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지도에 입석포가 생겨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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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에 입석포가 생겨난 사연
  • 성동신문
  • 승인 2020.08.1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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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① 입석포
(가고중류도 茄鼓中流圖, 53.7 x 36.6 cm, 개인소장,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가고중류도 茄鼓中流圖, 53.7 x 36.6 cm, 개인소장,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출처:네이버지도)
(출처:네이버지도)

어느 날일까. 네이버에서 지도를 봤다. 그러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용비교와 강변북로 사이 서울숲공원 쪽에 '입석포'라는 게 있지 뭔가. 입석포? 나는 20년 6월 3일, 지도에서 입석포라고 표시된 지점으로 가 보았다.

이(위) 사진이다. 입석포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자전거 도로와 동부간선도로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입석'이 무엇인가. 

이런(위 사진) 곳을 입석이라고 한다. 선돌개 또는 입암이라고도 하고 울산 지역에서는 선바위라고 한다. 그렇다면 '입석포(立石浦)'는 입석이 있는 나루를 말할 것이다. 네이버에서 '입석포'를 검색해봤다. 정리하면 이렇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한강 변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포구이다. 조선시대에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 입석이 있었고 포구가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김석신이라는 분이 입석을 그림으로 남겼다. 1805년 한강의 저자도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그림의 위쪽 우뚝 선 바위가 바로 입석이다. 그림에서 포구를 명확하게 나타낸 것은 아니지만 근처에 있었던 포구가 '입석포'다. 그러니까 석신은 지금의 응봉산을 입석으로 그린 것이다. 응봉산이 훼손되기 전 본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네이버 지도에서는 입석포가 왜 뚝섬(서울숲)쪽에 있을까. 그리고 의문은 또 있다. '입석포'는 사라진 조선 시대 포구다. 그런데 어떻게 지도에 표시되었냐는 것이다. 다음의 카카오 맵이나 구글에는 없는데.

김석신은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는 궁궐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렸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립 기관의 직원이다. 하지만 석신은 일이 없었다. 마흔일곱이나 되었으나 도화서에서 찬밥이었다. 그 무렵은 김조순의 세상이었다. 김조순은 3년 전에 딸을 순조의 왕비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영의정 자리를 꿰찼다. 불행하게도 김석신은 김조순으로부터 관심 밖에 나 있었다.  

어느 날 봇짐을 지고 흥인지문을 나섰다. 봇짐에는 그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응봉산을 올랐다. 한강 가운데 떠 있는 저자도가 손에 잡힐 듯했다. 석신은 나루로 내려갔다.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저자도에 내려 닥나무 오솔길에 들어서려고 할 때다. 

“어이, 이게 누군가?”
석신은 소리 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아, 이런. 꼴 보기 싫어 궁으로부터 멀리 나왔는데 오히려 찾아간 꼴이 되었다. 강바람에 비단 도포 펄럭이며 버티고 선 인간은 김조순이었다. 

김조순은 부탁했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 말로만 부탁이지 명령이었다. 석신은 내칠 수 없었다. 김조순은 껄껄 웃으며 그림값은 높게 매겨 준다고 소리쳤다. 석신은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나섰던 길이다. 석신은 화구를 챙겨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석신은 굳은 얼굴을 하고서 그들의 뱃놀이를 그렸다. 오후 나절이 되자, 조순이 그림을 보자고 했다. 조순이 그림의 입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뭔가.”
강풍경과 뱃놀이하는 모습을 최대한 실경에 가깝도록 그렸었다. 트집잡히지 않으려고. 그랬음에도 조순의 말은 거칠었다. 석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뱃놀이보다 입석에 눈이 먼저 가지 않냔 말이야!”

석신이 김조순 일행의 뱃놀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일부러 입석을 강조했다는 말이었다. 석신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석신의 눈에 번개가 쳤다. 뺨따귀를 맞았던 것이다.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김조순을 수행하던 한 사내가 손찌검한 것이다. 석신의 아들쯤 되어 보이는 새파란 놈이었다. 

강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석신은 벌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나룻배에 올랐다. 
그날 해그름, 석신이 입석포에 내렸을 때, 그를 넌지시 잡아끄는 인간이 있었다. 얼굴을 들어보니 석신에게 손찌검까지 했던 그 인간이었다. 

“화백님,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당신을 살리려고 제가 나섰습니다.”
석신은 봇짐에서 그림을 꺼내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조순이 트집 잡았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젊은 사내는 마지못해 그림을 받아들고 말했다.
“시절을 원망하십시오. 안동김씨 세도, 강물처럼 흘러갈 겁니다. 여기에 화백님의 진심이 담겼다면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겁니다.”

사내의 말처럼 세월이 흘렀다. 입석포가 사라지고 말았다. 응봉산 아래를 지나는 경의선 철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응봉산의 입석도 옛 모습을 잃었다. 청와대 주인이 문재인으로 바뀌는 세월이 왔다. 

서성원 itta@naver.com
서성원 itta@naver.com

어느 웹디자이너가 한강 변을 거닐고 있었다. 압구정 쪽이었다. 조선시대 한복을 입은 사람이 화구를 들고 다가와서 말했다.

“강 건너 보이죠? 지도에서 입석포가 빠졌어요.” 
일어났더니 꿈이었다. 웹디자이너는 지도를 업데이트하는 중이었다. 웹디자이너는 네이버 지도에 '입석포'를 서울숲쪽에 표시했다. 네이버 직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음이나 구글에 없는 '입석포'가 생겨난 것이다. '입석포 터'가 아니라 '입석포'가 살아난 것이다. '입석'을 그렸던 김석신이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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