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판소리 4바탕 완창한 소리꾼 이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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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판소리 4바탕 완창한 소리꾼 이성현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0.08.13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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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초월적 존재가 만든 듯 굉장해!”
국악 신동, 20년 성장의 나이테를 말하다
이성현 소리꾼, 이상진 고수가 흥보가의 한 자락을 펼쳐보였다
이성현 소리꾼, 이상진 고수가 흥보가의 한 자락을 펼쳐보였다

소리꾼 이성현을 처음 본 것은 2020년 1월 중순 무렵 <성동신문>에서였다. 국립국악원 우면당서 열리는 심청가 완창에 초대한다는 알림을 받았다.

완창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꼭 한번은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2월 2일 열린 공연 무대는 단촐했다. 소리꾼 하나와 고수 하나. 그러나 공연은 4시간 반 이어진 대장정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관객들은 열정적 떼창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성현을 이름으로 부르던 그날의 사회자 원기중 교수는 공연 후 그를 명창이라 정정해 불렀다. 의심할 바 없는 빅콘서트였다. 공연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사실 그날의 공연은 살얼음판이었다. 한국서도 '코비드19'가 번지려는 참이었으니까. 무엇이 그 많은 이들을, 그 '위험한 곳'으로 기꺼이 오게 했을까? 

지난 7월 31일 이성현 소리꾼을 다시 만났다. 우리가 함께 알듯이 이제 그런 떼창은, 공연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일곱 살 흥부가 완창 당시
일곱 살 흥부가 완창 당시

부모님 스승님 대중들 모두 신동 쏘아올린 큰 활

2월 공연 당시 어머니가 함께 인사했습니다. 당신께 예술적 재능을 물려주신 분이라 느꼈어요. 이번 취재 일정을 잡으면서는 아버지와 통화했죠. 매니저 역할을 하고 계신 것 같구요. 책 <예언자>의 한 구절이 생각나더군요. '부모는 자식을 쏘아올리는 큰 활'이라고 칼릴 지브란이 썼었죠.

“어머닌 피아노도 잘 치시고, 종이접기, 도자기, 클레이아트 같은 공예에도 다재다능하세요. 어린이집을 하신다고 그런 걸 다 잘하시진 않으니까. 아버지도 그 역할을 하시는 게 맞아요.  
최근엔 중장비 운전도 하시면서 저를 지원하고 계시니까요.”

은사 조상현 국창과 함께
은사 조상현 국창과 함께

= 2002년 일곱 살 때 처음 흥보가를 완창했습니다. 13년 춘향가, 17년 수궁가 그리고 지난 2월에 심청가를 완창했죠.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적벽가만 남았군요. 처음 판소리를 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성현이 우리 소리를 처음 접한 것은 네 살 때다. 너무 어릴 적 일이라 아버지 이상진 고수(그는 이제 고수 역할을 한다)가 끼어들었다. 

“네 살 때, 어린이집서 민요를 배웠어요. 선생님이 '얘 목소리가 트인다.'고 판소리를 배워 봄이 어떻겠는가 권유로 시작했어요. 

한계명 선생께 6개월 만에 흥보가를 모두 익혔죠. 한글도 그 사이 깨쳤어요. 그때 한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성현이가 남자이고, 아버님이 보성 분이시니, 조상현 선생님을 찾아가 공부하세요. 그분도 보성 분입니다.' 하고요.”

백일 조상현 선생은 국보급 소리꾼, 국창이었다. 찾아간 데에선 단체수업을 하고 있었다. 2~3백여 명이 함께 듣는 수업이었다. 선생이 한 소절을 하면, 수백의 제자들이 따라 했다. 국창의 눈이 자주 한 곳으로 쏠렸다. 성현의 소리가 남달랐다. 
“아가! 이거 따라 하것냐?”
“네!”
“한번 나와서 해 볼래? 아버지가 델꼬 나오시요!”

성현은 흥미로운 구절, 자기가 잘 하는 구절만 골라 부르지 않는 아이였다. 성현은 첫 아니리(사설)부터 시작해 완창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20여 분쯤 성현의 판소리가 장내를 채웠다. 선생이 중지 시켰을 때, 장내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점점 고조되던 추임새는 우레 같은 환호와 박수로 바뀌어 오래 이어졌다.

