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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 논설위원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옆의 나라는 넘치는 홍수에 힘들어하고, 바다 건너 어떤 나라는 가뭄과 폭염 때문에 대지가 타들어 가고 있다. 조금만 걸어도 땀방울이 송알송알 배어 나온다. 올여름의 지독한 무더위 예고편인 듯하다. 시원한 냉수 한 잔이 그립다. 그 냉수가 바로 복(福)이 아닐까.복(伏)날이 다가오면 습관적으로 ‘복달임’ 음식을 찾지만, 복날이 아니더라도 ‘복(福) 드림’ 음식은 지천으로 널려 있을 것이다. 주는 복은 뭐고 먹는 복은 뭐꼬?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게’, ‘세상 뭘 그리 복잡하게 계산하며 살려고 해. 그냥 주는 복도 복이고 먹는 복도 복이지’.오늘도 ‘복많이’는 복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복 많이 내주고 있다. 그들에게 빚진 것도 아닌데 이름값 하느라 복을 무한정 베풀고 있으니 이름 없는 천사가 따로 없다. 음식점 이름을 ‘복많이네집’으로 결정한 사장님도 넉넉한 복 많이 받을 것이다. 암튼 날마다 복 타령하는 사람들에게 복 많이 나누어주는 것은 선한 덕을 쌓는 일이라 생각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보다 스스로 알아서 베푸는 복이 훨씬 더 효과 만점 아닌가.생업이나 생계를 밥에 비유한 표현이 제법 많다. 밥벌이·밥줄·밥그릇이 대표적이다. ‘밥값 좀 하라’고 다그치기도 하고 ‘밥심을 내야 일할 수 있다’고 밥 타령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먹고사는데 필요한 밥은 중요하다. 그러니 밥벌이를 찾지 못하고, 밥줄이 끊기는 상황에 직면하면 누구나 감사를 잊고 고달파 한다. 탯줄만 생명줄인 줄 알았는데 밥줄도 생명줄이었구나.관자(管子)가 중요시했던 것도 먹고사니즘의 해결이었다. 창름실즉지예절(倉廩實則知禮節 : 곡식 창고가 가득하면 예절을 안다), 창름실이영어공(倉廩實而囹圄空 : 백성의 생계가 풍족하게 되며 자연히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게 되므로, 따라서 감옥(監獄)은 텅 비게 된다는 뜻)에 그 뜻이 잘 나타나 있다. 함포고복(含哺鼓腹 :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림. 풍족하여 즐겁게 지냄을 뜻함)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도 여전하다.어느 작가의 글 중에 “아이들과 어떤 도시를 여행하던 중, 이야기의 주제가 그리스·로마 신화로부터 문명의 발생 등이었다. 큰아이가 ‘아, 그러니까 이 도시는 청동기 시대의 모습을 간직했고. 그다음은 여기는 철기시대 유적이 있고, 그다음은…. 아빠, 철기시대 다음은 무슨 시대지?’ “곰곰이 생각하려던 찰나 둘째 아이가 대답하길 ‘뭐긴 뭐야 먹기 시대지. 아, 배고파.’”라는 일화가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달리 생겨났겠는가.불평불만이 넘치는 감옥과 감사와 기도가 충만한 수도원의 공통점은 일반인으로부터 조금은 격리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 고립에 대한 불평불만을 갖느냐 아니면 자신을 성찰할 수 있음에 감사를 하느냐에 따라 골방에 갇힌 어둠의 삶을 살게 되든지 광명의 세상으로 나올 수도 있음이다. 고독한 골방 탈출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감사를 외치며 사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인생을 갈라놓을 수 있는 건 결국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집 나간 행복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도 감사인 것이다. 감사의 생활화, 감사의 외침은 우리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방문 없는 방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서 밤새워 방전된 핸드폰 배터리 충전하듯 지식의 급속 충전을 감시하는 부모의 시뻘건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성적 떨어지는 꼴을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날마다 불침번을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아이들을 지식 공부만을 위하여 독방에 가둔 채 지혜가 아닌 지식 로봇으로 만들면서 감사하는 마음보다 감시가 먼저라고 주장하니 온 동네가 싸늘한 불야성이다.어느 참치 집 사장님의 ‘맛보면 못참치’라는 상호를 보면서 ‘감사를 맛보면 그냥 못 참지’를 외쳐본다. 빨간 사과 홍옥보다 더 붉게 익어가는 햇살이 구르고 있다. 먹거리 찾아 발품을 부지런히 팔아야 할 귀한 시간이다. 입맛 당기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맛 거리로 뛰쳐나갈 시간인 것이다. 불평불만 가득하고 고소 고발만 가르치는 동네에서 ‘복많이네집’, ‘기쁨이네집’은 어디 메쯤 서 있는가? 맛 거리는 배고픔에 둘러싸여 있나이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6-13 17:15

송란교 논설위원4월 4일 새벽 5시, 가까스로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 간 핸드폰을 잡는다. 코레일 앱을 열어 놓고서 5월 4일 새벽에 출발하는 열차표 예매를 준비하고 있었다. 회원가입을 해놓지 않아서 작성해야 할 곳이 많았다. 그렇게 몇 단계를 지나고 나니 원하는 시간대의 열차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열차표라도 구해야지 하면서 끙끙거리며 겨우 예매를 완료했다. 손놀림이 빠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준비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법임을 새삼 느꼈다.4월 5일에도 마찬가지다. 내려갔으니 올라와야 하는 표를 예매해야 했다. 이번에는 실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해보았다고 자연스럽게 예매를 했다. 그 후 한 달이 지났다. 들뜬 마음과 기대와 설렘이 있었기에 이날을 꿈꾸며 꾹 참고 기다렸었다.출발 하루 전, 다른 친구가 원하는 시간대의 표를 구했다고 필자가 1개월 전에 애써 예매한 표를 취소하라 했다. 감사할 일이었다. 다른 일행들과 시간을 맞출 수 있게 되어 천만다행 아닌가. 5월 4일 꼭두새벽, 밤잠을 설치며 이리저리 뒹굴다 일어나니 머리가 띵하다. 이런 몸 상태로 무등산을 오를 수 있으려나 걱정을 하면서도 서둘러 채비를 하고 지하철역으로 나갔다.열차 출발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하여 아침을 먹고 갈까 했더니만 다른 일행들이 식사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자 어쩔 수 없이 커피 한잔 치켜들고 역 주위를 굶주린 사자처럼 서성거렸다.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는지 밀려 들어오는지 알 수 없지만, 명절 때 보다 더 붐볐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출발하는 열차표가 내 손안에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광주송정역에 10분 늦게 도착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도착해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등산 정상을 향해 출발하기 전 원효사 부근에서 산나물비빔밥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하늘이 도와 화창한 날씨, 땅이 도와 등산길이 열리고 친구들이 도와 우정이 샘 솟으니, 이것은 분명 천우신조(天佑神助)이고 천지인의 조화가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무등산이 깔고 앉은 치맛폭은 상당히 넓다. 해발 1100m가 넘는다. 우리 일행은 원효사 입구에서 출발했다. 급하지 않은 경사, 간간이 계곡 사이에서 흐르는 물들이 노래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12명은 그렇게 걸으며 이야기하며 낙오자 없이 단숨에 목교라는 갈림길까지 올랐다. 한 친구가 목교에서 서석대까지는 경사가 심하고, 무릎관절이 좋지 않다고 낙오를 선언했다. 무리하지 말고 머물 사람은 장불재 쉼터에서 기다리라 하고 오를 수 있는 친구들은 서석대를 향해 전진했다. 