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즈루 앞바다 수중고혼의 귀향을 염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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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즈루 앞바다 수중고혼의 귀향을 염원하며
  • 서울로컬뉴스
  • 승인 2017.01.2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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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군 교수/건국대학교 대학원 통일인문학과
김종군 교수/건국대학교 대학원 통일인문학과

필자가 소속된 통일인문학연구단은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인문학 관점으로 연구하는 통일인문학을 국내를 넘어 해외에도 확산시키기 위해 '통일인문학 세계포럼'을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제3회 행사를 지난 12월 17일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대학에서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인의 기억-아픔의 연대와 공통의 역사"를 주제로 펼쳤다. 그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조선대학과 리츠메이칸대학, 중국의 연변대학, 건국대학교의 교수들이 라운드테이블로 진행한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자리에서 피해 당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한일 위정자들이 정치의 논리로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는 시도에 대해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가해자인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가 절실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음날인 18일에는 교토 인근에 산재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의 현장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교토에서 북쪽으로 50킬로 거리에 있는 단바 망간광산에서 짐승 같은 처우를 받으면서 강제노역 속에 비참하게 죽어간 갱도를 직접 거닐면서 한중일의 답사 참가자는 숙연함을 떨치지 못하기도 했다.

3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압사사고와 진폐증으로 죽어간 현장을 강제노역 당사자인 고 이정호선생(1995년 작고)이 자비를 들여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었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기를 바라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한 푼의 지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갱도에서 망간을 채굴하는 노동자의 형상을 밀납인형으로 재현할 여력이 없어 백화점에서 버려진 마네킹을 주워다가 재현해놓은 현장은 비극적 역사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답사 참가자들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한 곳 비극의 현장을 답사하게 되었는데, 마이즈루(舞鶴) 작은 어촌 마을 해안도로변에 서 있는 순난비(殉難碑)였다. 치마저고리에 쪽진 머리를 한 조선의 어머니는 물속에서 건진 듯한 숨이 떨어진 어린 아들을 오른 팔에 끼고 있고, 왼손으로는 절규하는 젊은 청년의 손을 잡고 먼 하늘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치맛자락에 기대서 울부짖는 남성, 발아래에 익사자로 보이는 세 명의 남성의 형상이 조형물로 안치돼 있었다.

어머니의 그 처연한 눈빛을 올려다보면서 턱하니 숨이 멎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망연한 어머니의 눈빛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일제의 속임수에 끌려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해방이 되자 비록 무일푼으로라도 고국 땅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일순간에 절망으로 떨어진 상황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조선인 강제 징용자와 그 가족 7천여 명을 태운 일본 해군 수송함 우키시마마루호((浮島丸. 4,730톤)가 일본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원인모를 폭발에 의해 갑자기 침몰했는데, 이 사고로 공식적인 사망자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524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승무원이 25명이고, 나머지 499명은 강제 징용자와 그 가족인 조선인이었다.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이 해난사고의 원인은 사고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구명되지 않고 있다. 미 해군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했다는 설도 있고, 애초 부산항까지 운행할 연료도 탑재되지 않았다는 증언은 일제가 강제 노역의 잡음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폭발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사고 수송함은 이틀 전인 22일 밤 10시 경 일본 북부해안인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사고 당일인 24일에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여 마이즈루 만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 진로 변경의 이유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사고로 500명에 가까운 우리 국민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우리 정부는 어떤 해결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일본 정부는 당시 전범국으로서 사고의 경위를 은폐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은 사고 발생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 비극적 사건이 표면화되었을 때 우리 정부는 분명하게 일본 정부에게 사고의 원인 구명과 희생자의 신원 파악, 수장된 시신의 안치를 강력하게 요구했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사고의 현장과 경위를 알게 되었음에도 정부를 비롯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점이 마이즈루 앞바다에 수장된 희생자에게 무한히 죄스러운 점이다.

일본 해군 수송함 우키시마마루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당시 마이즈루 사람들은 승선한 사람들이 조선인 징용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의 구조에 나섰다고 한다. 어촌의 어부들은 개인 소유의 고기잡이배를 타고 목숨을 걸고 조난자들의 귀중한 생명들을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8년에 마이즈루 주민들과 뜻있는 일본인들이 정성을 모으고, 교토부와 마이즈루시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이 순난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숨을 멎게 하는 애틋한 조각상도 현지 중학교 교사가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집계가 524명이었지만 수장된 우리 민족은 수천에 달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들 수중고혼의 귀향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엄숙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간 국제 정세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협의했고, 위안부 희생자의 고통에 연대하기 위해 건립한 소녀상을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철거하려는 우리 정부의 행태와는 너무나 상반된 일본의 인도주의자들의 숭고함에 고개가 숙여지는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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