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토박이 황천우의 노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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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토박이 황천우의 노원이야기
  • 노원신문 백광현 기자
  • 승인 2016.12.0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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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은 교통요충지가 아니었다!

최근 거리를 지나다 가로등을 뒤덮은 안내판을 살피면‘노원의 역사, 말’이란 타이틀로 노원을 교통의 요충지로 또 말과 연관시키고 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일전에 이야기했던, 조선시대에 존재했었던 노원역이 노원에 존재했었다고 믿고 그렇게 표현한 듯 보인다.

그러나 앞서도 밝혔지만 지난시절 노원역은 현재의 노원이 아닌 제기동과 마장동 정도에 있었다. 그래서 마장동의 동명이 그리 정해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원역이 노원에 있었다고 믿고 그를 당연시한 결과로 보인다.

여하튼 이와 관련하여 차근히 살펴보자. 먼저 교통요충지라는 주장에 대해서다. 교통의 요충지라 함은 교통측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소를 지칭한다.

그러나 노원은 교통에 관한한 요충지는커녕 중간 기점도 아닌 종점이었다. 즉 노원으로 들어오는 길은 있었으나 나가는 길은 없었다. 굳이 다른 지역으로 나간다고 한다면 반드시 중랑천을 건너야했다.

혹시라도 현재의 동일로를 염두에 두고 그리 표현했을 수도 있으나 동일로는 1970년 초반에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비상시 전투기 활주로로 활용하기 위해 건설한 도로로 이 길이 노원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최초의 도로다. 다만 과거에 금강로(金剛路)라고 해서 공릉동과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인 담터 사거리 주변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에 이르는 도로가 있었다.

다음은 말과 관련해서 살펴보자. 역마를 관리하는 노원역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에서 말을 결부시켰으나 노원은 결코 말과 연결지울 수 없다. 농사와 말이란 두 단어만 얼핏 살펴보아도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노원의 들판을 마들이라 할까. 이를 위해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일전에 이야기했던, 녹천(월계동)에 터를 잡고 후학을 배출했던 김창흡의 제자인 홍중성(洪重聖, 1668~ 1735)이 노원별서(蘆原別墅, 노원의 농막)에서 읊은 시 중 한 부분을 살펴본다.

‘들판에 뽕나무와 삼은 세 오솔길 열었다 桑麻野外開三逕(상마야외개삼경)’

이를 살피면 노원 들판에는 뽕나무와 삼(뽕나무과의 한해살이풀)이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마들의‘마’는 馬(마, 말)가 아닌 麻(마, 삼)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기에서 간략하게 지적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심결에 오류를 진실로 착각할 수 있다. 모쪼록 관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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