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기원, 국제전인가? 국내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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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기원, 국제전인가? 국내전인가?
  • 관악신문
  • 승인 2023.07.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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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배 한세연구소장
황준배 한세연구소장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휴전상태이다. 즉 준전시 상태인 것이다.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민족 단일국가에서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분열과, 국토의 분단에 처한 실정이다. 이 전쟁으로 형성된 남한과 북한의 체제(體制, Regime)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국가관과 역사관은 대단히 중요하다. 6·25전쟁, 그 기원에 대한 해석과 관점은 현재의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라 불린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19506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소련과 중공의 사전 밀약 하에 남북 군사 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 이것이 6·25전쟁이고,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침략했다. 1953727,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사실상 31개월(1,129)간이며, 현재까지 명목상으로는 73년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한 견해들이 있다. 남한의 북침설, 미국에 의한 남침유도설, 38선 부근에서 지속적인 충돌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내전설,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물타기설이 있다. 다양한 학설들은 북방외교의 결과로 일단락되었다. 199462,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은 옐친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옐친은 구 소비에트연방이 보관 중이던 극비문서 300여 점을 한국에 제공했다. ‘옐친 문서라고 불리며 이로 인해 625 남침전쟁의 전모가 생생하게 밝혀졌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1949,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남침과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한반도의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이 필요하고, 북한군이 더 강하다. 남한 내의 남로당과 게릴라 운동의 지지받고 있다. 남한의 인민대중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북한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이 거절했다.(1949.3.17 스탈린과 김일성 대화) 그 이유는 북한이 압도적이지 않다. 미국의 개입 우려와 미소협정 위반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뒤로는 북한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1950112,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태평양-아시아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설명하며 그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시켰다. 애치슨라인(미국의 전략적인 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했다는 시각과, 전략적 거점을 라인으로 설정했을 뿐이지 포기가 아니라는 관점이 존재)이 선언되자 스탈린은 1950130,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한다. 1950410, 스탈린은 남침전쟁을 승인한다. 그리고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충고한다. “누가 침공했는지 모르게 감추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이 체계적으로 저항하거나 국제사회의 지원, 동원할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이 전쟁은 기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공산화로 통일된 한반도를 맡기려 했다. 그리고 소련은 군사 고문단과 무기는 지원하겠지만, 실제 전투 병력 지원은 난색을 표한다. 모택동과 의논하라는 식으로 중공의 개입 여지를 열어 두었다. 소련아 전쟁을 추인한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중공의 탄생이다. 소련에게 있어서 큰 호재였고 미국에 있어서는 큰 악재였다. 소련은 결국 중공의 승인을 전제로 북한이 전쟁을 하는 조건으로 승낙한다. 소련의 핵개발이다. 미국과 동일한 공격 수단을 갖추게 되었다. 미군 철수이다.

2차 세계대전의 소련의 군사영웅 바실리예프 장군을 북한에 보낸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해서 넘겨준 남침작전계획 명칭은 선제타격계획이었다. 북한의 번역 과정에서 선제타격계획용어는 남침의 증거가 되므로 반격계획으로 수정한다. 소련의 스탈린은 치밀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 시점에 국민당 장개석 정권을 물리치고 공산당 정부를 세운 중공의 모택동을 견제하는 것이고, 공산주의 맹주에 대한 경계다. 그래서 미국과 중공의 치열한 전투로 인한 전력의 최대한 손실을 노린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안보리를 소집한다. 소련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만약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유엔의 참전이 어려운 상황이다. 소련 대표 말리크는 치아 치료를 이유로 불참했다. 사실은 스탈린의 지령으로 밝혀졌다. 물론 미국은 어떤 명분으로든 개입했을 것이라고 국제학자들은 유추한다.

전쟁의 기원을 외적 기원(국제전이나 외세에만 한정한다면 전쟁의 주체나 전쟁의 책임에 대해 모호한 상황을 초래, 도발은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의 기획)과 내적 기원(내전의 확대, 내전에 국한되면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의 한계)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한 것으로 보는 복합 기원설에 국제적으로 힘이 실리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 남북한의 국내 정치 리더들의 민족통합 리더십의 한계, 국제정치를 헤쳐 나갈 리더십 역량의 부재, 무능, 무책임이 외세나 국제전의 책임보다 훨씬 더 크다고 본다. 국내 정치 리더들의 리더십이 탁월했더라면 비극적인 전쟁은 막을 수 있었다.

전통주의적 시각에서는 스탈린의 적화야욕이 김일성을 이용하여 남침을 유도했다는 시각이며, 현재는 폐기되었다.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남침유도설이다. 이 학자와 한국의 지식인이나 운동권들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한반도는 사실상 내전상태였고 1950625,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950625일 이후의 전쟁도 남침유도설 보다는 교전확대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비밀문건이 드러나기 전 학설에 불과하다.

6·25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했고 민족의 무력병합화를 시도한 침략전쟁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정치적 야욕에 의한 시도와 소련의 추인, 김일성이 말한 조국해방전쟁은 조국훼방전쟁으로 전범이고, 민족상잔의 전쟁 흉악범이자 정치범이다. 6·25전쟁에 중공의 참전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중공의 입장에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1950105일 시작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에 의해 북한은 항복 직전이었다. 미군, 국군의 최선봉 최북단 진격의 육군 3사단 백골부대는 한만 국경(22연대 혜산진, 18연대 부령, 23연대 백암)까지 진격해서 조국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 참전으로 통한의 성진항 철수, 미군과 주민들의 흥남철수가 이루어진다.

6·25전쟁 중에도 스탈린은 전략물자나 무기 지원을 지연시키기도 하고, 교묘한 전략으로 전쟁 상황을 컨트롤하고 조정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스탈린은 미군과 유엔군을 동아시아에 묶어두고 동구권과 유럽을 공산화 진영으로 포섭하려는 세계전략이었다. 소련의 미국 개입 유도설과도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실주의(국제관계) 관점에서는 국가들은 이익을 목표로 행동한다고 보는데, 전쟁의 발발이 미국의 이익에 일치했다는 점과, 미국이 북한군 침공 첩보를 의도적으로 묵살했다고 지적한다. 이것을 '침묵의 음모'라고 본다. 몰락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 미국의 대 공산권 봉쇄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정의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었던 하리마오 씨는 분단과 전쟁은 미국 작품이라고 한다. 미국 국방부가 왜, 1950619일부터 시작되는 1주일 동안 SL-17로 알려진 전쟁계획을 승인하고 퍼뜨렸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 계획은 조선인민군의 침공, 부산 방어선으로의 즉각적인 후퇴와 부산 방어선의 방어, 그런 다음에는 인천에서의 육공군의 합동 상륙작전을 가정했다. 하리마오 씨는 미국의 경제난국 돌파 필요성과 스탈린의 욕심이 어우러져 한국전쟁이 터졌고, 이 과정에서 수백만 한국인과 수만의 유엔군이 영문도 모르고 희생되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지금도 6.25전쟁 기밀문서 공개를 꺼리고 있으며, 독재 국가답게 긍정과 부정설 모두 검열하며 삭제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북침에 반격한 것이 6·25전쟁이라고 가르친다. 북한의 주장은 남침유도설이 아니라, 그냥 '북침설'이며, 게다가 정전협정은 '미국의 항복문서'이고 '북한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참전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공산국가의 탄생, 도미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위치,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미국은 군사전략과 한반도의 대 소련과 중공 견제의 교두보 마련이다. 정치, 군사적 배경 외에도 한미 기독교인들의 협력, 기독교 신앙 차원에서의 동기도 내재되어 있다. 맥아더는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미국 본토에 성경을 대량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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