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은 지명으로 살아있는데 전관원은 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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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은 지명으로 살아있는데 전관원은 왜 사라졌을까
  • 성동신문
  • 승인 2021.06.25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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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26) 전관원 터

조선시대 한양의 4대 원(院,숙박시설)이었던 전관원(箭串院)

중랑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전관원 옛 터. 동그라미 부분. 오른편은 한양대 캠퍼스. 옛날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전관원 자리는 사람들이 들고나는 곳이다. 출근 시간이 살짝 지났음에도 성동교 위에는 차량으로 가득하다. 성동교 오른쪽은 지하철 2호선 철교다. ⓒ서성원
중랑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전관원 옛 터. 동그라미 부분. 오른편은 한양대 캠퍼스. 옛날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전관원 자리는 사람들이 들고나는 곳이다. 출근 시간이 살짝 지났음에도 성동교 위에는 차량으로 가득하다. 성동교 오른쪽은 지하철 2호선 철교다. ⓒ서성원
전관원 표지석, 1988년에 세움. 이런 표지석이 없다면? 서울시와 성동구는 역사찾기를 꾸준히 했으면 좋겠다.ⓒ서성원
전관원 표지석, 1988년에 세움. 이런 표지석이 없다면? 서울시와 성동구는 역사찾기를 꾸준히 했으면 좋겠다.ⓒ서성원

○ 소재지: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 189 (행당중학교)

지금의 행당중학교 자리에 전관원(箭串院)이 있었다. 이태원을 알지만 전관원은 잘 모른다. 성동구 사람들이 그렇다. 성동구민이라면 전관원 정도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전관원이 행당동에 있었으니까.

◆ 전관원은 어떤 곳이었나

이태원, 홍제원, 보제원 그리고 전관원은 한양의 4대 원(院)이었다. 그중에 이태원과 홍제원은 현재 지명으로 남았다. 이태원은 특히 유명하다. 그런데 전관원은 왜 그 흔적이 사라졌을까. 왜 지명으로도 남지 않았을까. (이태원 외에 지명으로 남은 원이 있다. 남양주 퇴계원, 경기도 장호원, 충청도 조치원, 북한의 사리원 등등)
먼저 전관원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자.

조선 시대에도 사람들은 오갔다.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길이 있었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말을 타고 다녔겠지만, 백성들은 걸어서 다녔다. 길이 멀면 숙박도 한다. 나라에서 만든 숙박시설을 원(院)이라고 했다. 나랏일을 하는 이들이 말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역(驛)이다. 원은 역과 같이 있었다.

광희문 밖에 위치했던 전관원(箭串院)은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과 함께 도성 밖의 4대원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관영이었으나 언제부턴가는 일반 나그네들도 묵어가던 민영 숙박업소로 바뀌었다.
그런데 한양을 코앞에 두고 왜 이런 숙박시설을 둬야 했을까. 특히 전관원은 나루를 건너 왔지만 도성의 문이 닫혀서 들어가기 어려운 이들과 이른 새벽에 나루를 건너려는 이들이 묵어갔다고 한다.

전관원 터인 행당중학교 바로 앞은 한길이다. 한길 건너면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이다.ⓒ서성원
전관원 터인 행당중학교 바로 앞은 한길이다. 한길 건너면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이다.ⓒ서성원

◆ 전관원의 모습을 그려보자

원의 모습과 약간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는 객주. 김준근 19세기말 기산풍속도첩 중 객주(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의 모습과 약간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는 객주. 김준근 19세기말 기산풍속도첩 중 객주(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관원의 위치를 보자. 중랑천을 코앞에 두고 있다. 중랑천은 한천(漢川) 한내로 불렸다. 강원도나 경기도 동쪽에서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은 광나루로 건너왔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은 뚝섬나루로 건너왔다. 이들은 살곶이다리를 건넜다. 이들은 광희문으로 들어가거나 흥인문(동대문)으로 들어갈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 질 무렵 살곶이다리를 건너온 사람들은 초경 삼점(밤 10시경) 전에 8대문을 통과하는 게 어렵다. 그러면 숙박을 해야 한다. 그곳이 전관원이었다. 반대로 강원도나 충청도 방면으로 새벽길을 떠날 길손들도 전관원에서 묵었다.

보부상 권용정 작, 18세기 추정, 간송미술재단소장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부상 권용정 작, 18세기 추정, 간송미술재단소장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관원은 경치가 좋았다. 앞으로는 한천(중랑천)이 흐르고 나지막한 북동쪽 언덕에는 마조단이 있었다. 마조단이 있는 언덕에 올라가면 조선 최고의 기술로 만든 기다란 살곶이다리(전관교, 제반교)도 볼 수 있었다. 살곶이목장(전관목장, 箭串牧場)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남으로는 눈을 돌리면 응봉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응봉산 아래 입석포는 저자도(楮子島)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 전관원에 밤이 오면

한양을 자주 들락거리는 나그네는 일찍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처음으로 한양 땅을 밟게 될 길손들이다. 이들은 한양으로 오기까지 여러 날 걸었다. 엎어지면 코 닿은 곳까지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한양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궁궐은 얼마나 크고 멋질까, 숭례문은 또 얼마나 높을까. 여러 날 참아왔지만 이런 날 술 한잔 안 하고 어떻게 넘기랴. 달 밝은 유월의 여름밤이다. 얼굴 붉은 한 사내가 웃는 낯으로 말한다.

“다리가 어떻게나 넓은지, 놀랐구만유. 다리 누가 놨대유?”
“살곶이다리요? 가르쳐 줄까요, 말까유.”

다른 길손이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그러자 다리를 누가 놨는지 물었던 사람이 말한다.
“촌놈 속이면 벌 받아유.”

이러면서 코부터 그러쥔다. 한양 나들이하는 그에게 누군가 말했으리라다. 한양가면 눈 뜨고 코 베인다고. 한양이 가까워지자 그는 벌써 코를 단속하는 것이다.
어디선가 간드러진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도 함께 들린다. 다른 숙소 건물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전관원에는 건물이 여러 채다. 잠자는 숙소 건물을 벗어난 곳에 술청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여자들 노랫소리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건물은 제법 번듯한 기와집이다.
젊은 축에 드는 몇은 달구경 한다면서 한천으로 내려갔다. 유월이라 물이 깊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관원의 밤 풍경이 젊은이들을 꼬드겼다.      <서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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