엄포 아닌 엄포에 잔뜩 긴장하였으나 생각만큼 경사가 급하지 않아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서석대에 오르니 저만치서 인왕봉이 부른다. 어머니 품속 같은 평온함과 아직 덜 떨어진 철쭉을 바라보며 인왕봉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민간인에게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 품속이 무척 궁금했다. 다른 친구들이 볼 것 없다 하면서 그만 하산하자 하였다. 그래도 서울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가 인왕봉을 꼭 만져보고 싶었기에 앞장서서 올랐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잠 못 이루고 달려왔는데 그 보상치고는 조금은 허망했다. 겹겹이 철조망으로 옥죄어 놓은 인왕봉이 속살 찔리는 아픔을 참으며 울고 있지는 않을까? 높이를 낮춘 천왕봉의 숨은 목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산허리 싹둑싹둑 잘린 꾸불꾸불한 뱀 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못 볼 것을 본 양 눈물이 콸콸 솟으려 하니 속이 쿡쿡 아려왔다.무등산 정상 부근에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 있다. 천지인의 조화를 이루고 싶어 이렇게 이름하였을 것이다. 예전에 ‘차등 평등 무등’이라는 칼럼을 썼었는데 오늘 무등산 정상에 올라 ‘무등(無等)’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맑게 갠 하늘 틈새로 솜털 같은 뭉게구름이 졸랑졸랑, 땅에서는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옷차림으로 줄을 잇고 있으니 이는 진정 천지인이 한 몸이 되려 함이 아니던가.서석대를 돌아 입석대를 향했다. 선바위와 선돌, 그 돌들이 솟아오른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그 뜻을 오롯이 새기면서 울퉁불퉁한 길목을 따라 장불재 쉼터에 1시간여 늦게 도착했다. 중간에 포기한 친구들이 설마 인왕봉까지 다녀올 줄은 몰랐다 하기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다음 일정이 빠듯함에도 마음의 여유가 넘쳤다. 오늘은 족히 15킬로를 걸었음에도 피곤함이 전혀 없다. 함께한 친구들의 웃는 얼굴에서 차별과 등급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고 있음을 읽는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5-16 15:24

송란교 논설위원겨울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바람이 차가운가 따뜻한 봄을 맞이할 마음이 차가운가? 아직도 추위를 타는 사람들이 많은 듯 두툼한 옷을 입고서 갓 피어난 봄기운을 마시려 듬성듬성 모여든다. 진눈깨비도 혼자 내리면 외롭다고 눈과 비가 섞여 어깨동무하고 내린다.겨우내 쌓인 얼음벽은 중년의 뱃살만큼이나 두껍다. 봄볕에 조금은 얇아지고 있으나 어린아이가 천천히 빨아 먹는 단단한 사탕처럼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하루 굶었다고 하루 녹았다고 얼마나 두드러지게 표시가 날까만, 시절의 변화는 병원에 설치되어있는 엑스레이 촬영장의 묵직한 차폐막(遮蔽幕)조차도 뚫고 온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가 보다.사람들의 허술한 마음 틈새를 파고드는 세월 무상의 허전함은 무엇일까? 하루하루가 그날이 그날인듯하나 돌아보면 어느새 한 달이고 한 해가 지나가고 있음이다. 누가 시간에 금을 긋기 시작했을까? 인생이라는 시간을 그냥 한 통에 담아 놓으면 어떠했을지 한가로운 봄맛을 삼키며 시시각각 변화는 들판을 향해 상상의 무대를 펼쳐본다.냉이는 냉이대로 달래는 달래대로 약쑥은 약쑥대로 돌미나리는 돌미나리대로 두릅은 두릅대로 고개를 내민다. 나도 향기로운 봄맛 좀 보자고 고개를 빳빳이 쳐든다. 누가 누구를 맛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너른 들판과 산등성이를 푸르게 붉게 물들이고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색깔과 향내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좁은 땅 비집고 고개를 쳐드는데 무슨 수로 막을꼬.시간은 누구에게나 대체 불가한 공평한 자산이다. 누구에게도 빌려줄 수 없고 누구에게서 빌려올 수도 없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 철저하게 고독하게 ‘내 시간’의 주인으로 오로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자산으로 자신만의 별을 만들고, 그 별이 비추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것 아니겠는가.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은 급하게 흐른다. 강물은 강폭이 너른 곳에서는 쉬엄쉬엄 흐른다. 그러나 폭이 조금씩 좁아지면 물살이 빨라진다. 오르막이 아닌 내리막인 곳에서는 더욱 빨라진다. 산을 오르다 보면 오르막에서는 숨이 차오르고 내리막에서는 조금은 느긋하고 차분해진다. 우리네 삶은 강물을 닮는가 산타기를 닮는가?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자신만의 길을 새롭게 열어 가야 한다. 새로운 별을 찾아 헤매기보단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남은 삶의 여정에 진정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찾는 것이요 다른 배와 부딪힘을 피하게 하는 등대지기를 찾는 길이다. 별을 가진 사람의 삶은 먼 미래의 길잡이인 나침반을 들고 나아가기에 무작정 달리는 사람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별을 가진 삶은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빛나는 별을 품자. 그 별이 어디로 인도할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곳으로, 밝은 곳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갈 거라 믿어 보자. 그 별이 꺼지지 않는 발광체로 거듭나게 해보자.삶이란 본디 관객이 되어 구경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애쓰는 사람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낸다. 별이 쏟아내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의 빛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에너지를 찾아내고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특별한 빛으로 조각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만의 삶인 것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도 그들을 키우고 보살펴주는 각각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말해 무엇하랴.‘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덜어내고 기쁨을 더해주는 일’은 곧 미소 짓고 웃어 주는 일이다. 자신의 별을 웃는 별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예쁜 말 예쁜 미소로 세상을 환하게 이웃을 편하게’ 하는 그런 반짝이는 별, 오작교를 자유로이 건널 수 있도록 쌍무지개를 세울 수 있는 아름다운 별이 줄을 서면 좋겠다.내일 쌀 똥까지 미리 가불(假拂)해서 싸버리는 가련한 인생은 피하고 싶다. 봄이 아장아장 오는 둥 마는 둥 팔짝팔짝 뛰는 둥 하다 여름으로 직권 회부(職權回附)당하고 있음이다. 붉은 진달래가 만개하기도 전에 여름 손님이 먼저 오려 하니 저물어가는 석양도 달음박질하는구나. 해야 할 일은 더 열심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깊이 삼가면, 내려다보고 있는 큰 별의 마음도 가벼울 것이다. 오다 만 봄이여 달갑잖은 여름이여, 새봄의 향기를 아직 지치도록 누리지 못하였으니 아름다운 시절을 서둘러 재촉 마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5-03 10:43

