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봉, 금호, 왕십리 뛰어다니던 발로 지구를 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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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 금호, 왕십리 뛰어다니던 발로 지구를 돌리다
  • 성동신문
  • 승인 2021.01.2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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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라시아 횡단 통일마라토너 강명구

“준비와 훈련? 못했지만 시작했죠. 실패해도 돌아오면 되니까!”

왕십리 소월 옆에선 강명구 마라토너. “천재적 재능이 없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그는 자신이 갈 문학의 길을 찾았다.
왕십리 소월 옆에선 강명구 마라토너. “천재적 재능이 없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그는 자신이 갈 문학의 길을 찾았다.

강명구 선생과 인터뷰 약속을 했을 때 조금 설랬다. 인터뷰가 어느 사람이나 그렇겠지만, 나는 지금 한 사람의 인생과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그는 마라토너.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해변의 태평양에 뒤발꿈치를 담그고, 뉴욕의 유엔빌딩까지 달려가 대서양에 앞발꿈치를 댔던 사람. 뿐인가?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출발, 유라시아 대륙을 달려 북한의 압록강을 찍어버린 사나이. 그의 몸에는 로키산맥의 바람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태양열이 찍혀 있을 거였다.

그는 성동에서 나고 자랐다. 1957년 왕십리생. 1990년 미국으로 날아가 20여년 남게 뉴욕서 살아왔다. 그가 살았던 어릴 적 성동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쉰 가까이서 겨우 시작한 마라톤으로 어떻게 미주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수 있었는가 알고 싶었다. 그를 그의 고향 왕십리에서 지난 1월 10일 만났다.

10킬로는 매일, 일 없애자 20킬로, 쉬면서는 30킬로… 그렇게 꿈을 키웠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1) 그의 다리, 2) 타클라마칸 사막 3) 체코의 산골 마음 4) 이란 여학생들과 셀프카메라 촬영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1) 그의 다리, 2) 타클라마칸 사막 3) 체코의 산골 마음 4) 이란 여학생들과 셀프카메라 촬영

- 이젠 한국에 다시 자릴 잡으신 거죠? 수구초심, 고향에 오시니 기쁘시죠?

“제가 행당국민학교를 나왔어요. 그때는 학생수가 8천여 명 가까이 되었어요. 요즘은 한 오백명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엔 반에 한 백 명쯤이 한 데서 공부했어요.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었어요.”

- 댁의 가계(家系)를 말씀해 주시죠.

“아버지가 황해 송림사람, 어머니가 왕십리 사셨더랬어요. 할아버지가 평양서 제철소를 했다고 하셨는데, 내려오셨죠. 당시 삼팔따라지들은 부르조아나 기독교인들이었어요. 외할아버지는 양복기술자셨는데, 대대로 궁궐서 바느질하던 가문이었다 그래요. 나는 왕십리서 났어요. 당시 응봉산 금호산 같은 데는 진짜 산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청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어요. 난 산 7번지가 고향이에요. 아버지는 국어선생님이셨어요. 뒤늦게 문단에도 데뷔를 하셨고.”

- 만 서른에 미국으로 가셨다 했는데, 그 이전에는 이곳서 자라신 거죠?

“그렇죠. 중학교는 퇴계로 장충단 공원 옆 동북중엘 다녔고, 고교는 한영고를 나왔어요. 문학을 하고 싶어 대학에 갔는데, 천재적 재능이 없인 밥먹고 살기 힘드니까 서른까지 날라리 백수로 있다가 별볼일 없으니까 미국에 건너간 거예요. 옛날엔 미국 하면 천국인줄 알았으니까. 가보니까 남의 나라에서 쉽지 않더라고요.”

샌드위치 가게, 쇼핑몰 계산원, 가발 영업 등을 거쳐 자동차 부품상, 식당 등을 전전했던 그가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나이 쉰이 다 되어서다. 40대가 넘어가면서 찌뿌둥해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다. 하다 보니 삶을 다시 볼 힘이 생겼다.
“나는 인생이 70~80년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아흔 살, 백 세까지도 사는 세상이 된 거더라고요. 이제 겨우 50년을 살았는데, 또 50년이 남아있는 거예요. 이젠 찌질하게 살지 말자. 어떻게 남은 삶을 살지, 한번 혼자 깊이 생각해보자 한 거죠. 그래서 아메리카 횡단 마라톤에 나서게 된 거예요.”

- 준비와 훈련은 충분히 하셨습니까?

