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크리스마스’ 6.25전쟁과 흥남 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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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크리스마스’ 6.25전쟁과 흥남 철수작전
  • 관악신문
  • 승인 2022.03.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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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배 순복음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황준배 순복음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최근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 국제적인 전쟁 참상을 지켜보며 우리나라의 6.25전쟁이 떠올랐다. 결코 남의 나라 사건도 아닌, 기억을 소환하는 과거사만도 아닌 현재적 전쟁 양상이다.

푸틴, 러시아의 속내는 화전양면작전’. '크림반도의 영속화'돈바스 등의 지역 독립인정’(이라 쓰고 사실상 러시아에 흡수)이 관철되지 않는 한 전쟁은 계속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비극적인 전쟁이다. 하루 속히 전쟁이 종결되고,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고 평화가 깃들 게 되길 기원한다.

전쟁의 비극과 기억, 아직도 한국의 6.25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분단국가로 현재도 휴전상태, 즉 준전시 상태이다. 전쟁 가운데도 인간의 생존을 향한 투쟁, 희망과 기적은 존재한다. 살아남아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흥남철수작전은 유명한 역사적 기록이다. 이 사건을 기적의 크리스마스라고도 불린다.

 

영화 국제시장은 이 스토리를 영화화 한 것

대중가요인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에 그 현장의 생생함과 먹먹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흥남철수작전은 군군과 미군, 연합군이 북진을 계속해서 조국통일을 앞두고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서 불가피하게 해상철수를 감행한 작전이다. 당시에 3사단 백골부대는 국군 중에서는 최선봉에서, 최북단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그 결과 국군은 전선이 북상하여서 압록강 진격의 육군 6사단, 평양입성의 육군 1사단이 그 전략적 결과로 전공을 세우게 된다.

1950101, 국군 3사단 23연대가 양양군 기사문리에서 최초로 38선을 돌파하게 된다. 이 날이 현재 국군의 날기원이다. 그 부대가 전설의 백골부대인데, 최선봉에서 두만강 근처인 한·만국경까지 진격했다. 이 시점에 중공군이 대규모로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된다. 여기에 군인과 시민들이 함께 자유를 찾아서 남한으로 피난을 온 과정이다.

 

기네스북기록, 3일간의 긴 항해와 14천여 명의 구조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목숨을 건 사투 끝에, 3일간의 긴 항해를 거쳐서 1225일 크리스마스 날, 거제도 장승포에 14천여 명이 도착하게 된다.

14천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단일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가 되었다고 한다.흥남 철수자들의 많은 수가 부산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은 이 스토리를 영화화 한 것이다.

국제연합사령부는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24일에 대한민국 육군이 평양에서 철수하고, 이어 126일에 북한인민군이 평양을 수복하자, 1950128, 흥남철수 지시를 내렸다. 1215, 미국 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장진에 머물렀던 미국 1해병사단도 1224일에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1950101,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한 국군

1950101,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한 국군 제1군단은 북한 공산군에 대한 추격을 계속하여 11월 중순에는 그 예하의 수도사단이 청진을, 3사단(백골부대)이 합수를 각각 점령했으며, 특히 제3사단의 일부는 두만강 연안의 혜산진에 돌입하여 미 제7사단과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국군은 한·만 국경선까지 북진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다시 후퇴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특히 장진호 전투를 통해 중공군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혹한의 날씨에서 더 이상 전투를 치르기가 힘들었던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결정하게 된다.

인해전술로 남하한 중공군은 원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육로는 완전히 차단된 상황에서 철수작전이 떨어졌다. 다행히도 중공군은 인해전술 외에는 열악한 장비와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제공권과 해상권은 여전히 유엔군의 손에 있었다.