송란교 논설위원봄동이 맛있게 익어가는 시절이다.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무겁고 무거운 눈꺼풀이 위아래 없이 딱 달라붙어 있어 억지로 떼어내기도 힘들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가까스로 이불 동굴에서 기어 나온다. 구석구석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쑤신다. 서둘러 면도와 세면을 하고 아침밥은 폴짝 건너뛴다. 노트북이 들어있는 백 팩을 확 잡아채 둘러매고 지하철 시간에 늦지 않게 현관문을 나선다. 낮에는 제법 포근한 느낌이 들지만 꼭두새벽은 아직도 차갑다.비몽사몽 간에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항상 타야 하는 열차가 전역(前驛)을 출발하고 있다. 열차 문이 열리는데 내리는 승객은 없다. 서둘러 올라타면서 빈 좌석이 어디에 있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바쁘게 굴린다. 어느 승객이 먼저 내릴지 승객의 행색을 살피고 그 사람 앞에 선다. 운 좋은 날에는 서너 정거장 지나면 자리에 앉을 수도 있지만, 운이 좋지 않으면 환승역까지 20여 정거장을 서서 가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럴 땐 ‘오늘은 기분 좋은 운이 닿지 않네’ 하면서 참고 견딘다. 지친 몸이 원하니 눈과 마음이 자꾸만 빈자리를 찾아 헤맨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100여 분 동안 지하철과 버스로 환승, 도보 이동을 반복하면서 작업 현장에 도착한다. 매력 하나 없고 멋없이 서 있는 네모난 컨테이너 박스에 몸을 비비듯 쑤셔 넣고서 가져간 노트북을 켠다. 아직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이 오지 않아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흐른다. 마른 솔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고도의 집중으로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하자 아기 해가 어린 소나무 사이로 방긋방긋 솟아오르며 얼굴을 내민다. 푸른 용이 빨간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려는 듯 붉게 물든 아침 햇살에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 ‘나는 지금 행복하다’라고 외친다. 꿀맛 같은 시간이다. 나 혼자만의 새벽 시간이 이렇게 감사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이 시각, 이곳으로 달려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불과 사투를 벌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참 소중한 시간이다.괸 턱 사이로 해가 굴러 올라오고, 어둠을 물리치는 동이 터오면 행복한 단어들로 하얀 모니터를 수북이 채운다. 바다는 채워질 수 있어도 욕심은 채울 수 없다고 하나, 빈 영혼에 행복을 가득 채우고 있다. 24시간을 온통 행복으로 물들이기에는 지금 30분이면 족하리라.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꼭꼭 숨어있는 잠재력을 찾기 위해 출퇴근에만 왕복 4시간, 작업하는데 8시간을 쓰고 있다. ‘일상의 일탈’, ‘궤도 이탈’, ‘엉뚱한 짓’,‘새로운 물꼬’ 등등, 전혀 생뚱맞은 일을 벌이고 있다. 설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더라도 지금 행복하면 잘 된 길이라 믿는다. 미친 짓거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작업장에 들어갈 때는 안전한 작업을 위해 핸드폰을 아예 사무실에 놓아둔다. 필요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으련만 그래도 좋지 않은 인연을 하나 둘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단체카톡방에 쌓여있는 글과 부재중 전화를 볼 때마다 회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기는 하다. ‘답신이 왜 이리 더딘가’라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지만, ‘숨넘어가는 급한 일이 아니기에 그저 다행이구나’ 하고 웃어 넘긴다.뇌도 조금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쉼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편단심으로 한 가지 주제에만 밤새 몰두한다고 성과가 쑥쑥 나오는 것도 아닐 것이다. 『히든 포텐셜』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애덤 그랜트는 ‘저녁에 부업을 한 사람들이 다음 날 업무 수행 성과가 훨씬 좋았음’을 밝혔었다.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일 몇 개쯤은 도전해볼 필요가 있음이다.사방이 온통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하철역 스크린도 나를 훑고 있다. 버스에 오르면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골목길에 서 있는 CCTV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매장에 세워둔 마네킹 신세다. 핸드폰 액정 사이로 내 얼굴이 잠시 스친다. 그리고 그 속으로 잽싸게 빨려 들어간다.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말과 내 손으로 써낸 글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면 좋겠다.고개 한번 쳐들고 하늘을 볼 때마다 생각의 깊이가 한 계단 더 높이 쌓인다. 들판을 향해 한걸음 걸어 나갈 때마다 내가 밟은 세상이 한 평씩 더 늘어난다. ‘자르고 돌리고 뚫고 풀고 닦고’, 아름다운 취미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내 삶의 한 페이지도 야(野)한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4-19 10:20

송란교 논설위원한참 맛있게 잘 먹었던 시골에서 가져온 간장과 된장이 어느 순간 모두 바닥이 났다. 그래서 간장과 된장을 구하려 겸사겸사 시골에서 살고 계시는 장모님을 찾아 뵜었다. 여차하여 간장과 된장이 필요하다 하니 장모님께서 몇 해 전에 담은 씨 간장을 끓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양조간장과 장모님이 담아 놓은 간장은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그 깊은 맛을 알기에 장모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울컥울컥 솟는다.장독대를 호령하는 큼직한 항아리 속에 숨죽이고 있던 유난히도 까만 간장을 서너 말 퍼 올렸다. 그리고 마당 한쪽 구석에 다섯 말은 넉넉히 들어갈 큰 솥단지를 걸고 쏟아부었다. 장모님은 그사이 부엌에서 달걀 하나를 가져오시더니 간장에 띄우셨다. 수심 깊은 호수에서 백조 한 마리 떠 있는 듯 하얀 달걀이 둥둥 떠다닌다. 염도가 적당하다 하시니 저는 창고에서 깻대 한 단을 꺼내와서 부지런히 태웠다. 깨는 고소한 향기로 깻대는 뜨거운 불길로 아낌없이 제 몸을 내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갑자기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가 떠오른다. “자두연두기(煮豆燃荳萁 :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 : 콩이 가마솥 안에서 눈물 흘리네),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 어찌 이리도 급하게 삶아대는가)”. 콩이나 깨나 콩깍지나 깻대나 모두 제 몫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따뜻한 날씨가 이어진 듯하더니만 센 바람이 방향성을 잃고 이리저리 불어대니 기온이 푹푹 내려갔다. 바람결에 새털 같은 재가 날리니 솥뚜껑을 열어 놓을 수 없었지만, 펄펄 끓으면 넘칠까 하여 간간이 솥뚜껑을 열고 내 얼굴만한 나무 주걱으로 팔자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간장이 다려지고 나니 진한 맛을 풍긴다. 코가 벌렁벌렁 거리고 혀에 군침이 가득 고인다.간장을 품고 있던 항아리 밑바닥에는 반짝거리는 결정체가 한 줌 쌓여있었다. 햇볕에 비추어보니 다이아몬드보다 더 영롱한 빛을 발한다. 하얀 소금이 씨 간장을 토해내고 영롱한 별이 되고 있음이다. 아름다운 별 보듯 맛있는 간장을 오랫동안 황홀하게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소금도 그렇게 검은 간장으로 약이 되는 간장으로 거듭나려 몸부림쳤을 것이다. 