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의 기초와 실천: 가유폐추 향지천금(家有敝帚 享之千金)
상태바
사회성의 기초와 실천: 가유폐추 향지천금(家有敝帚 享之千金)
  • 성동신문
  • 승인 2020.03.16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항석 / 성광일보 논설위원

사회성의 기초와 실천: 가유폐추 향지천금(家有敝帚 享之千金)

가유폐추 향지천금(家有敝帚 享之千金)!

정항석
정항석

직역하면 ‘자기 집에 낡은 빗자루가 있으면, 이를 천금처럼 귀하게 여긴다’라는 것이나, 속뜻은 ‘나와 내 것을 귀하게 여기는 반면, 다른 이를 업신여긴다’라는 것이다. 약 18세기 전에 조비(曹丕 187-226)가 지어졌다는 <전론(典論>의 <논문(論文)> 편에 전한다. 시와 글을 좋아했다는 조비는 조조(曹操 155-220)의 아들로 아우인 조식(曹植 192년-232)과 함께 삼조(三曹)라 일컬어졌다. <연가행(燕歌行)>을 포함한 <열이기(列異記) 3권>과 <문집(文集) 23권>도 지었다고 하며, 그 중 <전론>은 동양 사상 최초의 논문(論文)이라고 평가 받는다. <전론>은 원래 5권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논문 1편>만이 전하는 바,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한 문학론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7년의 재위, 40세의 짧은 마감 그리고 그의 통치는 <전론>만큼 실천이 신통하지 못했다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전한다. 현재 전해지는 <삼국지>에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한족이 아닌 그의 반한(反漢)의 모습을 더하거나 덜하여 기록된 여타의 정서를 감안할 필요는 있다.

기실, 다 같이 모여 사는 곳에서도 본능은 문명보다 더 빠른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와 뜻을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깎아내리거나 비하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전론>의 첫 머리에는 그러한 세속 사람들의 일반적 속성이 여과 없이 기술되었다.

‘문인(文人)들이 서로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예부터 그러했다(文人相輕 自古而然)’.

소위 문인들은 배웠다는 이들이다. 당시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고서에 따르면 실상은 그랬다. 그리고 왜 그러한 것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의 부족에서 오는 질책’을 제외하지 않고 담았다.

‘무릇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잘하나(夫人善於自見)’.

‘글에는 하나의 문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而文非一體).’

그리고 배우는 것은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늘 익히고 실천해야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여, 이런저런 글을 두루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鮮能備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利己)를 보이는 데 인색하지 않는다. 그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빗대어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것으로 다른 이를 가벼이 보려고만 한다(是以各以所長 相輕所短)’.

이때가 중원의 혼란기(여기서는 3세기 초부터 위가 세워진 220년 즈음을 의미)에 해당하니 그러기도 하였겠지만, 상경(相輕)은 다반사였다.

‘속담에 자기 집에 낡은 빗자루가 있으면, 이를 천금처럼 귀하게 여긴다(里語曰家有敝帚 享之千金)’. 이로써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폐단이 발생한다(斯不自見之患也)’.

<전론(典論)>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서로 승복하기가 또한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以此相服亦良難矣). 하지만 마땅히 군자라 한다면 먼저 자신을 살펴보고서 남을 가늠해야 할 것이다(蓋君子審己以度人),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폐단을 이치에 맞게 논(論)해야 할 것이다(故能免於斯累 而作論文).’

사적(史的)으로 <전론(典論)>은 동양 사상 최초로 분석과 근거를 바탕으로 글을 지어져야 한다는 ‘논문(論文)’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그렇다. ‘논(論)’이다. 그리고 이를 말로 할 경우, 토론이 된다. 글이건 말이건 ‘논(論)’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되 함부로 다른 이를 재단하는 것을 경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모습에서 비켜갈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욕(辱)을 수출해도 되겠다고 할 정도로 ‘비하의 말’들이 많다. 많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쉽게 들을 수 있다. 언어의 절대 순화를 위한 사회교육이 절실하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대화(Verbal)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둘러보면 이렇다. 근자에 중국 무한(武漢)발 신종 독감(Novel Corona19 Virus)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고, 일부 국가는 국가비상사태의 수준에 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달 후면 총선을 치르겠다는 한국의 정치이다. 시시각각 ‘안전 안내 문자’는 집회와 모임을 자제시키고 있다. 치료제 없이 국민들의 불안이 증폭되는 가운데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할 총선은 이와는 무관한 듯 보인다. 게다가, 공천과 당선을 위한 총선후보자와 그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러저러한 말들이 거침없이 난무하고 있다. 각종 정치적 모임은 이를 것도 없으며 대중매체를 이용한 각종 토론대회에서 나오는 말들은 과연 생산적인 대화를 위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괜히 들어 보았다’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자신과 자신의 것(敝帚)이 무엇보다 귀(千金)하다는 말’만을 일방적으로 전한다. 과연 토론이 그런 것인가!

