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에서 본 세상, 턱은 왜 그렇게나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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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서 본 세상, 턱은 왜 그렇게나 많죠?”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0.10.19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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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 휠체어 보행자

횡단보도 주차차량에 화내지 않고 대처하는 법

나의 이름은 정수기, 그래요. 물을 걸러 마시는 그 기구. 75년생,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세상은 아직 '정수기'가 흔치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부모님이 내 이름을 그렇게 지었겠지)
어느 날 강남의 큰 건물 앞에 앉아있는데(난 늘 그렇죠), 길 지나던 어여쁜 아가씨가 내게 묻더군요. “저 건물 안에 정수기가 있나요?”
굴뚝같은 마음이란 게 그런 거더군요. 난 대답하고 싶었어요. “내가 정수기인데요.”
그러면 생길 일도 뻔히 상상이 되었죠. '어디서 이런 돌아이가 다 있나?'
침을 꿀떡 삼키고 나는 대답했죠. “아마 있겠죠?”
 

내 이름은 정수기, 휠체어 이용자
각설하고, 나는 성수동에 삽니다. 토박이에요. 휠체어를 탄 지는 20여년쯤. 스물세 살 때 있던 교통사고 전까지, 나도 내 두 발로 어디든 갔던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 97년 3월 6일. 차를 몰 때 난 스피드를 즐겼어요. 자신만만했죠. 사고는 두무개길, 옥수역으로 갈라지는 지점서 났어요. 공사중이라 앞이 차단돼 차선 변경을 했는데, 뒤에서 오던 차가 엄청 빨랐어요. 쾅!
일주일쯤 코마 상태로 병원에 있었어요. 한 달쯤은 중환자실서 집중치료를 받았고….

그 뒤 지루하고 힘든 재활치료가 시작됐어요. 1년이 걸릴 지 2년이 걸릴 지, 그러면 나아질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 더 힘들었어요. 열 걸음 걸어도 자고나면 아홉 걸음쯤 돌아간 느낌? 그래도 사력을 다했죠. 내가 그 치료 중에 아쉬움을 느끼는 게 있어요. 제일 효과가 좋았던 처치는 '와츠'라 불리는 치료였어요. 온천처럼 따뜻한 물에 약제를 넣고, 물리치료사와 함께 운동을 하는 거. 근데 그 시설은 멀리 고척동에만 있는 거예요. 매번 장애인택시를 불러 타고(장애인 택시는 훨씬 싸요. 정말 좋은 제도 같아요.), 거기까지 간 뒤, 와츠를 받고 수영도 하고 돌아오는 거예요. 근데 그 와츠 치료는 1년밖에는 못 받아요. 대기자가 많아 혜택을 연장해 줄 수 없다는 거였어요. 시설과 재원이 더 충분했다면 보다 온전한 치료도 가능했을 텐데…. 다시 1년을 기다려야했죠.

그런 중에 결단의 순간이 있었어요. 재활의 끝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요. 보행 보조기를 평생 사용해야 하는 삶. 그런데 전동휠체어를 타면 어디든, 원하는 데로 금방 갈 수도 있잖아요. 그게 더 나은 대안 아닐까? 어디든 똑같이 다닐 자유를 얻는다면, 그렇게 않을 이유가 뭐지? 그렇게 나의 전동휠체어 시대가 시작됐어요.

의자에 앉아보니 그간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더라고요. 세상엔 웬 턱이 그렇게나 많습니까? 한 10센티만 되는 턱도 넘어갈 방법이 없는 거예요. 내 몸무게까지 포함해서 휠체어가 대략 300킬로그램쯤 되거든요. 장정 서넛은 붙어야 들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매번 붙어있을 수도,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잖아요.(그러다 허리라도 삐끗하면? 아휴~!) 난 자유를 얻었지만, 또 그만큼의 자유를 빼앗긴 걸 알았죠.
 

한강과 서울숲으로 떠난 무장애 여행길
지난 9월에 성수동 여행을 했어요. 한강 수변길과 서울숲을 다녔죠. 사실 그 경로는 내가 늘 가는 곳이었는데, 성동공정여행사업단에서 시작해 최근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은 사계절공정여행(대표 백영화)과 '무장애 여행' 발굴 프로젝트로 연결됐어요. 그 마음이 고마워 기꺼이 동행이 됐죠.