검은 장과 그 밑에 가라앉은 하얀 소금들, 어둠의 장막을 걷어낸 밤하늘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흑백의 조화, 음양의 조화는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이다.짠맛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서 간장과 소금이 도토리 키재기를 한다.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까만 간장은 그 짜디짠 맛을 만들어내고 혀를 사로잡는 그 맛을 품기 위해 그렇게 짠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있었을 것이다. 빛을 보지 않아도 빛난다. 약초 없는 약이다. 귀하고 귀하니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한 말 통에 가득 담았다.불을 세게 지피다 보니 펄펄 끓어 넘치려 한다. 사랑도 욕심도 의욕도 넘친다. 인생도 저만치서 고부랑 고개를 넘어가려 한다. 씨 된장, 약 된장, 약 간장, 누군가의 애간장을 태우며 이리도 시커멓게 멍이 들었을까? 그 깊은 맛을 간직하기 위해 말없이 견뎌낸 세월이 그 얼마일까?깻대 다 타고나니 하얀 재가 솥뚜껑에 슬그머니 내린다. 장모님은 노란 참깨 한 되를 까만 비닐봉지에 담고 계신다. 그 손길이 정답고, 그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참으로 고소하다.선거 한 번 치르려 하니, 가면 속에 숨어 있던 위선들이 봇물 터진듯하다. 어디에 쓸 것인가? 예전부터 머릿속에 감추고 있었고 마음속에 단단히 묻어둔 것들이 벼락출세 좀 하려 하니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백주대낮에 온통 까발려지니 목불인견이로다. 봄을 맞이하여 도랑을 정비하려 막힌 곳을 조금 팠더니 왜 이리 썩은 내 진동하는가? 더 이상 맡고 있을 수도 없고 들어줄 수도 없고 봐 줄 수도 없구나. 이게 왠 난리법석인지 모르겠다.『예쁜 말 예쁜 미소 예쁜 인생』이 울고 있다. 『맛있는 말 한입 잡숴 봐U!』가 배고프다 하소연한다. ‘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다’라는 후회가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글이 활자화되면 지울 수 없듯이, 말도 내뱉어지면 사라지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 똑똑히 알게 되었으리라. 아직도 막말. 망말(妄言). 쓰레기 같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봄날에 좋은 씨를 뿌리려 노력하는 농부님네 마음을 알기나 할까?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4-05 17:19

송란교 / 논설위원따뜻한 봄이 오면 예쁜 꽃들이 피어나고 차가운 추위는 말없이 물러난다. 겨울은 간간이 떠나기 싫다고 꽃샘추위로 앙탈을 부리지만 오는 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름다운 시절을 예비하듯 꽃 몽우리는 두툼해진다. 바라보는 주인을 향해 살포시 미소지으려 준비한다. 그러는 동안 한순간에 확 피어나는 꽃을 보면 마음도 활짝 열린다. 꽃은 예쁜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참 곱고 예쁘다는 느낌이 든다. 구름같이 몰려온 사람들이 와!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고 있을 때, 왜 너만 예쁘냐고 따지려 들면 어색하고 곤란하지 않을까.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 계절이다. 화려한 봄은 짧다 하나 내년에도 다시 온다. 우리네 인생은 길다 길다 하나 지나가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나 기쁨으로 그려내는 긴 인생은 늘 즐거움과 행복이 넘칠 것이다.한평생을 살면서 만나야 할 사람보다 만나서는 안 되는, 아니 피해야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더 많으면 그 삶은 평탄하지 못할 것이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을 평행선 위를 달리듯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다면 삶의 기쁨이 늘어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은 대로변 교차를 건너다 수시로 만나게 되니,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인생인가 보다. 좋은 씨앗을 골라 뿌려야 하는데, 어중이떠중이 섞여 있음에도 귀찮아서 그냥 뿌리면 수확의 계절에 수고로움만 쌓이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 줄어들게 된다.‘인생의 이음새’를 따라 인연이 곱게 이어지거나 거칠게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인연의 수레바퀴’는 데굴데굴 미완의 목적지를 향해 잘도 굴러간다. 간혹 ‘끼이잌’ 숨넘어가듯 브레이크 밟는 소리에 봄 잠이 확 달아나기도 하지만,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굴리고 밀고 가는 그 바퀴는 오늘도 쉬지 않고 구르고 있다. 덜커덩거리는 자갈밭이 아닌 반듯하게 포장된 길이면 좋겠다.다른 사람의 선한 배려나 베풂을 때로는 지독한 속임수로 괴롭힘을 주는 사람이 있다. 선의로 행한 것이 결과적으로 악의가 되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감사와 배려, 믿음이 사라진 대인관계는 센 바람이 잠든 파도 소리마저 휩쓸어간 불 꺼진 항구처럼, 메마른 사막 위에서 힘없이 뒹구는 모래알처럼, 홀로 어둠 속에 갇혀 마음 줄 곳을 잃게 한다. 대인공포증에 걸리면 지상낙원도 감옥일 수밖에 없다. 물이 바싹 마른강에 낚싯대 드리운들 걸려드는 물고기가 어디 있을까? 사시 눈을 뜨고 찌그러진 귀를 막다 보면 기쁨인들 어디로 다가오리까?무시당할 일을 하면서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러면서 무시당함에 너무나도 익숙해지고 있다. 자신만의 잇속을 즐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고 괴롭히는 속임의 전문 기술자를 만나게 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하나를 속이면 열을 속여야 하고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속이지 않고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사기꾼을 닮아간다. 삶의 기쁨을 잊은 채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고, 살아있다는 것조차 속임수이고 숨을 쉬고 있는 것 또한 가짜라고 믿는 그 사람도 처음부터 사기꾼은 아니었을 것이다.공약(公約)을 믿고 뽑아주었더니 그 공약(空約)을 진짜 믿었냐고 따지려 든다. 공증까지 받아 둔 계약서가 모두 거짓으로 둔갑을 한다. 믿는 네가 바보지 속이는 나는 똑똑하다고 큰소리친다. 속이는 것조차 권력이고 능력이라 우기는데 이를 어이할꼬. 묵직한 믿음의 주춧돌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있음이다.분명 이겼는데 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게임에서 졌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이긴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속임수의 함정에 빠진 듯 뭔지 모르지만 찜찜하다. 명쾌함이 아닌 애매모호(曖昧模糊)함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져도 이겼다고 우기고 보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일까?친구 딸 결혼식이 분명 오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예식장으로 뛰어갔는데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친구 이름과 똑같은 또 다른 혼주는 하객 맞이에 정신없이 바쁘다. 묘한 일이다. 다시 청첩장을 확인했다. 아이쿠! 한 주를 빨리 당겨 왔음이렷다. 누구를 원망하리. 정신 똑바로 차리자. 선한 믿음이 악한 배신에 능욕(凌辱)당하지 않도록 더 철저히 챙기자. 로또복권 여섯 장 속 모든 숫자를 모아놓고서 게임별로 한 개의 숫자가 맞았음에도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었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은 왜 이리 싸할까?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3-22 11:31

