에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 육박하고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였으나,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세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소련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소련 침략은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전조이며 소련이 멸망한다면 영국과 미국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즉시 소련 지지를 선언하고 히틀러 분쇄를 호소했다.

1941년 7월 12일, 영국과 소련은 독일을 상대로 한 작전 중 공동 행동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미국도 소련에 군사, 경제상의 원조를 제공했다. 1941년 8월 14일, 루즈벨트와 처칠은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부근의 군함위에서 회담을 가진 후 '북대서양헌장'을 발표했다.

미국과 영국은 히틀러가 침략을 통해 저지른 영토 변경을 인정하지 않고 반 나치 전선을 선언했다.

1942년 여름, 독일군이 소련의 전장 남쪽을 중심으로 진격을 벌리며 스탈린그라드와 카프카스 탈취를 꾀했다. 독일군이 소련군의 전략 보급선을 끊어버리자 곧 스탈린그라드 방어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전투는 1942년 7월 17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전략 방어 단계를 거친 후, 소련군은 11월 19일, 독일군에게 전략적인 반격을 퍼부었다. 1943년 2월 2일에 소련군이 독일군을 전멸시키면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Ⅲ 일본의 침략
1930년대부터 1941년 7월까지의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경제관계를 보자. 1930년대부터 일본의 전략적인 군사 활동을 지탱해주는 전략적 물자를 공급해준 나라는 미국이었다. 일본의 난징대학살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군에게 전략물자를 공급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선교사요 의사였던 월터 주드(Waiter Judd)는 1937년 상하이에서 중국인 부상자의 폭탄 파편 제거 수술을 했는데 그는 미국이 일본에 팔고 있는 폐철(Scrap)이 일본의 폭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탄식을 한다. 당시 교회단체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우려해 금수조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의 일반 국민들 70%가 금수조치를 찬성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금수조치를 단행하면 미국에 석유를 의존하고 있는 일본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방으로 팽창하는 것을 우려했다. 인도네시아의 석유, 말레이시아의 고무, 인도차이나의 쌀을 비롯해서 동남아시아는 일본이 원하는 자원들의 보고였다. 또한 동남아시아는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서 권력 공백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이 남진하면 필리핀, 중국, 홍콩, 싱가포르 등 서태평양 지역이 위협을 받게 된다. 대서양과 태평양 두 곳에서 영국 함대가 감당할 수 없고, 미국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그래서 가급적 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에 부합했던 것이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동맹국들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중국 침략에 소요되는 전쟁 물자를 일본에 계속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명분을 떠나서 일본과 미국의 전략물자 거래 자체를 주목하여 요약하면 미국은 1938년 중엽까지도 항공기와 항공폭탄까지 계속 일본에 수출하고 있었다. 폐철을 포함한 강철과 전쟁물자, 일본의 전투기와 폭격기에 긴요한 항공유를 1940년 중엽까지 계속 제공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전략물자인 석유도 1941년 7월에 가서 수출을 중단하게 된다.

1941년 12월 초 일본은 덴노가 주제하는 회의에서 진주만 공격을 결정하고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태평양 함대의 큰 타격으로 미국의 반격이 주춤한 사이에 일본은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일대를 차지했다.

일본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 돌입했다. 1942년 6월, 일본은 본토 '방위권'을 확보하기 위해 미드웨이 제도와 알류산 열도 전투를 결심하고 미드웨이 제도를 주요 돌격 방향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유인해 섬멸하고 동시에 미드웨이 제도를 점령해 미군을 하와이와 미국 서부 해안으로 퇴각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군이 일본 해군의 전보암호를 풀어내 일본의 미드웨이 제도 공격 작전계획을 파악해 일본의 습격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태평양 전쟁 발발 이래 최초로 참패를 했고, 이 패배로 일본은 태평양 전장에서 주도권을 잃기 시작했으며 전황은 미군에 유리해졌다. 여기서 미군이 '과다카날섬'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때부터 미군은 방어에서 공격태세로 전환했다. 반대로 일본은 방어태세로 전환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미군의 수중으로 옮겨온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잡은 미국이 전력을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선으로 확장시켜 연합국의 대반격이 이루어졌다. 아프리카 전장에서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1940년 여름과 겨울부터 1942년 여름까지 우세했다. 그러나 1942년 10월 23일부터 영국군의 반격을 받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엘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에 패했다. 연합군은 이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영국은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그해 11월 8일 미국과 영국 연합군 10만 7천 명이 북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 진격해 서쪽으로 진격한 연합군과 동서 협공의 태세를 이루었다. 독일군은 마지막 공세로 전황을 바꿔보려고 꾀하였으나 결국 패배해 5월 13일, 25만 명의 독일·이탈리아 군대가 모두 투항해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1943년 7월 10일, 시칠리아 섬 동남부를 상륙했고, 8월 17일에는 섬 전체를 점령했다. 7월 25일 이탈리아에서 정변이 일어나 무솔리니가 체포되었고, 이탈리아는 9월 3일 전쟁에서 퇴각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이끄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6)을 감행하여 파리로 진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전환점에 선 가운데 미국·영국·소련·중국 등의 수뇌들은 차례로 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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