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가 기억할 또 다른 이름 김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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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가 기억할 또 다른 이름 김종분
  • 성동신문
  • 승인 2021.06.1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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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세월이 가르쳐준, 추모에서 일상의 기억으로
엄마 종분의 밥심과 딸 귀정의 진심어린 삶을 돌아보며, 왕십리
왕십리 김종분(왼편)과 성동사람 최창준. 김종분은 늘 거기 그 자리에 있다.
왕십리 김종분(왼편)과 성동사람 최창준. 김종분은 늘 거기 그 자리에 있다.

지난 5월 25일 화요일 저녁 6시 30분,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에 갔다.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날로부터 정확히 30년 전 오늘, 대한극장서 가까운 충무로 진양상가 근처서 한 대학생이 경찰의 토끼몰이로 숨졌다. 성균관대 불문학과 4학년 김귀정 열사다. 

김귀정의 어머니 김종분 여사가 왕십리 행당시장 앞 횡단보도 앞에서 그때로부터(실은 그 일이 있던 시기보다 먼저) 지금까지 30여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오마이뉴스 민병래의 사수만보[2019년 4월 19일자] '내 이름은 김종분, 91년에 죽은 성대 김귀정이 엄마여'를 통해서였다. 기사는 다음처럼 쓰고 있다. 
“기계 운반 일을 하던 남편이 50대 중반에 뇌진탕으로 세상을 등지자 그녀는 노점으로 나섰다. 그때 그녀의 나이 쉰 살이었다. 삼남매는 아직 생활 터전을 잡기 전이었다. 무작정 거리에 나가 좌판을 펼친 곳이 왕십리 행당시장 앞 건널목이었다.”

38년생 김종분이니 나이 쉰 살이면 1988년께다. 김귀정은 88학번이니, 귀정이 대학에 입학하던 즈음이다. 1991년 당시 귀정은 4학년 졸업반, 66년생 백말띠니 스물여섯 살이었다. 2년전 아버지를 잃은 늦깎이 대학생. 

위로 언니와 아래로 남동생을 두었던, 엄마로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다. 무학여고를 졸업한 귀정은 행당동 산동네에 살았다. 귀정의 남동생 여자친구가 기억하는 집은 “마치 청룡열차를 타고 오르는 것 같은 곳”이었다. 오전에 벌어 저녁의 쌀을 사고, 하루를 벌어 다음날의 연탄을 사는 가난한 집이, 귀정이네의 사정이었다. 4학년 졸업반 귀정은 왜 도서관이 아니고, 학원도 아니고, 아스팔트 시위대 안에 있었을까? 

다시 대한극장. 다큐 <왕십리 김종분>은 김귀정 열사 30주기 추모 다큐멘터리였다. 아직 완성본이 아니라 부지런히 고치고 또 고쳐서 하반기엔 더 많은 이들과 만날 계획이다. 책 <귀정, 추모에서 일상의 기억으로>이 나누어졌다. 각기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균관대 동문들이 나와 30년 전의 김귀정과 지금의 김종분 여사와 그 가족들과 뜨겁게 연대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30여년의 긴 세월 동안 이들을 묶어두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붙잡아야 할까?

엄마 김종분의 말 “밥 먹고 가!”

행당시장 정문쯤 앞엔 횡단보도가 있고, 그 옆 노점이 김종분의 또다른 집이다. 할머니 친구들이 있는 곳, 집보다 더 오래 머무는 곳. 거기서 밤을 지새는 날도 여러 날들. 왜 그곳을 벗어나지 않을까? 

다큐에서는 그 이유를 짐작케 하는 사연이 나온다. '그 남자'는 긴가민가하고 그곳을 찾아왔다. 30년 전, 김종분 여사에게서 빌린 돈 3만원을 갚으려는 중이다. 이자를 '3만원' 붙여서! 엄마 김종분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은 지 오래. 사래를 치는 종분에게 남자는 억지로 돈을 쥐여준다. 이제는 늙어버린 그 남자에게 종분이 건넨 말은 “밥 먹고 가!”였다. 

김종분이 언제나 거기,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곳은 사랑방이요, 우물 같다. 귀정이 다닌 무학여고의 동창들이 그곳으로 찾아온다. 이제는 주부가 되어버린 그들은 파 한 단을 사고는 만원짜리 몇 장을 어머니 주머니에 강제로 꽂아주곤 간다. 성균관대 동문들도 설날과 어버이날과 그리고 종분의 생일날 잊지 않고 찾아온다. 그때마다 엄마 종분은 또 말한다. “밥 먹고 가!”