송란교/논설위원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선물은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오랫동안 유지된다. 보통의 사람은 ‘선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물질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비용이 들지 않는 따뜻한 말도 귀한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꼭 듣고 싶었던 말을 그 누군가에게 듣게 된다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진다.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한 번쯤은 경험해보았으리라.상대의 마음에 거울을 자주 비춰보아야 그들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격려의 말 등 적시 적소에 필요한 말을 해 준다면 이는 어느 값진 선물보다 더 귀한 것이 될 것이다.명절이나 생일 또는 특별한 기념일에는 특별한 선물을 기다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날은 특별한 날이기에 특별한 선물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1년에 한두 번 느끼는 특별한 행복도 매우 소중합니다만, 날마다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날마다 ‘칭찬’ ‘덕담’ ‘인정’이라는 선물을 주고받음이 이루어진다면 행복은 끊이지 않겠지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겠지요?선물을 준비하려면 크고 작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칭찬과 덕담과 인정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과 시간 정도는 써야 하겠지요.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배려는 자신에 대한 칭찬으로 되돌아오고, 스스로 긍정의 힘을 얻게 되니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예쁜 말 몇 마디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고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 응원을 해 줄 수 있다면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활짝 웃는 미소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날마다 예쁜 말 예쁜 미소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이룰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예쁜 말이라 할 수 있다. 기분 좋게 말하면 너와 나의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 나쁘게 말하면 서로의 기분이 나쁘게 된다. 이렇게 감정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말의 힘은 무한대라 할 수 있음이다.따뜻한 말은 나눌수록 기적을 일으킨다. 사소한 나눔일지라도 나누면 나눌수록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자꾸 퍼져나가게 된다. 나의 행복을 조금씩 쪼개면 더 많은 사람이 행복을 맛보게 된다. 예쁜 말 예쁜 미소를 옆 사람에게 나누다 보면 세상이 온통 환하게 되는 기적도 일으킬 수 있음이다.지기만의 생각에 갇혀 다른 사람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은 언제나 말실수가 따른다. 나눌 수 없는 말, 나누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서 누군가가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순간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영웅이 된 듯 착각한다. 하지만 이해 아닌 오해가 따라오게 되면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어쩜 좋아’ 하는 후회 가득한 빨간 얼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잔뜩 화가 난 사람에게는 짧은 순간일지라도 같은 편이 되어주어라.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화가 가라앉은 다음의 문제다. 화가 나면 이성이 멀리 도망가기에 어떤 말도 순수하게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도 있지만, 평생의 우정을 한순간에 금이 가게하고, 닭살 부부를 평생의 원수로 갈라놓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말은 언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러니 때에 맞는 말은 요술 방망이가 틀림없다.상대의 말을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지만,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먼저 해 주고, 상대의 욕구를 먼저 채워주면 오해를 멀어진다.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너’를 중심에 둔다면 이해는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덤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행복을 불어넣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그 기적은 돌고 돌아 나에게도 날마다 귀한 선물로 되돌아올 것이다.입구가 좁고 작은 종지에 물을 채울 때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을 쏟으면 넘치도록 채워지지 않는다.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그 크기에 맞는 속도와 양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발걸음 속도에 맞추어 함께 걸어가면 믿음이 차고 넘칠 것이다. 상대의 감정에 거울 비추듯, 상대의 마음을 내시경으로 샅샅이 살펴보듯 동감하는 말을 한다면 어찌 미소가 피어나지 않으리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3-07 10:47

송란교 논설위원시나브로 스미는 완연한 봄기운에 기대어 대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들어오는 복이 많을까 떠나가는 재앙이 많을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친구가 많이 찾아올까 속이려 덤비는 친구가 더 많을까? 아직은 덜 떨어진 겨울 꼭지가 가지 끝에 매달려 창문을 넘보기도 하지만, 따뜻한 복은 어서어서 들어오고 시커먼 재앙은 서둘러 떠나가기를 기대해본다. 상생의 만남, 살리는 만남은 우리가 사는 동안 덤이 남을 것이요, 동고동망(同苦同亡)의 만남, 상처 주는 만남은 덤이 줄어들 것이니라.남쪽에서 다소곳이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 꽃등에 업혀 오는지 꽃잎을 떨구고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제비들이 물고 올 꽃향기는 한 줄기 바람이 아닌 든든한 바램이면 좋겠다. 이제는 바람 불면 엎드리고 뒤돌아설 것이 아니라 가슴을 활짝 열고 들숨을 들이켜 보자. 무병(無病), 무탈(無頉), 무사안일(無事安逸)의 인생도 누군가를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맛있는 향기로 피어날 것이고, 삶이 곧게 펴지고 얼굴도 팔자도 아름답게 펴질 것이다.마음 한구석에 계약서 없이 세 들어 사는 녀석이 있다. 내 허락도 동의도 없이 제 맘대로 들어와서 내 영혼마저 삼키려 드는 핸드폰의 망령이다. 내 손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내 눈을 사로잡고 내 귀를 틀어막으니 도통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정마저 느낄 수 없게 만든다. 오호통재라 소통 부재여!내 육신과 잘 어울릴 때는 행복한 미소가 따라오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되면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핸드폰을 새로 개통하면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과 같다. 