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양극단으로 치닫는 분노사회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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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양극단으로 치닫는 분노사회를 넘어
  • 서울로컬뉴스
  • 승인 2016.11.0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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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권력구조 개편

우울한 소식은 언제나 가득했지만 근자에 들어서는 일상적인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멀쩡히 길을 걷던 여성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흉기에 쓰러지는 참상도 종종 벌어진다. 범인은 ‘누군가 해치고 싶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가, 또는 한방에 있던 남녀가 잠시 뒤 시신과 용의자로 갈린다. ‘날 무시했다. 참을 수 없었다.’가 이유란다. 욕이나 한마디 하고 넘어갈 일이 보복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분노는 돌발적으로 격렬하게 표현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과도한 스트레스, 장기간 억제가 잠재되어 있다가 감정을 자극하는 상황이 생기면 폭발하게 된다. 이전에는 지나친 억압으로 인한 울화병이 많았지만 지금은 분노 조절 장애가 많아지면서 범죄가 되고 있다.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고 아무 때나 소리 지르는 어른들도 문제지만 누르면 나오는 인스턴트 환경에서 자라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는 청소년의 충동형 분노조절장애도 우리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증오와 분노를 파괴적으로 드러내는 이유를 사회변화와 연관해 설명하고 있다. 수치화된 성과로 순위가 정해지고, 치열한 경쟁에서 뒤쳐지면 도태되는 세상에서 개인은 늘상 생존의 위기를 느낀다. 살아남기 위하여 예민해지고 거칠어진다는 것이다. 80년대의 버블에 이은 90년대 IMF 구제금융은 부익부빈익빈을 더욱 가속화했다. 2000년대의 80:20의 사회를 넘어서 이제는 부모의 직업, 경제력 등으로 태어나자마자 본인의 수저가 결정되는 신분제사회가 고착되고 있다. 헬 조선이다. 억압된 분노의 마그마가 거리를 배회한다.

사회적 활력을 되찾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다. ‘분노의 조직화’가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그것이 정치의 기능이다. 하지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친노, 친박으로 양극화되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면서 각자 한쪽의 자리를 차지한다. 중용의 도는 설 자리가 없다. 자기만 맞는 트럼프식의 한쪽 이야기는 듣기 편하다. 상대방 이야기는 듣기도 전에 빨리 결론내리고 토론회는 끝난다. 정파에 소속된 비판은 공정하지 못하다. 익명의 인터넷 세상처럼 자유로운 비판이란 명분으로 부정확한 정보로 함부로 비난하고, 화제만 되면 그만이다. 핸드폰정치의 폐해는 분명하다. 책임질 것 없고, 행동하지 않는다.

민주항쟁으로 직선제를 만들어낸 ‘87년 체제’가 한계에 다다랐다며 개헌논의가 시작되었다. ‘대립과 분열로 한 걸음도 못나가는 정치체제로는 밝은 미래를 만들기 어렵다.’는 지극히 타당한 이유에서다. 한편으로는 이제 드러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감추려는 수작으로 비치기도 한다. 최순실 일파의 처단과 국정수행 능력을 상실한 권력의 퇴진이 필요한 이 때 ‘책임총리’ ‘거국중립내각’논의에 대해서도 그런 의심이 없지 않다.

국정에 대한 생각이 다른 여야가 내각을 구성해 갈등을 거듭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분노만으로 안정된 세상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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