귀정의 기일이 되면 귀정의 묘를 찾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귀정이 산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천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수십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묘를 찾곤 했다. 그들이 먹을 밥을 해 차에 싣고, 학생들을 수발해 온 것이 귀정이네 식구들이었다. 새롭게 귀정이네 식구가 된 며느리까지 마음과 손을 보태어 온 지 30여 년. 그 밥을 '탐욕스럽게 먹고, 그 밥맛을 잊지 못하고 다시 엄마를 찾는다'고 그의 동문들이 고백했다. 그 밥을 먹임으로써, 먹음으로써, 한 사람 귀정을 잃은 엄마는 수천의 다른 아들과 딸을 얻었다. 딸은 죽었지만 다시 더 많은 아들딸이 되어 돌아온 것이라고, 엄마 김종분은 말했다.

귀정, 추모에서 일상의 기억으로.
귀정, 추모에서 일상의 기억으로.

귀정의 말 “결코 혼자 호의호식하지 않겠다”

귀정의 한자 이름은 귀할 귀(貴), 우물 정(井)이다. 귀한 우물.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 물을 기억하고, 그 우물에 모인 이들이다. 귀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귀정은 알바를 하며 학업을 지속했다. 남동생이 기억하는 작은 누나 귀정은 “집에서는 늘 잠을 자는 사람”이었다. '학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가끔씩은 '나의 처지와 환경들이 원망스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운동과 학업에 열심이고자 힘을 썼던 이가 귀정이었다. 귀정은 이렇게 뒤에 덧붙여 적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의 이러한 원망들이 잘못된 생각이고, 철저하게 나의 시간들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안다. 매일 매일의 생활이 게으름과 변명으로 얼룩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고치려는 나의 노력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 1990년 2월 7일의 일기 - 

학교에서 귀정은 동창생들의 언니요, 누나였다. 나이가 많은 이가 학생 운동 모임에서 꾸준히, 열심이기가 쉽지 않은데, 귀정은 4학년 그때까지 한결같았다. 1991년 5월 25일의 그날, 충무로에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귀정이 그 시위에 참여할 때, 집에서 치마를 청바지에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섰다. 잠을 자다가, 엄마에게 깨워달라고 부탁한 그날이었다. 

귀정은 심산연구회 멤버[심산 김창숙은 성균관대를 설립한 초대총장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으로 출마했다. 귀정의 영정으로 쓰인 그 단아한 흑백의 한복 사진이 그 당시 사진이었다. 귀정이 죽으면서 어머니 김종분은 유가협[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회원이 되었겠는데, 귀정은 이미 유가협 식구들에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1990년 성균관대 대동제에서 유가협의 기금 마련 주점을 할 때, 거기 귀정이 있었다. 연세대 강당의 4월 17일 노래공연 <어머니의 노래> 공연에도 귀정은 유가협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귀정에 대한 기억과 귀정에 대한 연대는 죽어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귀정의 삶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 책 <귀정, 추모에서 일상의 기억으로>가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귀정에 대한 기억이요, 기록이다. 그들은 귀정이 꿈꾸고 이루지 못한 삶과 꿈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사람은 섬이 아니고, 이어져 있음으로서 사람은 생을 이룬다. 

1991년 수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했고, 2021년 30년이 지났다.
1991년 수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했고, 2021년 30년이 지났다.

청계천 8가 혹은 왕십리,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2021년 5월 25일, 상연회를 마치고 추모공연이 있었다. 거기서 '청계천 8가'-천지인 작사 작곡/소리사랑 노래-가 불려졌다. '귀정이가 가고 난 후에도 땀냄새 가득한 왕십리, 그 자리를 지키신 우리의 어머니 김종분 여사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라고 쓰여있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파란불도 없는 /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 물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 어느 핏발 솟은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 어느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도 /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 어느새 텅빈 거리여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왕십리를 지날 때, 나는 무학대사의 그 왕십리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김소월의 왕십리를 조금, 벽파 이창배의 왕십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는 '왕십리 김종분'이 있다. 걸어가 거기 사람을 만나, “어머니, 구운 가래떡 좀 주세요. 거기 옥수수와 콩도 주세요!” 해야지 싶다. 집에 와 밥을 해먹으며 기억해야지. 귀정의 삶과 그의 생각과 우리 곁에 여전히 그의 뜻을 나누고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원동업 성수동쓰다 편집장
<3bigpictu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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