말과 정이 통하지 않는 녀석, 나를 닮은 가짜인 나와 철저히 친해져야만 인생이 즐겁다. 나는 지금 핸드폰에 더부살이하는 것일까? 반려견 한 마리 입양하면 또한 한 가족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dog이 아닌 god의 경지에 오르고 있다. 나는 지금 그들과 모듬살이 하는 것일까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남의 집에서 먹고 자며 일을 해 주고 삯을 받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이나 남에게 얹혀사는 것을 더부살이라 한다. 모듬살이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공동생활을 말함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가정은 사회와 나라를 이루는 모든 모듬살이의 기본이 된다. 부모를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조국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없기에 어쩌면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학교, 직장, 모임 등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듬살이다. 모듬살이는 함께 어울리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배려함에서 출발한다.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일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듬살이에 속할 것이다.산업화를 이룬 세대, 환갑을 넘긴 세대는 넘기 힘든 보릿고개를 넘어왔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배고픔의 해결이 지상최대의 과제였었다. 그래서 한 동네에서 어울려 살며 품앗이를 일삼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회지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중진국으로 만들었고 지금의 40대를 낳고 길러왔다. 그래서 40대는 중진국 시대에 걸맞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이 낳은 20대는 선진국에서 태어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방식은 철저히 선진국을 닮았다. 세대 간의 원활한 소통이 어려워짐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앞선 세대의 숨겨 둔 속사정이야 말해 뭣하랴. 먼 나라의 전설일 뿐이다.지금은 디지털 시대라 한다. 세계가 온통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으면 낙오되기 쉽다. 철저하게 혼자이면서도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풍요’한 소수보다 ‘다수의 행복’을 찾아야 할 때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면 다리도 아프고 어깻죽지도 아프다. 쥐고 있는 주먹이나 들고 있는 팔도 아프긴 매양 한가지다. 그러니 짐은 나누어야 한다.사람은 어렸을 때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성장하고 나면 또한 누군가를 함께 돌보아야 한다. 단 한 사람의 낙오와 소외는 사회의 큰 뚝을 무너뜨릴 수 있음이다. 모듬살이의 핵심은 ‘돌봄’이고, ‘어울림’이다. 이는 특정의 한 사람 몫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건강한 모듬살이를 통해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개인 간의 격차, 세대 간의 격차를 줄여나가면 좋겠다. 은퇴한 백수보다 휴가 중인 프리랜서가 더 어울리는 친구들, 한쪽 구석에서 더부살이하는 친구 렌탈, 정신 렌탈이 아닌 같은 방에 둘러앉아 함께 어울리는 모듬살이를 꿈꾸면 사치일까?꽃물인 듯 눈물인 듯 매화나무 가지 끝엔 설화(雪花) 만발하니 눈이 호강을 하나, 한 걸음 한 걸음 눈물바다를 젖은 족화(足靴)로 어찌 건널꼬.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2-23 10:47

송란교 논설위원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하루도 한 편의 시가 되고, 우울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하루도 한 편의 시가 된다. 어제의 생각이 오늘 다르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이면 또 다르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시어(詩語) 한 글자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자고 나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은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구매하고픈 마음이 불끈불끈 솟기도 한다. 그러한 일상의 감정이 한 겹 두 겹 포개지면 이엉 이어가듯 굴비 엮이듯 그렇게 웅장한 서사시가 된다. 한 자(字)를 발굴하고 끄적거리다 보면 한 줄 한 줄 쌓인다. 쌓이다 보면 나를 닮은 한 권의 대하소설이 된다. 그렇게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대로 한 편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는 것이 인생이다.손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쓴 시도 있을 것이다. 가슴으로 찾아낸 글자로 써야만 울림을 줄 수 있고 세대와 공감하고 시공(時空)을 뛰어넘을 수 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귀로는 볼 수 있는 사람도 가슴으로는 쓸 수 있음이다.즐거우면 즐거운 단어를 우울하면 우울한 단어를 더 많이 캐낸다. 그날그날의 마음 상태에 따라 바구니에 담기는 단어들이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마음가짐이 참 중요하다. 살아서 파닥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살아있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기에 곧 시의 영역이 넓어지게 된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가슴 속 열정을 모두 태우면서 걷고 뛰어야 함의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한 아름 꽃다발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송이를 찾아내는 수고로움은 즐거움이 아니던가. 해어화(解語花) 한 송이 치켜들 때면 어찌 행복하지 아니하겠는가.‘잘한다’ ‘사랑한다’ ‘기대한다’라는 말, 어린아이에게는 젖 물림이다. ‘탄핵하라’ ‘퇴진하라’ ‘특검하라’라는 말, 정치꾼들에게는 사탕발림이다. 무지몽매한 정치꾼들이 아는 단어는 그것밖에 없나 보다. 미운 구석이 하나도 없고, 예쁜 구석이 너무너무 많은 사람도 수두룩한 데 왜 하필 보면 볼수록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가? 특별한 것을 별 볼 일 없게 만드는 기술은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국민의 심장에 독화살 쏘는 기술은 언제 배웠을까?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말도 널렸는데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왜 저리도 잘할까? 정말 피하고 싶은 부류다.바람이나 달빛은 주인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넉넉하고 공평하다. 봄날의 산빛은 밤비 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희끄무레한 얼굴색이 푸르게 돌변한다. 듬성듬성 구름은 내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도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따뜻한 햇볕을 가로막고 파란 하늘을 가린다. 둥근 달의 푸짐함은 작년과 같건만 인정의 메마름은 예년과 다르더이다.선 바윗돌 이마가 누운 바위에 구르면, 봄바람은 이룬 것 없이 숨을 헐떡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종달새 따라온 농부님네 마음도 덩달아 바쁘다.