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길수 한국OB축구회 회장
상태바
최길수 한국OB축구회 회장
  • 강서양천신문 강혜미 기자
  • 승인 2018.03.06 1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가대표·감독·국제심판 ‘영원한 축구인’

올해 초 한국OB축구회 회장에 최길수 전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이 취임했다. 한때 ‘우승 제조기’로 불린 그는 실업팀 축구선수에서 코치, 감독, 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 국제심판 등 다양한 이력을 지녔다. “인생을 축구로 시작해 축구로 마무리하고 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그에게서 푸른 그라운드를 누볐던 젊은 날의 그의 열정들이 느껴졌다.

 

최길수 한국OB축구회 신임 회장은 1960~70년대 당시 축구스타였던 김 호, 김정남, 이세연, 이회택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어깨를 견주며 수비수(풀백)로서의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 축구선수였다. 경희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0년에는 국가대표 1진 청룡팀에서 활약하며 메르데카컵·킹스컵 단독 우승, 아시안게임 공동 우승을 일구었으며, 71년(기업은행 소속)에는 박스컵 공동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실업팀인 기업은행에 입단해서는 선수와 코치, 감독을 지내며 97년까지 총 27회의 우승을 이끌어 ‘우승 제조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당시에는 감독을 맡고 있더라도 여유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심판으로도 뛸 수 있었다. 심판으로서의 자질도 훌륭해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과 한국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 10년간 국제심판도 지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국내에선 유일하게 세계 24명 안에 선발돼 지명심판으로 올림픽 무대에도 섰다. 올림픽 축구 주심은 한국 축구 1백 년 동안 최길수 회장과 故차경복 성남일화 감독(’84 LA올림픽) 2명뿐이다. 1992년에는 국가대표 감독으로 일본 아시안컵 예선도 지휘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태극마크를 달고 제가 국가대표 선수로 뛸 때보다는 1987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인도 DCM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우리 팀이 우승했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습니다. 당시 저는 기업은행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기업은행이 최초로 나간 국제대회에서 단일 실업프로팀으로 출전해 첫 우승을 거둔 의미 있는 날이었지요. 굉장히 비중 있는 국제대회에서의 우승이었던 데다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좋은 결실로 이어졌고, 국위선양을 했다는 데서 모두가 크게 기뻐했습니다. 저 역시 그 모습을 보면서 무척 보람을 느꼈고요.”

최길수 회장은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올림픽 축구 심판 등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냈지만, 그보다도 지도자로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선수들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그날이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1971년 5월에 열린 제1회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 축구대회 우승 기념사진(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 호, 김정남, 정규풍, 김기호, 김창일, 박병주, 이회택, 최길수, 박이천, 이세연, 최재모)

축구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재차 묻자 그는 연신 손을 내저었다. 오래 전 일이고 특별히 자랑할 것도 없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그의 휴대전화 속에 꽁꽁 숨겨둔 과거 그의 시간들을 공개했다. 제일 먼저 보여준 흑백의 빛바랜 사진 속에는 왕년의 스타들이 나란히 앉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1971년 5월, ‘제1회 박대통령컵(박스컵) 국제축구대회’ 우승 멤버들입니다. 다들 20대 청년들이니 그라운드를 날아다닐 때였죠.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김 호, 김정남, 이회택이 다 그때 함께 뛴 선수들입니다.”(웃음)

그가 꺼내든 또 다른 추억은 당대에 펠레에 버금가는 실력과 인기로 명성을 떨쳤던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축구선수이자 영웅이었던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 다 실바 페헤이라(1942~2014, 당시 ‘유세비오’로 불림)다.

1970년 에우제비오는 서울운동장(이후 동대문운동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지금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설립)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인 청룡, 백호팀과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2진격인 백호팀과의 경기 중 30m가 넘는 장거리 프리킥을 엄청난 감아 차기로 성공시키면서 ‘바나나 킥(공을 살짝 비껴 차서 공이 바나나처럼 휘어 날아가게 되는 현상)’의 진수를 보여줬다. 청룡팀과의 경기에서도 에우제비오는 한 골을 기록했다.

“세계적인 영웅과 한 그라운드에서 같이 공을 찼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요. 이제는 전설로 남은 사람이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흥분되고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다 보면, 내가 축구에서 이 정도의 이정표는 세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16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심판으로 활약했던 모습

한국 축구의 뿌리, 원로들 위해 최선

최길수 회장은 지난 1월16일, 선거를 통해 제12대 한국OB축구회 회장에 선출됐다. 70년대 그와 함께 활약한 이세연 전 축구선수와의 경선에서 전국 대의원 23명 중 15명의 지지를 얻어 회장직에 올랐다.

한국OB축구회는 축구선수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이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40세 이상이면서 고교 졸업 시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대한축구협회에 등록이 된 선수만이 한국OB축구회에 들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이자 저마다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며 토대를 닦아온 이들이다. 지금의 홍명보, 박지성, 손흥민도 한국 축구의 기반을 만들어 온 원로들이 있어 가능했다.

“대한민국 최고 단체의 수장이 돼 감사할 따름입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2년의 임기 동안 정직하게 업무를 수행할 계획입니다. 원로들의 복지 증진과 조직의 화합 및 결속, 김용식배 시니어 축구대회·전국 지회 대회 등 OB축구회가 실시해 온 사업들의 순조로운 추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대한축구협회 발전을 위해서도 선배로서 노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국내에 다양한 스포츠 종목이 있지만, OB모임은 축구에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더욱 최 회장은 축구인으로서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행동과 말을 항시 조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OB축구회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회장 취임 후에는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축구회관으로 매일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다. 후배들을 위한 크고 작은 경기를 찾아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최길수 회장은 42년째 강서구에 거주하고 있는 구민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는 강서구 생활체육에 20년 이상 자문 역할을 해 왔으며, 여성축구교실, 어린이축구교실 감독을 지낸 데 이어 현재는 강서구축구협회 50·60·70대 상비군 감독과 자문위원, 강서구체육발전위원회 전문체육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역에 있으면서 축구선수로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한국OB축구회장으로서 봉사의 기회로 생각하고 원로 선후배들과 지역사회에 제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