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과 새로움이 뒤죽박죽 혼재하는 성수동만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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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음과 새로움이 뒤죽박죽 혼재하는 성수동만의 오늘
  • 성동신문
  • 승인 2021.01.2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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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16) 성수동 뚝섬로, 연무장길, 성덕정길, 상원길

길 이름으로 남은 성수동의 과거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이 혼재하는 풍경의 성수동.  서성원 ⓒ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이 혼재하는 풍경의 성수동.  서성원 ⓒ

○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성수동은 핫 플레이스입니다. 서울에서 뜨는 동네죠. 그렇다면 성수동은 어떻게 오늘날처럼 되었을까요. 성수동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연무장 혹은 성수동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듯한 담장 벽화. 서성원 ⓒ
연무장 혹은 성수동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듯한 담장 벽화. 서성원 ⓒ

◆ 1. 성덕정(聖德亭)에서 살곶이목장을 내려다보면 몽골 초원 저리 가라!

성수동의 과거 역사는 성수(聖水)라는 말에 힌트가 있습니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 같아도 흔적 같은 것을 남기거든요. 성수동에 성덕정(聖德亭)이란 정자가 있었대요. 그리고 뚝도 수원지(水源池)가 있었구요. 각각 앞 글자를 따서 성수(聖水)라는 지명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답니다. 

성덕정은 지금의 성수동 성당 자리에 있었던 정자입니다. 성덕(性德)은 임금의 덕을 말합니다. 임금이 무척 반길만한 정자입니다. 성수동(뚝섬)은 서울에서도 땅이 평평하기로 유명합니다. 이런 곳에도 언덕은 있었죠. 그곳에 있었던 정자가 성덕정입니다. 정자에 한 번 올라볼까요. 우와, 눈이 시원합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막힌 곳이 없습니다. 

드넓은 땅은 초원입니다. 말들이 초원을 누빕니다. 여기는 마장(馬場), 전관목장(箭串牧場), 살곶이벌(箭串平) 등으로 부르던 왕실 목장이죠. 국립목장입니다. 전마(戰馬)를 기르는 곳이었죠. 남으로 눈을 돌리면 한강이 아득합니다. 성덕정은 사라지고 '성덕정길'이란 이름만 남았습니다. 그 자리엔 일제 강점기에 둑도면 면사무소가 있었고 지금은 성수동 성당이 있습니다. 

◆ 2. 연무장(鍊武場)의 군사훈련을 참관하는 왕, 뚝섬엔 둑기(纛旗)가 걸린다 

성수동을 '뚝섬'이라고도 합니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던 이들은 '뚝섬'이 익숙합니다. 그리고 '뚝도'라고도 하죠. 현재 성수동의 전통시장은 '뚝도시장'입니다. 

그럼, 뚝섬, 뚝도 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좌독기(坐纛旗) 혹은 둑기(纛旗)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나라에서 소유한 목장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한양에 가까우면서 광활한 초지가 있어서 그랬을까요. 조선 시대에 왕들은 심심찮게 뚝섬을 드나들었답니다. 

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훈련에 참관하는 행위를 '열무(閱武)'라고 한대요. 열무하거나 사냥을 하려고 이곳으로 왔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성종은 열무 목적으로 무려 9번이나 왔습니다. 

조선 후기에 왕을 호위했던 군대는 훈련도감입니다. 훈련도감의 공식 기록을 '훈국등록'이라고 합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왕이 도성을 나오려면 2천~3천 명의 군사와 함께합니다. 

이때 왕을 호위하는 군대가 앞세우는 깃발을 좌독기(坐纛旗) 혹은 둑기(纛旗)라고 한대요. 깃대가 4.8m이고 깃발이 3m 정도입니다. 문양은 화려하죠. 위엄을 보여야 하니까요. 

이 깃발 외에 공식적인 깃발은 24개가 더 있습니다. 한양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 동네에 이삼천 명의 군대도 그랬지만 왕의 존재를 드러내는 둑기는 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나 봐요. 

이런 둑기가 뚝섬에 수시로 세워지니까 (만약 뚝섬에 둑신사(纛神祠)가 있었다면 말할 것도 없죠.) 어느 시절부터인가 '독기가 있는 섬'이란 의미로 '독섬'이라고 했지요. 한자로는 '독도(纛島)'죠. 실록에는 독도(纛島)로 나옵니다. 그 후 사람들은 '독섬', '둑섬'을 '뚝섬'으로, '독도','둑도'를 '뚝도'라고 부르게 되죠. 이 지명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죠. 

성수동이 어떻게 '섬'이 되었을까요? 사람들의 착각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아요. 뚝섬은 중랑천과 한강으로 에둘러 쌓여있죠. 송파나루에서 뚝섬을 거쳐 중랑천을 건너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이들 눈에는 섬으로 보였겠죠. (지금의 물길과 달랐던 때, 실제로 섬이었을 수도 있구요.)

그리고 열무 외에도 군부대 자체의 훈련도 꽤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기병 부대는. 그 훈련장을 연무장(鍊武場)이라 합니다. 연무장은 역시 길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연무장길. 성수동 핫 플레이스의 중심축이죠. 

말들이 풀 뜯는 국립목장을 조망하기 좋았던 성덕정, 군대 훈련장이 있었던 연무장 그리고 뚝섬, 임금이 살곶이다리(전관교)를 건너와서 쉬어 갔다는 상원 마을, 이런 과거는 성수동의 길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성덕정길, 연무장길, 뚝섬로, 상원길. 
 