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더 빠르게 걷고 뛰어야 살아남는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 어디엔들 기어올라야 살아남는다고 아우성이다. 살아가는 길이 참 울퉁불퉁하다.생각이 쏠리고, 의식이 뭉치고, 사고가 막히면, 내 마음속 빈자리도 좁아진다. ‘오늘이 힘들면 내일은 즐거워야 하리’ 그런 기대라도 있어야 내 육신도 편히 쉬지 않겠는가. 허기진 영혼에 탁주 한잔 부어본다. 진실을 마셨는지 거짓을 마셨는지 혀 꼬부랑은 세월의 허리를 닮아간다. 세월을 사냥하다 허망하게 놓쳐버린 아름다운 표현들이 달리는 차창(車窓) 너머로 즐비하게 걸린다. 고독과 친해져야 하고, 중년 시래기 신세를 면해야 하기에 생각이 또 분주해진다.남의 추위를 빌려 오는 꽃샘추위도 멀어져간다. 남의 눈물을 빌려 오고, 남의 진실을 빌려 오는 거짓 삶을 이제는 그만 거두어야 하리. 나의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이 환희고, 두 귀로 들을 수 있음이 감사이고, 숨 쉴 수 있음이 행복이다. 함께 살아왔음이 축복이라 노래를 불러야 하리. 눈 감으면 지나간 흔적들이 아름다운 단풍잎처럼 책갈피에 곱게 꽂힌다.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고, 누군가의 추억 속에 곱게 자리 잡고 있기를...조용한 도랑물 소리가 흔적을 채우며 흐른다. 굴러가는 추억이 졸졸졸. 흘리는 눈물방울이 줄줄줄. 이끼에 미끄러지다 돌돌돌. 바위에 부딪히다 둘둘둘. 앳된 소나무 머리 위로 뜨뜻미지근한 둥근 햇살이 굴러 오른다. 온몸으로 품는다. 인생은 페달을 밟는 순이 아니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먼 길 돌아가는 나의 성공 사다리는 아직도 빈칸이 빼곡하다. ‘인생을 즐겁게 지낼 뿐인데 부귀가 내 몸을 수고롭게 한다’(김시습의 <草盛豆苗稀> 중에서)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2-07 11:40

송란교 논설위원겸손의 그릇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도 담아내는 양은 무한대다. 오만의 그릇은 태평양 바다만큼 커 보여도 쓸만한 것 한 톨도 담아내지 못한다. 첫사랑과 짝사랑의 거리만큼 차이가 크다. 부족한 겸손이라고 초라한 겸손이라고 허투루 보면 안 된다. 한 줌의 겸손이 쌓이면 한 트럭의 오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여 겸손이 사치를 부린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짜 겸손과 가짜 겸손을 가려내면 될 일이다.겸손을 의미하는 ‘Condescend’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우월감을 갖고 내려다 보다’, ‘잘난 체하다’, ‘거들먹거리다’, ‘자신을 낮추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거만과 겸손은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이다.얄팍한 교만은 다양한 지식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진중한 겸손은 적은 지식으로도 삶을 풍요롭게 한다. 행동하는 겸손이야말로 다양한 지식보다 낫고 겸손한척하는 거짓 침묵보다 낫다.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하는 것은 머릿속이 텅 빈 지식인들이 저지르는 교만의 사치요,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겸손의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오만한 마음에는 탐욕과 무시가 넘쳐 다시 채울 것이 없으나 겸손의 그릇은 다른 사람을 향해 기울어져 있기에 늘 비어 있어도 관심과 사랑으로 가득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오만한 겸손이나 비굴한 오만에 빠진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되는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들에게서 겸손의 씨앗을 찾기란 돌아선 표심을 되돌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꼭 해야만 하는 일에 손도 대지 않음은 오만한 게으름에 빠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베푼 좁쌀 같은 은혜를 크게 내세우지 않고, 허황(虛荒)한 재물이나 명예를 탐내지 않는 절제된 겸손, 배려하는 겸손은 자신을 저주하거나 흉보는 사람을 모두 사라지게 할 것이다. 이웃을 모이게 하는 지름길이다.사람들은 의기소침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보단 패기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더 선호한다. 덕분에 오만한 사람의 자신감에 더 많은 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겸손한 사람의 실질적인 능력을 알 수 없는 대중은 그들을 대함에 있어 습관적으로 능력이 없겠거니 생각한다. 그래서 겸손함을 미덕이라 치켜세우지만, 겸손하고 착한 사람들이 능력 있음에도 낮은 대우를 받음은 이 때문일 것이다.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철이 다시 다가왔다. 후보자의 겸손함은 두 표가 되고, 오만함은 반 표가 되고, 비굴함은 마이너스가 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좋은 기회다. 겸손함의 진짜 위력은 유권자의 표심에서 나온다. 비즈니스 심리학의 전문가 토마스 샤모로-프레무직(Tomas Chamorro-Premuzic) 교수는 “높은 자신감 덕분에 능력이 좋아진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자신감이 높은 사람은 오히려 ‘능력 환상’에 빠져 노력을 게을리해 성공 확률이 떨어진다”라고 했다. 겸손한 척하는 사람은 겸손을 성공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진심으로 보완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하지만 진짜 겸손한 사람은 늘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고치려 하기에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한 표를 어떻게 늘릴 것인가? 유권자를 정말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아는 척 대신 경청이 필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유권자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후보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유권자의 한 표는 때에 따라 두 표가 될 수도 있고, 마이너스 표가 될 수도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겸손으로 얻은 한 표가 결과적으로 그 선거에서 이기는 과반수의 표가 됨이다.거짓이 진실을 이기려 하고, 오만이 겸손을 누르려 한다면 유권자는 표로서 강하게 심판을 해야 한다. 특권에 물들어 ‘내가 난 데’ 하는 허풍쟁이를 확실히 걸러내고, 철면피는 방탄복보다 더 두껍다 하고, 몰염치를 항상 망각의 망토 속에 숨기고 다니는 후보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감히 속지 말고 속히 솎아내야 할 것이다. 좋고 나쁘고는 나중 문제이고 ‘1등 만이 살길’이라 외치며 반칙을 밥 먹듯 하는 후보자를 반드시 물리칠 수 있는 큰 용기가 필요함이다.구제할 마음은 있는데 구제할 힘이 없는 자와 구제할 힘은 있는데 구제할 마음이 없는 자,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권자의 눈동자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표심의 기울기가 점점 벌어지고 있음에 고뇌가 쌓여가는 밤이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1-28 19:23

