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심었던 '커피나무'는 '희망'이란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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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심었던 '커피나무'는 '희망'이란 열매를 맺었다"
  • 동대문신문
  • 승인 2020.02.2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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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前 '회기동 주민자치위원회·연화사·동대문신문사' 시작한 구호사업, 마을 수익사업으로 정착

르포 - 네팔 다딩 지역 '커피나무 심어주기 사업' 현장 점검

방문단 단장인 박승구 대표가 2012년 직접 심었던 커피나무가 잘 자랐다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방문단 단장인 박승구 대표가 2012년 직접 심었던 커피나무가 잘 자랐다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마을 주변 전체가 모두 산이지만 결코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가 아니었다. 특히 몇 해 전 지진으로 인해 푸르러야 할 산은 듬성듬성한 나무들이었고, 마을로 가는 길목은 도로라고 하기에는 무안할 정도로 움푹 파인 비포장 길이었다.

우리가 만났던 마을 대다수의 주민들은 계절이 겨울이었지만 슬리퍼였고, 물 부족으로 인해 잘 씻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각박한 서울을 벗어나 오염되지 않은 오지 마을로 간다는 설렘은 온데간데 없이 빨리 이 마을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시골 농촌 마을이었지만 정비되지 않은 도로로(도로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길) 인해 흙먼지가 서울 도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보다도 더 답답할 정도였다.

이런 오지 마을까지 찾아온 이유는 단 1가지다. 8년 전 회기동 주민자치위원회(주민자치회 변경 이전 명칭)와 연화사(회기동 소재), 본지, 경희의료원, 관내 초·중학교, 지역 주민 등이 국제개발구호단체인 더프라미스(The Promise)를 통해 이곳(네팔 산간지역인 다딩 마을) 학생들 교육지원과 마을자립을 위해 시작한 '커피나무 심어주기 운동'에 대한 현장 점검을 위한 것.

본지는 관내 뜻있는 주민들로 구성한 '동대문구 해외봉사단'(단장 박승구, 본지 대표)을 꾸려 24~11일에 걸쳐 네팔에 직접 다녀왔으며, 지면을 통해 지난 3년간(2012~2014) 네팔 산간지방 커피나무 심어주기 사업에 참여한 이들의 봉사활동에 대한 결실을 보도한다.

<편집자 주>

 

세계의 지붕 '네팔', 산간마을로 가는 기다긴 여정

 

본 기자는 2014년도 3번째 커피나무 심어주기 봉사활동 취재 이후 네팔 방문은 2번째다. 첫 번째 방문에는 말레이시아를 경유하는 항공으로 네팔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까지 12시간 정도가 걸렸지만, 이번에는 인천에서 곧바로 가는 직항하는 항공(대한항공 주 3회 운항)을 이용해 8시간이라는 비교적 짧고 편하게 도착했다.

네팔은 한국보다 3시간 15분 늦다. 하지만 카트만두에 도착하고 입국 심사를 받고 공항을 나오니 해가 진 밤이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줄 가이드를 만났다. 처음 우리를 맞은 가이드는 꽃목걸이를 일행 모두에게 걸어주며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로 환영해 주었다. 전 세계적으로 펼쳐진 '코로나19'로 인천공항에서부터 비행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느라 답답했지만, 네팔은 아직까지 코로나19 청정지역으로 그때서야 마스크를 벗을 수 있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 후 짐 풀 시간 없이 늦은 저녁을 먹고 골아 떨어졌다. 좁은 좌석에 구겨 넣은 피곤한 몸인지라 첫날 네팔에서의 기억은 이것이 끝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 조식 후 바로 우리 일행은 선배 봉사단들이 봉사했던 산간지역인 다딩(Dhading)으로 향했다. 가이드는 "지금 달리는 이 도로가 네팔의 중요한 고속도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그 도로는 포장은 돼 있지만 관리가 안 된 덜컹거리는 왕복 2차선 지방도로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도로에는 무단 횡단하는 사람은 물론 소들도 도로를 그냥 건너기를 반복했다.

반나절만에 다딩에 도착했다. 도착 후 점심은 네팔 전통 음식인 '달 바트'였다. 일행 중 몇몇은 처음 접해 신기해했지만, 몇몇은 아예 먹지 못했다. 네팔 모든 음식에는 '마살라'라는 향신료가 들어가는데 이 향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모든 음식이 짜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음식들이 짜다.

달 바트로 허기를 채우고 드디어 오지 마을로 출발했다. 7명의 우리 일행은 2대의 오프로드 전용 지프차에 나눠 타고 상상도 못한 길을 달렸다. 다딩까지 온 버스로는 결코 올라가지 못할 길이었다. 아슬아슬 바로 옆은 낭떠러지였고, 길은 온통 진흙으로 파인 흙먼지 도로였다. 더군다나 우리 목적지로 가는 곳은 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낭떠러지 사이로 굴착기가 새로운 길을 내고 있어 1시간 이상을 기다린 곳도 있었다. 또한 반대편 차량이 진흙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기다리기를 몇 차례 겪었다. 더불어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운전기사조차 이정표도 없는 산길을 잘못 들어 1차선도로에서 되돌려 나오는 일도 겪었다. 지프차로 2시간 걸릴 거리를 4시간에 걸쳐 한 학교에 겨우 도착했다.