“못했어요. 그냥 갔어요. 내가 매일 10킬로미터씩은 무조건 뛸 수 있었어요. 근데 일 그만두고 뛰기만 하면 20킬로도 무조건 가능하겠죠. 근데 쉬기도 하고 또 간식도 먹어가면서 뛰면 30킬로도 무조건 뛸 수 있을 거 아니예요. 근데 이왕 하는 거 마라톤 거리만큼은 매일 뛰어줘야지 주목도 할 거 아녜요? 그래서 그래보자 하고 시작했어요. 하다 안 되면 돌아오면 되지.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 그게 2015년이었죠. 완주를 해내셨구요. 미국 대륙에 도보 횡단 루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없어요. 옛 서부개척 시대에 시카고에서 엘에이까지 오던 길이 66번 도로예요. 거길 뛰긴 했죠. 근데 오다가 길이 끊어지기도 하고 그래요. 새길도 많이 났으니까. 중간에 큰 도시 다섯 개쯤을 연결하고, 다음 다음 지점까지 가곤 했어요. 때론 사람이 통행할 수 없는 고속도로를 가야할 때도 있는데, 그럼 경찰이 출동해요.

- 잡혀갑니까?

“그들은 영웅이라든가 모험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알아요. '네가 대단한 모험을 하는구나' 해줍디다. 사진도 같이 찍고. 그래도 공무원으로 역할을 하긴 해야 하니까, 워닝(경고)을 하죠. 그리곤 풀어주고. 다음 잡힐 때 쓰라고 자기네 뱃지도 줘요.”

- 뉴욕에서 20여 년 넘게 사셨습니다. 횡단하면서 본 미국과 사시던 곳의 미국은 다릅니까?

“미국을 멜팅팟(용광로)이라 그러는데, 오만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뉴욕 거기는 인종들이 다 모여서 사는 도시죠. 그래도 저마다 사는 동네가 따로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끼리, 아이리쉬, 이탈리안 동네도 있고. 자기의 정체성들을 잃지 않고들 살아가요. 뛰면서 보니까 인디언 마을은 전부 다 사막 한가운데 있어요. 텃밭 하나 가꿀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철조망 안에서 살아요. 그 비옥한 땅 다 빼앗기고, 생활보조금 얼마로 연명하는 거예요. 엘에이서 처음 출발할 땐 정말 길게 홈리스촌이 있더라고요. 거기는 날씨가 항상 따뜻하니까. 마리화나 피우고 누운 사람들, 술병 깨진 거 보면서 정말 스산했어요. 다 와가지고는 메릴랜드 볼티모아 지나가는데 그때 흑인 폭동이 일어나가지고 전쟁터에 들어온 거 같았어요. 정말 미국이 선진국일까 의문도 들었죠.”

겨울, 사막, 산맥, 열여섯 나라 국경 넘는 유라시아 대륙 마라톤 완주

- 2년 뒤에 유라시아 대륙을 뛰었습니다. 네델란드서 시작해 북한을 지나 서울로 오는 계획이었죠?

“미 횡단 끝지점이 뉴욕 유엔본부 앞이었어요. 글로벌 웹진 로창현 뉴스로 편집장이 다음 계획을 묻는 거예요. 난 아무 생각도 없었지. 근데 자꾸 물으니까, 더 큰 데, 유라시아 대륙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거길 뛰어볼까 한다 했어요. 그 뒤로 잊었죠. 근데 자꾸 잔상이 남아요. 근데 또 자꾸 말도 안 되는 줄 내가 아는 거예요.”

- 왜 말이 안 됩니까?

“미국은 단일 언어권이에요. 치안도 보장되죠. 근데 거기는 1년 이상 뛰어야 되는데, 겨울을 나야잖아요. 더운 건 참지만 저체온증 걸리면 죽어요. 또 분쟁지역도 지나야 하고. 국경도 여럿 넘어야 하고. 그러다 올리비아 베르베르라고, 프랑스 퇴직기자 책을 읽게 됐어요. 그가 전통적 실크로드 시안서부터 터키 이스탄불까지 8천킬로미터를 걸은 이야기예요. 다 읽어봐도 죽을 고비는 없었어요. 그걸 읽자 마음이 붕 뜬 거죠. 그 코스 빼고 나머지는 유럽, 다른 하나는 중국이잖아요. 문제 지점들이 해결된 거지. 완주를 장담하진 못하겠지만, 다 완주하면 큰 족적이 되겠더라고요. 통일 이슈를 만들어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던 곳에 가보고 싶었어요.”

- 2017년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출발하셨구요. 길은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실크로드죠. 근데 그게 하나의 길만은 아니에요. 터키 중부로 해서 넘어가려 했어요. 거기가 위도가 더 낮으니까 겨울에 견디겠다 싶었던 거예요. 근데 거긴 4천 5천미터 산들이 즐비하다.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 그러는 거예요. 방법을 다시 찾은 게, 위쪽길 흑해 연안으로 가는 거였어요. 지중해성 기후라 겨울에도 온화하다는 거죠. 카스피해 연안도 지나고. 그렇게 겨울을 났어요.”

강명구 씨 유라시아 횡단코스
강명구 씨 유라시아 횡단코스

- 중앙아시아를 관통하고 계신 거잖아요. 그쪽 세계는 어땠습니까?

