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의 노포] 성산창조헤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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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의 노포] 성산창조헤어하우스
  • 성동신문
  • 승인 2020.08.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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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보, 대동, 금성, 온양, 중앙, 새마을이발소 아시나요?
금호동에 48년 전 이식, 여태 자알 뿌리내려 살고 있슈!

높은 계급장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모자를 벗어야 한다. 면도칼을 든 그에게 기꺼이 사람들은 얼굴을 맡긴다. 그것도 편안하게. 하지만 이렇게만 쓰는 건, 반쪽만의 서술이다. 그는 남의 두피와 얼굴에 난 털만을 상대하며 보내야 한다. 일주일에 여섯 날을 큰 거울이 비추는 좁은 작업공간에서 갇혀지내야 한다. 빠삐용처럼…. 그에겐 50년이다. 하지만 그는 탈옥을 시도하는 대신 '창조헤어하우스'를 세우고, 그곳 주인이 되었다. 이발사 강말수 님의 이야기다. 

강말수 님이 만든 구역친목회 연락처. 구+역(역기)+침(침대)+목+회를 손수 그리고 코팅해 나눠가졌다.
강말수 님이 만든 구역친목회 연락처. 구+역(역기)+침(침대)+목+회를 손수 그리고 코팅해 나눠가졌다.

◆50년 전 서울로, 평생을 이발사로 산 사람

상주 아래, 대구 위에 구미-선산이 있다. 낙동강이 구불구불 계곡을 흘러가는 이 곳은 내륙 깊숙한 산골. 칠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강말수는 열아홉이 되던 해 아버지에게 선언한다. “서울로 갈래요!” 아버지는 순순히 선선히 “그래라!”허락한다.  

그리곤 당시 700원을 그에게 쥐어준다. 서울행 완행열차 표를 사고, 내려 밥도 한 그릇 사먹고, 기본요금 60원 택시를 타고, 작은누나 살던 봉천동에 내렸을 때, 아직 주머니엔 230원이나 남아있었다. 그의 말로 아직 명지털(솜털)도 가시지 않은 나이에 시작한 서울생활이었다. 

“봉천동은 서울대가 들어오기 전까지 진천동으로도 불렀슈. 마늘(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데가 봉천동이유. 똥 퍼서 밭농사 짓던 곳이 그곳이유. 수도도 없어 펌프로 물 쓰고. 물지게 지구 댕기구.”

그 동네서 그가 처음 접한 일은 이발소서 손님 머리를 감겨주는 일, 세발과장이라 불렀다. 물론 처음엔 빗자루부터 들고 머리털을 쓸었다. 팬티 양말 빨아주며, 눈치껏 이발기술과 면도기술을 배웠다. 2년쯤 지나자, 그를 눈여겨 본 금호동의 성산 이발소 사장님이 스카우트 했다. 

월급 700원. 잠은 이발소 의자에서 자고, 밥은 주인댁에서 먹었다. 금호동은 서울 4대문 도심과 지척이었다. 남으로 한강을 보고, 뒤로 산(당시엔 해병대산이라고 더 많이 불렀던 금호산)이 위치한 배산임수 자리였다. 명당 자리였으나, 그가 지내는 산동네는 시궁창 냄새, 루핑과 슬레트 지붕, 리어카도 지날 수 없는 좁은 땅이었다. 이웃들은 성수동 수원지에서 금호동 배수지에 올랐다가 서울 도심으로 내려가는 수돗물처럼, 숱하게 도심을 내려갔다 올라오곤 했다. 무채색 집에서, 유화로 그린 듯한 젊은 아가씨들, 수채화 같은 청장년 아저씨들, 크레파스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금호동 이발소는 바쁜 곳이었다. 멋을 부리는 신사는 거의 매일 들러 포마드 기름을 발라 가르마를 타곤 했다. 명절 때 사람들은 스무 명씩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두발자유화도 있기 전, 학생들도 많이 찾았다. 이발소는 목욕탕과 함께 명절맞이를 하는 중요한 의식의 장소였다.