“내가 어제 꿈자리가 좋더니, 너를 만나려 그랬구나!”
국창의 말이었다. 성현에게 자신의 길이 또렷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판소리는 굉장한 지성과 삶을 담은 우리 예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을 성현네는 착실히 이어갔다. 지난 22년여간 성현은 백일 조상현을 은사로 모시고 공부해 왔다. 그에게 심청가, 춘향가, 수궁가를 배웠고, 흥보가는 유미리 명창에게 따로 배웠다. 

= 아버지가 보성 분이라서 다행입니다.(웃음)

“흥선대원군이 '천하제일강산'이라고 격찬했던 소리꾼이 박유전 선생입니다. 그의 소리가 강산제죠. 그걸 정재근 선생이 잇고, 다음 정웅민 명창이 이었어요. 그 정웅민 명창이 보성에 뿌리를 내리면서 보성소리가 돼요. 동편제는 힘차고 장단이 딱 떨어집니다. 서편제는 좀 더 기교가 들어가고 서정적이죠. 보성소리는 그 소리를 모두 아우릅니다.”

아버지 이상진의 고향은 보성 복내면(福內面) 시천리(詩川理)다. 가난한 마을이지만, 물이 맑고 시를 사랑하는 곳, 2012년에 작고한 '마지막 유학자' 송담 이백순은 상진의 집안 아저씨뻘 된다. 상진의 선친은 새벽이면 일어나 윗목서 천수경을 독송했고, 시조도 잘 읊었다. 그의 옛 집은 주암댐 건설시 상수원 보호지로 수몰됐다. 88년 즈음이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명륜동서 광장동으로, 구의동, 자양동, 군자동으로 도시살이가 이어졌다.

판소리 뮤지컬 [적벽] 출연 당시
판소리 뮤지컬 [적벽] 출연 당시

= 우리 판소리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 걸작이기도 합니다. 소리꾼께 직접 판소리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판은 노름판, 씨름판, 굿판처럼 사람이 모여 무언가 벌어지는 곳이죠. 판노래가 아니고 판소리인 건, 새소리, 바람소리, 귀신소리, 아기 우는 소리,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를 담는다는 거구요. 판소리는 그 모든 '소리'를 담아 공연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이에요. 저는 판소리 사설이나 음률을 볼 때마다 놀라요. 바깥 세상의 초월적 존재가 만든 게 아닐까 하거든요. 굉장한 지성과 삶의 결과물이니까.”

= 현재의 관심과 준비가 궁금합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학교(중앙대 전통예술과)에서 창극을 해볼 기회가 있었어요. 졸업공연 '모돌전'에서 주인공을 맡았었죠. 창작창극이었는데, 부족함을 많이 느꼈죠. '연기'를 배우고도 있어요. 정통 판소리를 기반한 창작극으로도 확장해 보고 싶죠. 판소리가 원래 대중과 만나고 소통해서 공명해온 예술이니까요.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가야죠.”

그는 대중들과 꾸준히 만나왔다. 인사동서 거리소리단으로, '아름다운재단' 판소리 기부로, 아산병원서도 사랑의 음악회를 열어왔었다. 하지만 올해는 여의치 않다. 

올해 개설한 광진문화원 강의도, 해태크라운의 임원진 레슨도 중단됐다. 주야로 아들과 함께 하는 아버지가 '중장비 운전'을 하는 건 악화된 경제사정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2월, 흥미롭게 보았던 심청가의 한 부분을 요청했다. 장님을 위한 잔치에 가던 학규가 목욕을 하다 옷을 모두 잃어버린 그 부분[심청가는 물의 이야기다. 정한수로 빌어 나온 늦둥이 심청은 개울에 빠진 학규 때문에 인당수에 풍덩한다. 학규는 개울에서의 목욕을 통해 새사람이 될 운명이 감지된다]이었다. 

상진의 북 장단에 성현은 금세 학규가 되어 소리를 했다. 99년에 터졌을 그 환호성이 다시 들리는 듯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판소리 백일성악회, 전통가무악나루, 강산소리교실에서 확인 가능하다.
【원동업 성수동쓰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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