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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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으십시오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2.06.2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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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시조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강남문학회이사. 저서로 산문집 『피아노 치는 시인』 등 3권. 시조집 『얼레와 어금니』 등 3권. 양천문학상, 『현대시조』좋은 작품상 등 수상
시조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강남문학회이사. 저서로 산문집 『피아노 치는 시인』 등 3권. 시조집 『얼레와 어금니』 등 3권. 양천문학상, 『현대시조』좋은 작품상 등 수상

영성연구가인 켄 윌버(Ken Wilber)는 인간 의식의 발달 단계를 다음 4단계로 정리하였습니다. 첫째 페르소나 수준은 인격의 일부인 페르소나(persona 즉 가면, 외부로 드러난 인격)하고만 나를 동일시하고, 스스로 원하지 않는 영역인 나머지 전부(그림자, shadow)를 나 아닌 것으로 배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자아 수준으로 그의 정체성이 전 유기체를 포함하지 못하고 유기체의 일부분인 정신(ego)만을 나라고 여기는 수준입니다. 세 번째는 전유기체 수준으로 자신이 주변 환경이나 우주 전체와 일체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몸과 마음이 포함한 유기체일 뿐이라고 느끼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초개아 수준(합일 수준)은 의식이 개체의 측면을 넘어선 어떤 과정이 내부에서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조화로운 전체(소우주)가 되는 우주의식의 차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단계 중에서 첫째인 페르소나-우리들 각자가 쓰고 있는 가면. 우리가 나타내는 자아(ego)-가 의식 발달의 가장 유사한 근간이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보통 소유냐 존재냐 하는 문제에 부딪치면 소유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소유는 보이는 개체이지만 존재는 경험과 관련되는데 이 경험은 원천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경험은 따라서 인간은 인격이라는 외면적 가면을 쓰고 그 그림자는 벗어버리는 이중성을 탯줄을 끊을 때부터 안고 세상에 나왔고 자기의 분신인 그림자-존재-는 가급적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더우기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자아의 발현은 철학을 모르는 범인에게는 그런 생각을 갖는 것조차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현실론자라고 하나요? 살아가기도 벅찬 세계에서 우주를 들여다 본다는 것은 세속인에게는 사치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실 철학은 인간이 가야할 고민을 벗어나려는 데서 출발하였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만인의 성경책이지요. 그러나 현대인에게 이 바쁜 세상에서 사유하고 포용하는 여유를 가질 만큼 삶이 한가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소시민은 철학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길 뿐 삶의 기본으로 삶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주가 아닌 자아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대학 다닐 때 철학 강의를 듣고 졸업 후 살기가 바빠서 철학이 주는 메시지와 거대한 담론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철학에 두고 출발한다면 생활이라는 근본적인 삶의 측면에서 쫓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니힐리즘에 빠져 자살 같은 고민으로 밤을 새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인 영원한 경쟁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자제(自制)와 고민과 반성을 통해 삶을 더욱 우울하게 만듭니다.

철학은 기본적인 인격의 모태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이자 진리이지, 프라그마티즘의 관점에서 보면 배부른 소리하는 쏘크라테스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일면 시장경제의 함정이자 지나쳐 버리기 쉬운 간이역 같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고민을 하는가. 그것은 자신을 포함한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철학은 물과 기름 같아서 현실적으로 융합하기가 힘듭니다. 철학을 생각할 만큼 세상은 우리에게 한가로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근본적인 삶의 성찰을 배경으로 깔고 사회를 헤쳐나갈만큼 현대인은 한가롭지 못한 것입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E. 프롬은 페르소나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반면 살아있는 인간은 전혀 묘사할 수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나, 나의 모든 개성, 지문처럼 나만이 갖고 있는 나의 본질은 감정이입에 의해서도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둘이 완전히 같은 경우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수 십장의 산문으로 쓸 있지만 그 그림에 나타나는 미소는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도 다른 사람의 흥미·정열·삶에 대한 애착·미움·자기도취는 물론 다양한 얼굴표정, 걸음 거리, 포즈, 억양 등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각박하고 정치가 어지럽고, 서로를 불신하고, 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은 모두 인간성찰의 기본인 존재, 즉 철학의 무지와 철학의 빈곤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외형적인 페르소나에 삶의 중심을 두고 자신의 어두운 단면인 그림자는 가급적 감추려 하고 있습니다. 즉 존재를 표한 할 수 없고 보이는 소유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데는 매스컴의 잘못도 크다고 봅니다. 광고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선정적인 드라마나 억지로 웃기는 유머극장 등이 횡행하는 것은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공장입니다. 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조그만 사건도 흥미위주로 제목을 뽑아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철학의 빈곤에서 오는 것입니다. 존재라는 차원 높은 철학이 결핍된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 등은 사회적 구조에도 문제가 있지만 인격의 근저가 되어야할 최소한의 철학, 그 상위 개념인 존재의 배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라는 다큐형식의 영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인격형성의 근간이 되는 철학을 거기서 본 것입니다. 마지막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저승과 이승으로 갈라서는 그 교차점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그 다큐가 담고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적 성선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매스컴에서 인간의 태생적인 맹자의 성선설을 많이 다루면 사회는 그만큼 선하고 착한 감정이 사람의 근저에 깔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양프로에 더 많은 영상과 지면을 할애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갑질" 문화도 철학의 빈곤에서 오는 것입니다. 부모나 할아버지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재벌 3세대가 "갑질"을 계속하면 그 재벌은 오래가질 못합니다. 정신 똑 바로 차려 회사를 운영해 가지 않으면 "3대 가는 부자는 없다"는 속담이 불행하게도 그 재벌에, 또는 갑부들에게 현실로 다가 올 수 있음을 웃으게 소리로 웃어넘겨서는 안 된다. 인격이라는 가면만 쓰지 말고 그림자도 함께 동행하는 자아의식의 부활과 심신의 일체화가 시급한 실정입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태어났을 때는 완성되지 않은 밀납과 같다'고 했고,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긍정적인 것은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해 온 결과로서 인류가 스스로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보다 평화롭게 되었다고 하는 일말의 증거도 없습니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림자와 함께 가지 않는 삶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자기기만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맹자의 성선설이 맞는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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