“한참일 때는 우리 구역에 이발소도 많았슈. 저기 중앙병원 앞에 털보이발관, 삼성 짓기 전에 대동이발관도 있었고, 자이아파트 앞에 금성이발관 하고 온양이발관도 있고, 배수지 옆에 새마을 이발관도 있었고….”

성산창조하우스 내부. 소동소식에 그의 이발소가 2016년 5월달에 소개 되었다.
성산창조하우스 내부. 소동소식에 그의 이발소가 2016년 5월달에 소개 되었다.

◆이젠 없어진 동네 이발관들, 그의 48년 버팀목들은

그 시절은 어느덧 꿈같은 과거가 되고 말았다. 이발관들은 모두 사라졌다. 파랗고 빨갛고 하얀 이발소 무늬봉을 볼 수 있는 것은 여기 성산헤어창조하우스뿐이다. 그가 금호동서 48년을 한결 같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우리 동네 금호2-3가동에 김상집 동장님이 계셨어요. 동네 순시를 다니면서, 요 위쪽 영차수퍼에 들르셨대요. '아이구, 선생님 가게 오래 하셨죠?' 허니까 거기 주인이 그랬대유. '나는 암것도 아녀요. 아래 이발소는 더 오래 되얏소.' 해서 그분이 오신 거예요. 내 이야기를 듣고는 그걸 성동소식에 연락한 거예요. 당시 파출소장님 있어요. 몸집은 엄청 큰데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다니셨다고. 그리고 새마을금고 이윤우 고문님. 그 세 분이 기사를 오려서 저렇게 액자를 해서 함께 오신 거예요. 우리 마을서 애쓴다고. 소식지 보고 어르신들도 더 오시기도 하고, 말씀도 많이들 해주셨지.”

강말수 님은 또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다. 강용철. 주로 교회에서 쓰이는 이름이다. 
“우리 이발소 주인댁 아주머니가 여기 금호산 꼭대기 초광교회를 다니셨어요. 어느날 날 보고 그래요. 우리 교회서 부흥회 하는데 한번 와요! 일요일인데, 일하다 말고 슬그머니 갔어요. 창문 통해 광경이 보이는데, 점잖은 어른들, 초등학교 아이들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거예요. '아, 여긴 뭔가 있다.' 그래서 그 후 매일매일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게 된 거에요.”

현재 그는 성호교회 신자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이다. 그는 초등 고학년 주일학교 선생님이다. 교회 갈 때마다 제일 이쁘게 차리고 간다. 최근엔 초등2학년 아이들을 맡았다. 아이들의 활기가, 그를 따르는 다정함이, 그를 더욱더 젊게 만든다. 

그는 수도승 혹은 태릉선수촌 사람같다. 새벽 5시 전에 나와 예배에 간다. 6시 반이면 금호 배수지 공원서 꼭 세 바퀴 이상을 뛴다. 한 바퀴는 대략 1,450미터. 7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는 가게를 지킨다. 요즘은 코비드19로 손님이 더 없어 자주 바깥에 나와 있다. 얼굴이 볕에 탔다.

'성산창조헤어하우스'는 그가 이발소를 물려받으며 손수 지은 이름이다. 전 이발소 이름 '성산'을 굳이 버리진 않았고, '머리를 창조하는 집'에 마음을 담았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와 “머리를 예쁘게 다듬어 달라!”고 하고, (화장발을 잘 받게) 면도를 해달라는 젊은 여자 손님도 있다.  

꼭 먼저 전화를 한 뒤에서야 찾아오는 과거 단골들…. 담담하게 그들을 맞지만, 가슴에선 멀리서 온 친구들마냥 기쁘다. 
성산헤어창조하우스 문 앞엔 주인 강말수 님보다 키가 큰 유도화가 자라고 있다. 40년 전 그가 가지를 꺾어 땅에 꽂은 뒤 여태껏 성장했다. 나고 산 곳서 뿌리 뽑혀 왔으면서도, 새 땅에 잘 뿌리내리고 꽃핀 이발수 강말수의 나무다웠다. 
금호초등학교 근처, 전) 중앙병원 뒤편 등성이쪽. 전화 02)2232-0893 
주소 :성동구 금호동 500-23


         <원동업/성수동쓰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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