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정국과 키클롭스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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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정국과 키클롭스의 교훈
  • 서울로컬뉴스
  • 승인 2016.11.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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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범/세종사이버대 교수/국민경제정책연구소 소장
김상범/세종사이버대 교수/국민경제정책연구소 소장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괴물이다. 워낙 힘이 세고 사나우며 식탐이 많고 자신의 한계를 모른다. 눈이 하나인 괴물답게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이 곧 법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렇게 외눈박이 괴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남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괴물 키클롭스 폴리페모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사랑스러운 부하를 동굴에 붙잡아 두고 먹어치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동굴을 빠져나갈 방도를 찾는다. 동굴입구는 괴물만이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돌로 막혀있다. 괴물의 힘이 아니고서는 빠져나갈 수 없다.

이 괴물에게 술을 먹인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성은 아무 것도 이름은 아니야, 즉 '아무 것도 아니야'로 말하고, 괴물이 잠들기를 기다린다. 부하들과 더불어 잠든 괴물의 단 하나 뿐인 눈에 올리브나무칼을 꽂는다. 좀 더 깊이 찌른다면 괴물을 완전히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괴물의 힘을 이용하고자 눈만 살짝 찔렀다. 모름지기 통치자나 조직의 리더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적장의 목을 완전히 베어버리는 것보다, 그를 내편으로 만들어 활용할 줄 아는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통치자의 주변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면 그들의 빈자리는 아첨꾼으로 채워진다.

괴물은 고함소리를 들은 다른 키클롭스가 동굴로 왔다. 이 키클롭스는 누가 너를 헤치고 있는지를 물었다. 폴리페모스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한다. 다른 키클롭스는 그 소리를 듣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통치지나 리더는 상황을 예견할 수 있어야 했다. 만약 오디세우스란 이름을 솔직하게 그냥 내뱉었더라면 그와 그의 부하들은 또 다른 위험의 상징인 다른 키클롭스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괴물을 만났을 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 살 수 있다는 호메로스의 은유를 배우게 된다. 길가의 죽은 개는 아무도 걷어차지 않는다. 요란하게 짖는 개가 사람들에게 차이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수렁으로 몰고 간 최순실이 적당한 시기에 욕심을 접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았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영원히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키클롭스 폴리페모스는 키우던 양들을 동굴에서 내보내 들판으로 나가 풀을 뜯도록 해야 했다. 장님이 된 폴리페모스는 동굴입구의 거대한 돌을 치웠다. 그리고는 양의 등을 하나씩 만져보고 확인한 후 내보냈다.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양의 털을 뒤집어쓰고 괴물을 완벽하게 속여 무사히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외눈박이 괴물은 언제나 한 가지 측면만을 본다.

양의 털을 확인한 괴물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의 잘못은 단지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통치자는 자신의 책무를 그르치게 된다.

우리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괴물에 잡혀 고생했지만, 괴물의 힘을 이용하여 역경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자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사히 빠져나온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에게 '어리석은 키클롭스여 내 이름은 오디세우스다'라고 조롱하고는 배를 타고 도망간다. 이를 들은 폴리페모스는 자기의 아버지인 바다인의 신 포세이돈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한다. 오디세우스가 탄 배는 난파되고 10년의 고생길을 하게 된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해치는 것은 불화와 불행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마라톤전쟁도 자존심의 상처에서 시작된다. 스파르타 왕은 거대제국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보낸 특사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그들을 우물로 떨어뜨려 죽이게 된다. 크세르크세스가 복종을 원한다고 하자, 왕비는 한마디 거들게 되고 이를 들은 사신은 여자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핀잔을 준다. 왕은 자기가 사랑하는 왕비에게 무례한 짓을 한 사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마라톤전쟁의 시초가 되고 영화 300의 모티브가 된다.

우리의 통치자들은 얼마나 많이 상대편 지도자에 대해 자존심을 짓밟는 언사를 일삼아 왔는가? 역린을 건드리듯이 상대방을 조롱하는 지도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오디세우스가 승리 후에 10년간의 고생을 겪어야 했듯이 그들의 인생에서 또 다른 패배를 예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통치자가 당하고 있는 조롱은 그가 보냈었던 조롱의 메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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