공적 대화는 크게 토론(debate)과 토의(discussion)를 바탕으로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토론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하는 것’으로 그리고 토의는 ‘어떤 문제에 대하여 검토하고 협의하는 것’이다. 사실, 이를 ‘딱히 이것이다’라고 구분하기가 애매하다. 일반적으로 토의가 어떤 문제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내놓고 협의하여 의견의 일치를 위한 것이라면, 토론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각자 의견을 내세우고 그것의 당위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상대의 의견은 참고하지만 의견의 일치를 위한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것이다. 토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라면 토론은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이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는 것이다. 의견의 모음 혹은 설득이 공히 필요하다는 것은 이 둘의 공통점이지만, 그 결과의 간극이 너무 크다. 하지만 이러한 토론의 개념은 상대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대화의 위기를 조장할 뿐 사회의 의사소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살펴보자. 각종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특히 정치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i) 유권자를 의식하여 생산적인 결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ii) 우선 격앙되어 ‘너에게 질 수 없다는 말투와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들의 발언에는 iii) ‘상대를 압도하려는 갈등적 양상을 한껏 뽐내듯’ 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iv) 논리적으로 밀리면 말을 끊거나 가로 막는 등 딴청을 부리거나 다른 화제를 끄집어낸다. 비아냥, 조소 등은 물론이고 온갖 상대를 비하하는 표현들로 몰아버리는 것이다. ‘아님 말고’는 그 대화의 기초양념이다. 양히 ‘자신의 의견이 개진되지 않을 경우’에 갈등은 필연적이다. 이럴 때, 이성을 앞세워 자신의 감성을 여과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사회적 위기를 만든다. 염치도 없고 여하한 정치적 책임감도 없다. ‘흥 그래 나는 이래. 어쩔래!’ 이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대화의 시간을 준다고 하여도 그 토론(?)은 끝이 없다. 이를 테면 ‘끝장토론’ 등과 같은 용어는 막장이다. 해서도 안 되고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그냥 ‘말싸움’이다. 분열을 또렷하게 조장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것을 상호 빈정만 상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토론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이러한 것은 비일비재하다. 상대를 이겨야 한다고 골몰하는 탓이다. 국력의 차이에 따른 외압이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더욱이 대중을 위한 대화는 그러한 토론의 성격이 아니라 토의의 성격으로 나가야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생산을 위한 토론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른다. 한국교육에서는 시험을 위한 토론은 있지만, 실제 이러한 교육과정은 그다지 찾아보기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토론대회(Debate contest)가 있다. 그것도 상금을 걸고 한다. 때로는 비행기를 이용하여 각 주(州)를 오가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자료를 한두 개의 여행용가방에 놓고 혼자 혹은 동반자들과 토론대회 사냥에 나서는 것을 쉬이 볼 수 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한 준비도 철저히 한다. 간혹, 상대(팀)이 자신들보다 유리하지만 그(들)이 모르거나 그냥 넘어가도, 이를 짚어주지 않는다.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당한 결과에 승복할 줄 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

돌아보면, 합리성에 기초한 토론과 토의는 서구의 가치이다. 예컨대, ‘도리를 아는 (reasonable)’ 또는 ‘온당한(rational)’ 의미를 포함한 합리가 그것이다. 전자가 감성적인 측면에서 보는 것이라면 후자는 이성적인 측면에서 투사된다. 실제 서구에서는 결렬한 공적 대화에서는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따져보니 혹은 분석해보니)’ 그리고 생산적으로 ‘상호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있다. 물론, 블랙유머(Black Humor) 등 해학적으로 상대를 조소하는 정치적 발언은 있다. 그것이 ‘격이 있느니 품위가 있느니’를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발전, 생산’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지 않는 탓이다.