국군보다 한 걸음 뒤늦게 원산에 상륙한 미 제10군단도, 그 예하의 해병 제1사단으로 하여금 장진호 쪽을 공격하게 하고 제3사단을 예비대로 확보하는 한편, 이원(伊院)에 따로 상륙한 제7사단을 혜산진 쪽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11월 말, 불법 개입한 중공군이 전면 공세를 감행하고 나오자 국군과 유엔군의 각 부대들은 험준한 산간계곡에서 포위망을 가까스로 벗어나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군 제3사단(백골부대)1210, 성진을 출항

3사단(백골부대)가 부산으로 떠난 다음, 이 지역에 남은 미군 3개 사단과 국군 수도사단은 흥남에 집결하여 미 제10군단의 지휘 아래 철수를 하게 되었다. 중공군 제9병단 예하의 5개 사단과 북한 공산군 2개 군단 등, 모두 9만 명에 이르는 적군이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게 된다. 미 제10군단은 흥남시 둘레에 설정된 3중의 견고한 방어선에서 함포 지원과 공중화력 지원을 받아 가며 교두보를 방어하였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미국 1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1215일 미 해병 제1사단의 출항을 시작으로 하여 17일 국군 수도사단, 21일 미 제7사단이 차례로 흥남항을 벗어나면서 교두보의 방어선은 차차 축소되었다. 3방어선에 남아서 뒤를 돌보던 미 제3사단이 1224,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나자 철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세계 전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해상 철수작전

세계전사상(世界戰史上)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이 해상 철수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105.000명의 병력과 17.000대의 차량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와 물자를 옮겼을 뿐 아니라, 91.000명에 이르는 북한 피난민들도 구출하였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이 많아서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로 인해 흥남부두에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피난민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군 군함과 비행기, 군함과 상선 등, 200척이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원래 60명이었지만,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는 한국의사 현봉학 미 10군단 통역장교의 간곡한 부탁(“피난민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항하여 유엔군을 도와주었습니다. 군대편의를 이유로 그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피난민도 함께 데려갈 것을 요청하였고,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에는 국군이 걸어서 철수하겠다.”며 강력히 주장했다.

 

사람을 태우려고, 배에 있던 군수물자 25만 톤을 전부 버린 결단

한국군의 굳은 의지와 결의에 감동한 미 제 10군단장은, 배에 있던 무기(군수물자 25만톤)를 모두 버린 후, 16시간에 걸쳐서 탑승하게 되고, 피난민을 전부 태워 모두 14천여 명이 탈 수 있었다고 한다.

미처 싣지 못한 물자는 항구와 함께 폭파시키며 성공적으로 철수임무를 완수한다. 미군 철수 마지막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인 1224일이었고, 바로 다음날 중공군이 흥남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당시 뉴스위크지는 흥남철수 작전(미군은 철수가 아니라 병력재배치를 뜻하는 ‘Redeployment’란 단어를 쓰고 있다)을 일컬어 진주만 이래 최대의 패배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다른 시각으로는 2차 대전 초기의 던커크(Dunkirk) 철수작전에 비견되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의 "민간선박이든 뭐든 동원할 수 있는 선박을 다 동원해 흥남으로 보내 한사람이라도 다 구출하도록 하라."는 결단도 있었다.

 

흥남 철수작전 기적의 크리스마스

바로 흥남 철수작전이 "기적의 크리스마"라고 불리 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7.607t)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었다.(온양호가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났다) 원래는 유엔군에게 항공유를 보급하기 위한 수송선이었는데, 전세가 급변하면서 부산에 모두 짐을 하역하고 철수작전을 돕기 위해 흥남으로 온 것이었다.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최대한 가능한 만큼의 피난민을 모두 승선시키고 1223일 흥남을 출발한다. 철수작전에 동원된 함정은 LST(Landing Ship Tank, 전차 양륙함) 81, LSD(Landing Ship Dock, 도크형 상륙함) 11, MSTS(해상 수송부대) 함선 76척을 비롯해 모두 197척이었다.

이 흥남 철수작전의 참모장은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었고, 이 포니 대령이 당시 현봉학 통역관의 간청으로 미() 10군단장이었던 알몬드 소장을 설득한 끝에, 믿기지 않는 대규모 피란민 철수 작전을 이뤄냈다는 것이 역사적 기록이다.

현봉학 박사는 이때의 일을, "피난민들은 선박 구석구석뿐 아니라 차량 밑, 장갑차 위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를 건너는 심정으로 거제도에 왔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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