 

해맑은 얼굴로 일행들 반겨

 

우리 일행 도착 예정 시간은 오후 2시였지만 4시 넘어 도착했다. 학생들이 오후 4시에 모두 하교를 한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2시간 이상 늦어졌다. 어렵게 도착했지만, 괜히 우리 때문에 하교도 못하고 있는 것이 미안했다. 오히려 그냥 준비한 선물만 전달식 없이 따로 전달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들은 등교도 2시간, 하교도 2시간씩 걸리기 때문에 산간지방 특성상 오후 5시만 되도 해가 떨어진다. 가로등도 없는 산에서 어린 학생들이 하교하기에는 위험한 지역이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학교 전교생 모두는 행사장까지 가는 양쪽 길에 서서 일행들을 환영했다. 모두 두 손 모아 '나마스테'를 외치며, 그들보다는 피부가 하얀 외국인이 우리를 반겼다. 행사장에 마련한 의자에 앉자 학생들은 각각 스카프와 꽃목걸이를 우리 일행들 목에 걸어주었다. 덜컹거리는 지프차를 타며 '내가 왜 여길 왔나?'라는 고민이 잊게 하듯 큰 환대를 받았다.

 

전기도 없고, 임시 화장실 쓰는 학교

 

우리가 다딩 지역 첫 방문한 학교는 산봉우리 약간 밑에 위치한 산골학교였다. 학교 교장뿐만 아니라 교사, 학생, 지역 주민까지 우리를 반겼다. 간단한 환영 의식을 끝낸 후 우리는 준비해 간 학용품을 학생들에게 일일이 나눠주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선물을 받은 학생들은 귀한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기쁜 얼굴이었다.

이후 교장의 소개로 학교를 둘러보았다. 유치원, ·중학교가 함께 자리한 학교이지만 한국과 비교해 학교라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먼저 모두 3개의 건물이 있었다. 1개 건물만 2층 건물이었고, 2개의 건물은 단층자리 건물이었다. 그리고 학교 내부는 아직도 나무 책걸상을 쓰고 있었으며,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교실이었다. 더군다나 이 학교는 5년 전 발생한 네팔 대지진의 여파로 건물들이 위험해 보였다. 심지어 지진 때문에 학교에는 임시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장은 우리에게 학생들이 쓸 화장실 건물을 건축해 주길 요청했다. 건축비에 대해 묻자 한국 돈으로 1,000만원 가량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이미 학생들 하교 시간이 넘었기에 우리는 도착한 지 1시간도 안 돼 서둘러 학교를 나왔다. 학생들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지만, 우리도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것도 문제였다. 다시 큰 환송을 받으며 지프차에 나눠 타고 올랐던 산을 내려왔다. 예상대로 산에 내려오기도 전에 깊은 찾아왔고, 보이지도 않는 낭떠러지 산을 마음 졸이며 무사히 내려왔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점심때 맛보았던 달 바트를 먹었다. 네팔은 먹거리 문화가 없다. 오직 달 바트 하나다. 잘 차린 음식도 달 바트고, 그저 그런 음식도 달 바트 하나다. 달 바트에 우리나라 닭볶음탕, 염소고기 등과 같은 조리된 고기가 조금씩 나온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살라가 듬뿍 들어간 요리다. 네팔 도착 이틀만에 굶겠다는 일행이 나왔고, 결국 그들은 준비해간 컵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 봉사활동보다 힘들었던 지프차 타기로 인한 피로 때문인지 다딩에서의 첫날밤을 힘겹게 보냈다.

 

8년 전 환영했던 마을 학생들은 아이 부모가 되고

 

다딩에서 두 번째 날에는 우리가 정확히 8년 전 처음으로 커피나무를 심어주었던 마을을 찾았다.

아침 일찍 달걀, 식빵, 짜이(네팔 밀크티)로 아침을 먹고, 어제 탔던 지프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다행히 둘째 날 마을로 가는 길은 첫째 날보다는 수월했다. 마지막으로 갔던 6년 전에 비해 길도 넓히고, 비포장 도로였지만 (첫째 날에 비해) 편안한 길이었다.

마을에 도착하니 역시 마을 주민들은 스카프를 목에 걸어주며 우리 일행들을 환영했다. 필자도 6년 전에 방문했던 곳이었는데, 마을 회관도 새롭게 단장하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공중 화장실도 새롭게 생겼다.