위와 같이 생산적 대화 그리고 합리적 수용과 승복! 우리 사회에서 실시되는 토론문화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실을 따지기는 하지만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데 그 오류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얇은 근거(evidence/ information)에 따른 일방적 주장(argument)은 이기려는 언쟁에서 순간의 자본(a moment’s capital)은 될 수는 있지만 영원한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이러한 언급은 이렇다. ‘얼마나 적정한 것인가 그리고 수용할 수 있는 수준과 정도인가’ 하는 것에 의존한다. 비단 정치적인 것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하물며, 대중 앞에서 특정의 문제와 해결책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적정한 것인가’에 대한 대화에서는 무조건 ‘극단적 이기의 감성(extreme emotion)’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와 같은 것들 때문에 <전론>에서 염려하는 것인바, 감성적이든 혹은 이성적이든 생산적으로 결론을 맺어나가지 못하면 ‘바로 우리 스스로 우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우환이 된다(斯不自見之患也)’.

되짚어보자!

토론이든 아니면 토의가 되었든 양자 공히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다. 모두 1) 말을 매개로 하는 의사결정 수단으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사회적 성격을 띤다. 2) 또한, 궁극적으로 특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계적 접근에서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세계적으로 바이러스 비상사태이다. 해외방문을 가로막고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상황이다. 국내적으로도 감염 의심자는 자가격리 그리고 그 동선(動線)을 일일이 점검하여 실시간에 맞춰 전국민에게 알리는 실정이다. 이로 인한 국민들의 심리적 위축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심각하다(serious)’는 경제는 ‘더 심각하게(more serious)’ 처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겠다는 발상도 그러하다. 현재의 상황에서 20대 국회의원의 임기를 정지할 것이 아니라 연기되는 기간에는 의원직을 수행하되, 수당(세비)를 정지시키고 상황이 나아지면 총선을 실시해도 무방하다. 선거보다 국민건강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 국회이며 국민의 대표가 아니던가! 또한, 국회의원들에게 주어지는 수당은 한 달에 약 천만 원이 넘는다. 이중 300만 원씩(300명*300만원=9억)만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위한 연구비용에 협조한다면 좀 더 치료제 양산을 앞당길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국민건강에 이바지할 것이다. 설령 4월 총선 후보자가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직 국회의원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보는 시각은 하나만 가지지 않고(而文非一體),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하는 모습이 다 드물지 않겠지만(鮮能備善)’ 여야(與野)간 보이는 대화는 ‘막가는 토론(討論)’이 아니라 ‘더불어 토의(討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예정된 대로 4월 총선이 치러진다면 <전론(典論)>에서 지적한 대로 글과 말의 격을 올리기를 요망한다. 즉, ‘대중에게 올리는 주문(奏文)나 의문(議文)들은 우아해야 하고(蓋奏議宜雅)’, ‘논하는 연설은 이치에 맞아야 하며(書論宜理)’, ‘알리는 명문(銘文)과 조문(誄文)은 사실과 진실에 입각해야(銘誄尚實)’한다. 수려함과 미려함을 위한 시(詩)나 부(賦)가 되지는 못한다(詩賦欲麗)고 하더라도 적어도 다양한 시각의 경청, 합리적 수용과 승복, 포괄적이고 대승차원의 포용 등이 이번 총선에서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연적 재앙은 인간이 미리 막을 수 있는 것이 못되지만, 그 마음은 글과 말로 보일 수 는 있다. <전론(典論)>은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것이 ‘국가대업의 기초이고 성대한 일이다(經國之大業不朽之盛事)’. 단지 ‘눈앞의 일만 영위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어찌 천 년을 갈 공적을 남기지 못하겠는가(遂營目前之務 而遺千載之功)’! 적어도 겸손한 표현이라면 가능하다. 이러면 뭇 사람들이 ‘말로써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斯志士之大痛也!)’.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비단 문학론에만 해당하지 않는 <전론(典論>의 <논문(論文)>의 교훈은 이것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나와 내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으로 ‘가유폐추 향지천금(家有敝帚 享之千金)’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