◆3. 일제 강점기에 뚝섬을 유원지로 만든 일본

뚝섬은 조선 시대에 국가(왕실)의 땅이었죠. 왕실 목장이었으니까요. 조선 후기에 들면서 말의 역할이 점차 미약해지죠. 전쟁이 총포의 화력 중심으로 바뀌었으니까요. 그즈음에 청은 목장을 운영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결국 굴복합니다. 이어서 일제 강점기가 됩니다. 

왕실 소유의 땅은 누가 차지 했을지 뻔하죠. 일본인들이죠. 야마다 농장, 권업모범장이 당시의 지도에 나타나 있죠. 동양척식주식회사도 손놓고 있지 않았겠지요. 그 외에도 뚝섬에는 일본 신사, 일본인 소학교, 순사 주재소, 수도 수원지 등도 있었네요. 

1934년에는 왕십리에서 성수동을 거쳐 광진까지 이어지는 기동차가 들어오죠. 그때부터 성수동은 경성 시민들의 유원지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기동차를 타고 놀러 오는 곳이 되죠.

잠깐, YTN의 짤막한 영상('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을 살펴보려 합니다. 일본이 뚝섬을 유원지로 만든 것은 뚝섬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그랬답니다. 요약하면 이래요.

조선 시대에 뚝섬은 둑신제(纛神祭)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었대요. '둑(纛)'은 뚝섬에 1940년까지 있었다. ('둑'은 깃발이 없는 '둑기',-필자 주석) 홍수로 '둑'이 유실돼요. 독립운동가들은 '둑'을 복원하려 했지만 일본인들이 저지했고 유원지로 만들어요. 
이렇게 안타까운 역사가 숨겨져 있는 뚝섬이랍니다.

◆ 4. 낡은 공장이 갤러리와 카페로

성수동이 힙스터로 나아가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대림창고.  서성원 ⓒ
성수동이 힙스터로 나아가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대림창고.  서성원 ⓒ

해방 후에 뚝섬은 농업이 성행하죠. 조선 후기부터 뚝섬나루 주변으로 마을이 번성하기도 했구요.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쳐서 60년대가 되죠. 서울시가 도시계획을 다시 정비합니다. 산업화 시대가 됩니다. 

세월이 흘러서 성수동은 준공업지역이 됩니다. 또 세월이 흐릅니다. 서울 중심부에 있던 수제화 공장이 성수동으로 옮겨옵니다. 충무로의 인쇄업도 들어오죠. 금속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도 생겨나고 언젠가부터 자동차 정비업도 꽤 많이 자리잡게 되지요. 

2010년대를 전후해서 성수동 산업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공장을 운영해도 이익이 생기지 않는 업체들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서울 외곽지로 나가죠. 빈 창고나 공장이 생기죠.

이런 건물들을 문화복합공간으로 리모델링을 시도하는 이가 나타납니다. 그 출발은 대림창고입니다. 2011년. 
대림창고는 1970년대에는 정미소였대요. 쌀을 찧은 공장이었다니 놀랍죠. 그러다 물류창고로 바뀌죠. 그곳을 정성윤 씨가 갤러리와 카페의 형태로 리모델링하죠. 대림창고가 서울시민에게 널리 알려지죠. 이에 힘입어 16년 어니언, 17년 어반소스, S팩토리, 19년 블루보틀, 20년 성수연방들이 성수동에 들어와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성수동 변화에 큰 역할을 했지요. 

◆ 5. 서울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뒤죽박죽 성수동만의 매력

성수동의 전통 산업, 수제화 매장. 서성원 ⓒ
성수동의 전통 산업, 수제화 매장. 서성원 ⓒ

오늘의 성수동이 있기까지 복합문화공간들만의 공이라고 하기는 뭣합니다. 왜냐하면 성수동은 또 다른 무엇이 있거든요. 

복합문화공간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데에는 서울숲이 한몫합니다. 서울의 허파이면서 아름다운 공원이죠. 또 한강과 중랑천은 매력 넘치는 장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죠. 그리고 예술가들이 성수동을 변모 시킵니다. 편리한 교통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성수동의 매력에 이끌려서 성수동 주민이 된 사람들이죠. 

그들은 성수동을 사람 냄새나는 도시로 바꾸죠. 그들은 태생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이랍니다. 지금도 성수동 곳곳에 남아 있지요. 깊숙한 골목에서 공방을 하거나 전시실, 공연장, 혹은 작업실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겠죠. 이들은 돈벌이에 약한 부류들이죠. 임대료가 올라가면 버텨내기 어려운 사람들이죠.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한데, 지자체에서 작은 도움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요. 

성수동의 매력은 혼재 혹은 뒤섞임이라고 봐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있죠.
성수동 풍경을 한번 볼까요. 7,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나 골목이 아직도 남아 있죠. 그 곁에 첨단 건물이 서 있죠. 

성수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그렇죠. 수제 구두를 만드는 장인들이 있고 쇠를 깎아서 부품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있고 골목에는 여전히 인쇄기를 돌리는 사람이 있죠. 전통적인 제조업이 아직도 건재하죠. 그 반면에 지식산업센터에 입주한 크고 작은 회사에는 첨단 기술자들이 일하죠. 지식산업센터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서울의 지식산업센터 중 20%를 차지 한다고 하네요. IT를 기반으로 하는 벤처 사업가, 엔터테이먼트 회사가 있으니 그쪽 분야 종사들은 첨단을 걷는 이들이죠. 이렇게 이질적인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 성수동이랍니다. 이것은 서울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성수동만의 매력! 

불황기에도 대기자가 줄서는 곳이 있다.  서성원 ⓒ
코로나로 어려운 상가들, 할인 행사 안내.  서성원ⓒ
코로나로 어려운 상가들, 할인 행사 안내.  서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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