“투르크메니스탄 지날 때 정말 힘들었어요. 거긴 옛 소련 연방서 독립한지 얼마 안 되는 공산국가잖아요. 지독한 독재국가예요. 그 나라 수도 이시가바트인가 하루 쉬려니까 경찰이 들이닥쳐요. 짐 싸서 나가란 거예요. 패싱 비자란 거죠. 사정사정 했어요. 겨우 하룻밤 더 머물렀는데, 담날 또 와요. 빨리 벗어나라. 다음 도시가 300킬로 떨어진 마리란 곳인데. 그땐 노숙을 해야 했어요. 우즈케키스탄, 카자흐스탄 이런 데서는 교포들, 기업인들 그리고 고려인들도 있고 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갈 때 비행기표 하고, 3개월 버틸 돈만 갖고 출발했어요. 터키까지는 유모차에 짐 싣고 뛰었는데, 그 뒤로 후원회가 결성됐어요. 송영길 위원 부인이 차량 사는 데 보태라고 지원을 해주셨어요. 헤이그서 출발할 땐 파리서 새벽기차 타고온 분이 유로를 한 묶음 주시고. 송인엽 그 분은 코이카서 오래 계셔서 외교관들을 많이 아세요. 국경 넘을 때 큰 도움이 됐죠. 여윤철 교수님, 이장희 교수님 그 외에도 차량 운전을 달마다 바꾸어가며 해주신 자원봉사자들도 고맙죠. 체코 대사관에선 절 불러 이야기도 들어주시고…. 그런 분들이 없으셨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인 게 맞죠.”

그가 유라시아 대장정을 시작한 2017년 9월은 한반도에 전운이 고조되던 때였다. 핵을 완성한 북한에 전방위적인 국제 제재와 압력이 가중되던 때. 작게나마 평화와 통일의 숨길을 뚫고자 했던 게 그의 목표였다. 북한 국경을 넘고, 판문점을 건너 서울로 오려는 그가 이룩한 나비효과였을까? 한발한발 동으로 발을 디뎌갈 때, 한반도에는 만남과 화해의 훈풍이 불었다. 김여정이 평창 동계 올림픽 건으로 남한에 왔고, 그가 중국땅을 달리고 있을 때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능라도 경기장 15만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다음해 북미회담에서의 빅딜도 현실화할 것이란 희망도 널리 퍼졌다. 그런 장밋빛 상황에서, 오히려 북한은 그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어릴 적 김일의 박치기, 왕십리 산과 강 뛰던 기억의 힘

왕십리에서 본 그는 말을 살짝 더듬었고 조금 발걸음이 불편했다. 뇌졸중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 철인도 뇌졸중이 옵니까?

“혈압이 좀 높았었어요. 약 같은 걸 전혀 쓰지 않았어요. 운동으로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거죠. 한 달간 입원해 있었고, 꾸준히 재활하고 있어요. 이런 상태로도 할 건 다 합니다. 지난해는 제주 한라산서 임진강까지 통일종주를 했어요. 베트남 학살 현장서 지낼 위령제에도 가서 종주를 할 계획, 유라시아 철도길 따라서 바이칼호까지 뛰려던 계획도 있어요. 올해도 한라에서 백두까지, 임진각에서 멈추지만, 통일 종주는 여러 단체들과 사람들과 함께 뛰든 걷든 할 겁니다.”

- 어릴 적, 열댓 살 때쯤 끄적이거나 몰두했던 일을, 결국엔 평생 하게 된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까?

“학생때, 난 선생님 말에 주목해 있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대신 상상을 하곤 했어요. 멀리 다른 곳, 다른 나라를 가는 상상. 더 어릴 적에, 그 당시 김일의 박치기가 유명했어요. 만화가게 가서 같이 텔레비전 보곤 했어요. 그리곤 동네 벽돌공장 모래에서 애들하고 레스링 하고 노는 거예요. 거기 흰 벽돌들도 있는데, 그걸 몇 개나 이마로 깨뜨리기도 하고…. 박치기로. 아마 그때 머리가 좀 나빠진 모양이에요.(웃음) 아참, 그때 금호산 응봉산이 정말 산이었어요. 거기서 매미 잠자리 나비 잡고 놀곤 했어요. 또 응봉산 끼고 금호동 로타리까지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달리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장거리였는데…. 길 따라 미사리까지 걸어가기도 하고, 뚝방길도 달리고….”

그는 마라톤문학을 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글로벌 웹진 뉴스로(http://newsroh.com)엔 그의 미국, 유라시아 횡단기가 실려 있다. 꿈은 때로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것 같은 황무지에서도 결국은 씨앗을 내고, 끝내 자라난다. 나이도 삶의 경력도 그 꿈이 자라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그 증거가 내 앞에 있었다. <원동업=성수동 쓰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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