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의 영혼, 이중하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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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영혼, 이중하는 살아있다’
  • 강서양천신문사 강혜미 기자
  • 승인 2023.01.0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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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관료로 청과 간도 영유권 분쟁에서 활약한 이중하(李重夏, 1846~1917) 선생의 외교 업적을 재조명하는 책이 발간돼 주목된다. 

정권수 작가가 쓰고 해드림출판사·강남신문사가 함께 펴낸 『간도의 영혼, 이중하는 살아있다』는 조선 후기 최고의 외교관이었던 이중하 선생을 통해 대한민국 고토(古土) ‘간도’를 어찌 되찾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이중하 선생은 1846년에 태어나 1882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안변 부사로 재직한 1885년 토문 감계사로 임명돼 청나라와의 국경 회담(제1차)에 조선 대표로 참여했다. 2년 뒤 재개된 제2차 회담에서는 조선 측 협상 대표로 나섰다. 

당시 간도 지역에는 조선인 수가 늘어나 청나라와의 마찰이 빈번했다.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겠다며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청나라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하며, 그곳에 사는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국경 회담을 요청했다. 

회담에서 이중하 선생은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돼 있는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임을 주장했다. 반면 청나라 대표는 두만강 상류 물줄기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서두수 국경론을 제기했다. 양측의 주장은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중하 선생은 “비면(碑面)에 봉지(奉旨) 글자는 즉 강희 성조(康熙聖祖,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성지(聖旨)다. 훤히 빛나는 새김(鐫刻, 비석)은 옛날(千古)을 증거할 수 있는데, 지금 논한 바 여파(餘派)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그 옳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며 백두산정계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수사학에서 강조하는 생각의 틀 관점에서 보면, 청국 대표는 ‘먼저 강이 있고서 뒤에 비석이 있었다’는 말로 산천을 국경으로 삼는 ‘국경 획정의 일반론’을 통해 이중하 선생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중하 선생은 청국 대표의 논리 체계를 청나라 황제에 대한 봉건적 충성심의 기준으로 공략했다. 정계비에 새겨진 ‘봉지(奉旨, 임금의 명령을 받듦)’라는 글씨 하나 때문에 정계비는 단순한 비석에서 황제의 의사로 그 의미가 변화됐고, 이후 청국 대표는 정계비의 내용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1887년 재개된 국경 회담에서도 주변 여건은 이중하 선생에게 불리했다. 이 선생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국경 획정은 회담의 대상이 아니라고 천명했다. 

청나라 대표가 이 선생을 윽박지르며 타협을 종용하자, 이 선생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강토는 축소할 수 없다”고 말하며 국경 회담에 임하는 신하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의 이 같은 결사적 노력은 조선인들이 북간도 지역에 터를 잡고, 일정 기간 청국 관원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조선족 사회 형성의 기초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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