성수동서 한강으로 나오면 좌로 제2롯데월드 타워가, 우로 남산타워가 보여요. 낮에도 밤에도 장관이죠. 우리 휠체어는 보행로로 다녀요. 일반 보행속도랑 비슷하거든요. 자전거 도로는 위험하죠. 한강길은 곳곳에 위치 표식판이 있어요. 사고라도 나면 즉시 119에 위치를 전달할 수 있죠.

한강서 성수동으로 가는 길은? 자전거는 계단 옆에 경사로만 만들면 되죠. 하지만 휠체어는 두 가지 방법만 있어요. 수도박물관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와 구름다리를 건너는(over) 방법, 계단을 우회해 평지와 연결되는 경사로를 이용해 둑을 통과(through)해 가는 방법. 걸어가는 사람의 길이 여덟 개쯤이라면, 우리는 두 개쯤 만 이용할 수 있는 거죠.

서울숲도 한강만큼 좋죠. (성수동은 정말 복 받은 동네같아요. 흐흐. 물론 저처럼 직접 나오신다면 말이죠.) 그런데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하는데…. 수도박물관 화장실을 보면 좀 화가 나요. 여기도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지만, '쫌 보여주기식 아니야?' 싶거든요. 가림막과 입구 폭이 너무 좁아서 휠체어는 회전 자체가 힘들어요. 휠체어가 들어간 뒤 문을 닫기도 어렵죠. 아! 물론 다른 서울숲 화장실이 다 이런 건 아니에요. 서울숲은 다른 모든 곳의 모범이 될 만큼 장애인 친화적 편의시설을 갖추었어요.

저는 횡단보도로만 차를 건너요. 무엇보다 안전하고, 사고가 나도 거긴 보행자 무과실 지역이거든요. 그런데 서울숲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주말엔 차를 도로에도 대놓죠. 가끔 횡단보도에 주차한 분들도 있어요. 그러면 휠체어는 통과할 방법이 없어요. 차도를 역주행 해서 횡단보도를 찾으러 가야할 때도 있죠. 그럼? 분노의 핸드폰질이 시작돼죠. 요즘은 서울스마트 불편신고앱 같은 게 있으니까.

작은 받침대 하나로도, 함께 밥 먹을 수 있어요
방문자 센터 옆에는 휠체어 충전기까지 있어요. 쌀과 쇠고기를 사놓은 엄마가 행복한 마음으로 안심을 하듯, 우리도 이렇게 무료 충전기를 보면 그렇답니다. 서울숲은 포장된 자전길과 흙길이 구분돼 있어요. 경사로가 있지만 완만한 편이라 이동도 자유롭죠. 겨울정원이나 향기정원, 설렘정원 같은 곳도 큰 무리 없이 들어가 꽃들 만지고, 나무 아래 서고, 향기를 맡을 수도 있어요. 피톤치드는 우리들 모두에게 좋겠죠.

구경도 마쳤으니, 이제 밥도 먹어야 할 텐데. 커피고 밥이고, 우리는 맛이 우선이 아니에요.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곳인지부터 생각해야 하죠. 엘리베이터 없는 이층집? 그림의 떡이 그런 거예요. 갈비골목이 인기가 있는 곳이라는데, 문턱도 있고, 계단도 있는 곳이 많아요. 나도 예전엔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 내가 갈 만한 곳은 없네요.(날 거부하지 말아요. 저 안에 정수기가 있고 싶다고요.) 밖에 테이블을 차려주시는 이모님도 계신데…, 아뿔사 거긴 문을 닫았어요.

우리가 들어간 곳은 소녀방앗간. 여긴 삼각받침대를 놓아서 턱을 넘게 해주셨어요. 이 작은 배려가 없었다면 정수기는 점심을 굶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소녀방앗간. 정선 영월의 오지 산나물로 만들었다는 밥은 정말 맛있었어요.
한강에, 구름다리에, 서울숲에 감사했어요. 함께 해준 사계절공정여행 재성 님에게도 감사했어요. 모두 안녕!

【원동업=성수동쓰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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