그리고 마을 청년회장을 대표로 간단한 환영식을 거쳤다. 환영식을 개최한 마을 청년회장은 8년 전 이 마을 회장의 아들로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 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번 방문단 단장을 맡은 박승구 대표는 8년 전 사진으로 간직하고 있던 청년회장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며, 마을과의 인연이 있었음을 과시했다. 또한 몇몇 젊은 여성들은 8년 전 당시 일행들을 환영하며 네팔 의상을 입고 전통춤을 보여주었던 소녀들로 지금은 어린 아이들을 업고 있는 엄마가 돼 있었다. 6년 만에 재방문이지만 결혼을 일찍하는 네팔의 풍습이 있어서 그런지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환영 행사에서 우리는 마을에 천막을 세울 수 있는 자재를 선물로 주었다. 또한 마을 학교에 학생들을 위한 학용품과 책가방, 그리고 유치원 바닥에 깔 매트를 선물했다. 더불어 마을 주민들을 위해 포켓이 많은 낚시 조끼와 같은 옷을 선물했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커피나무

 

환영식을 끝낸 후 우리 일행은 본격적으로 3년에 걸쳐 마을 곳곳에 심어주었던 커피나무 발육 상태를 보러 마을을 누볐다. 이번 방문단 우리 일행 7명 중 2명은 이 마을을 4번째 방문한 이들이었고, 필자도 지난번 방문 때 함께 이 마을을 찾아 커피나무 심기에 동참했었다. 우리 일행 중 재방문자인 3명은 몇 해 전 심어주었던 장소를 기억하며 그동안 훌쩍 자란 커피나무를 보고 기뻐했으며, 이 마을을 처음 방문한 4명은 한국에서는 이만큼 자라지 않는 커피나무에 열린 빨간 커피열매를 보며 기뻐했다.

앞서 우리 네팔 다딩 방문단은 네팔 국민들이 일자리가 없어 남성들이 해외로 외화벌이로 나가 가족과 떨어져 살고, 위험하고 힘든 일에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 마을에 커피나무를 심어주어 커피열매 수확으로 경제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하기 위해 2012~20143년간 3회에 걸쳐 총 13,000그루의 커피나무를 다딩지역 마을에 심어주었다. 방문단이 직접 마을에 심어 준 나무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심게 한 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심어주었던 13,000그루 중 많은 커피나무가 고사했다. 청년회장은 "커피나무를 심어주고 방문단이 떠난 후 주먹만 한 우박이 내려 많은 나무가 죽었다. 1/4만 살아남은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살아남은 커피나무는 우리 일행들 키를 훌쩍 넘어 빨간 열매를 맺어 있었고, 일부는 이미 수확해 열매 껍질까지 벗긴 상태였다. 특히 커피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에 심은 한 가정 커피나무들은 한 해에 약 100의 커피를 수확해 한국 돈 100만원의 수익을 올린다고 했다. 네팔 산간인들 한 달 평균 월급이 15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연간 100만원이라는 돈은 조금의 관리만으로 얻은 수익치고는 꽤 많은 금액인 것이다.

그 가정의 주민은 "이렇게 나무를 심게 도와주신 한국인들에게 감사하다"며 연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또한 마을 곳곳에 살아남은 커피나무들은 노란 유채꽃 사이로 영롱한 빨간 커피열매를 맺어 우리 방문단 일행들에게 보람을 안겨주었다. 그러면서 자립을 위해 커피나무 심어주기 사업을 지속해 주길 원했다.

비록 다딩에서 생산한 커피에 맛은 이날 맛보진 못했지만, 커피를 수확하게 도와준 우리 일행들에게 마을 주민들은 네팔 전통 음식은 달 바트를 대접했다. 일행들은 결코 환영하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이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달 바트를 다딩 마을에서 보이는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감사하게 먹었다.

이후 다시 숙소가 있는 다딩 시내로 내려오는 지프차에는 첫째 날의 고통에 적응됐는지 덜컹거리는 차 안이었지만 피곤함에 잠까지 자며 내려왔다.

다딩 지역에 심어주었던 커피나무 열매에서 추출한 가공되지 않은 원두 모습.
다딩 지역에 심어주었던 커피나무 열매에서 추출한 가공되지 않은 원두 모습.

 

아직도 도움이 절실한 네팔

 

네팔 사람들은 행복지수가 높다고 잘 알려져 있다. 실제 네팔을 가면 핸드폰도 잘 안 터지고, 숙소 내 전기도 끊이기 일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네팔에서 산다는 것은 깊은 산속 오지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편할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60~70년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같이 간 일행들 모두는 딱 60년대 대한민국과 맞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그들 얼굴은 모두 밝았다. 전기도 부족하고, 물도 부족하고, 일자리도 부족한 나라지만 하루하루 삶에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네팔 관계자는 그동안 네팔을 위해 지원을 해 준 우리에게 연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지속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실제 그들이 사는 삶을 간접 체험했지만, 네팔인들도 우리나라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가난을 되물림 하기 싫어 산속 오지마을에서 왕복 4시간씩 걸리는 학교를 보내는 등 교육열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다녀간 6년 전보다 네팔은 많은 발전을 했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으로 피폐했을 당시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해외 원조를 통해 우리나라를 도왔고, 그런 원조를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현재와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루고 부자 나라로 발전했다.

이제 우리나라가 우리의 1960년대와 닮은꼴인 네팔을 도와 우리가 당시 받았던 현재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발전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대곤 기자

hub@dd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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