송란교 논설위원눈이 뽀드득 뽀드득 노래하며 쌓인다. 하얀 찹쌀가루가 시루 안에 차곡차곡 채워지며 단을 높여가듯 발자국 사이로 예쁘게 쌓인다. 사납게 질서를 무너뜨린 발자국을 덮어주고 싶어 눈은 그렇게 소복소복 쌓이고 고봉 고봉으로 담긴다. 물기 가득 머금은 눈송이가 내가 걸어온 발자국 위로 수북이 내리다 그친다. 아무도 상처 내지 않은 순백의 초원이 펼쳐진다. 주당(酒黨)들의 갈지자걸음이 헤집기 전까지는 온통 평화로움 그 자체다.우르르 달려 나온 한 무리 개들이 미친 듯이 한바탕 놀아나니 볼품사납게 이지러진다. 술꾼들이 그 개들을 뒤쫓는다. 주인이 없으면 흥청망청하고 주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처럼, 옴팡지게 짓뭉개니 평화롭던 아름다움도 눈 녹듯 사라진다. 음주 보행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을 그려낸다. 맨정신으로는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음이다. 똑바로 걸어가려 하나 휘청거리는 다리는 골다공증과 친해서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술 깬 후 머리통이 깨질 듯 아프면 어쩌나, 그날 밤 긁어댔던 카드 전표가 눈에 확 들어온다. 큰소리쳤던 말들이 진수성찬이로다. 허풍만발(虛風滿發)한 초라하고 서글픈 기억, 그 기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또다시 만취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이스크림이 질서 없이 녹아내리면 맛도 상하고 체면도 구긴다.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한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내 맛 네 맛도 없이 부어라 마셔라, 고주망태로 한평생 다 보내면 어느 세월에 철이 들까나?눈이 다시 내리면 고운 발자국 남겨보리라 다짐을 해보지만, 그 약속 믿어도 될까. 신년이 되니 청용(靑龍)의 기운에 깃대 의기투합하고 산뜻한 약속과 웅장한 계획을 굴비 엮듯이 엮어낸다. 맛있게 여물어야 할 터인데 작심삼일이 아닌 작심일일(作心一日)도 못 넘기면 이를 어쩌나.<음주 보행>이라는 자작시 한 수 공유합니다.진실 한 잔에 목넘김 찌릿찌릿거짓 두 컵에 정신줄 혼미혼미 탐욕 세 병에 온몸이 비틀비틀비난 말 술에 세상이 흔들흔들 집에 가는 길이 울퉁불퉁 데굴데굴발딱 서고 벌떡 눕고갈지자가 왠말이냐왼쪽으로 굴러 쿵 오른쪽으로 쿵 쿵 쿵 자식들이 보고 있네 해롱해롱 꾸벅꾸벅 누굴 보고 웃고 있나 오늘 한 잔 어때그래 좋아 어디서 어젯밤 그집에서 좋아 좋아 좋아전봇대로 베개 삼고 뭉게구름 이불 삼고 별빛으로 등불 삼고 횡설수설 안주 삼고 지갑마저 바람나고 돌아갈 길 민망하네 휘청휘청 휘영청 보름달이 무겁구나 음주운전 피했더니 음주보행 따라온다 휘청휘청 휘영청 꼴딱꿀딱 딸국질 옛날에는 성을 축조할 당시 공사 담당자의 이름, 직책, 담당 지역 등을 돌에 새겼는데 이를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 돌)’이라 한다. 먼 훗날까지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정책을 입안한 사람들의 이름도 굵게 새겨야 하리라. 국민을 위한 것인지 궁민(窮民)으로 만들기 위한 것인지 후세에 꼭 물어야 하리.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제),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책임이 따른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밤을 틈타 은근슬쩍 담을 넘어 타인의 방에 남긴 발자국이나 익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앞뒤 없이 쏟아낸 온라인상의 말들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리.아름다운 마음으로 함께 걸으면 넓고 편한 길이 될 것이다. 길이 빛나면 따라오는 사람의 마음도 빛날 것이다. 말과 글이 빛나면 독자들의 얼굴과 마음도 빛날 거라 믿는다.“야, 술은 마시는 게 아니고 퍼먹는 거라고” 시끌벅적 어깨동무하고서 한 무리가 지나간다.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비둘기들이 반갑게 아침 인사를 한다. ‘어서오세요’.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4-01-16 11:18

송란교 논설위원근심 걱정을 미리 가불(假拂)해서 사용하지 말고 행복한 미소를 당겨 써보자. 인연이란, 나에게 올 운명이라면 애써 잡아당기지 않아도 다가올 것이고, 닿지 않을 것들이면 굳이 금덩어리 싸 들고 손짓해도 오지 않을 것이다.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두 짊어진 사람 인양하면서, 날마다 내가 근심 걱정을 안 하면 근심 걱정이 없어질까 근심 걱정을 한다고 외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된다. 근심 걱정 대신 행복과 감사라는 단어로 치환을 해보면 어색할까? 나의 말과 생각이 내 인생을 앞세우고 달리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에도 긍정의 아이콘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하리.애당초 나에게 없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찾으려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을 찾자. 태생적으로 잘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잘하려 하지 말고 지금 남들보다 더 잘하고 있는 것을 잘해보려 노력함이 어떨까?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야 발전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불편함이 묻어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더 편하게 더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도 인류 공영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세상은 모두 행복하지 않다. 내가 웃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웃지 않는다. 찡그린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면 언제나 찡그린 얼굴만 보인다. 웃는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자. 다른 사람을 내가 바라보는 거울이라 생각하자. 거울은 바람이 불어도 물결이 일어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니 웃음으로 다가가면 웃음으로 되돌려준다. 메아리 소리가 아름답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를 밝게 기분 좋게 외치면 될 일이다. 웃는 거울 앞에는 웃는 사람이, 찡그린 거울 앞에는 찡그린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다.세상의 변화는 내가 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산해진미가 가득 쌓여있어도 맛있게 먹을 마음이 없으면 배부름을 알 수 없고, 팔방미인이 옆에 있어도 미운 마음으로 바라보면 예쁘게 보일 리 없다. ‘네가 한 번 웃어봐 그럼 나도 웃을게’ 하면서 네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면 이제는 내가 먼저 웃어보는 거다. 바람에 휘날리는 것도 물결에 휩쓸리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날리면 오만상(五萬相)을 다 내보인다. 웃는 모습도 찡그리는 표정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최근 소화가 잘되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 잘 먹고 잘 자는데 왜 속이 더부룩할까? 건강하다 자부했는데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 주치의의 말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혹이 보이는데 암 덩어리인지 잘 모르겠다고 덧붙인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수술하기 전까지 ‘왜 이런 일이 나한테 발생하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숨은 쉬고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 사이 나의 뇌세포는 얼마나 더 정지되었을까? 얼마나 더 사라졌을까?시간이 저만치 갔다. 눈을 떴다. 암 덩어리가 아닌 종양이라 한다. 허탈했다. 그 순간 불안이 환희로, 불만이 감사로, 초조가 여유로, 밀려오는 안도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잠시 쉬어가는 인생을 허락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욕심부리며 달려온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크게 외쳤다. 남은 인생 조금 천천히 걸으며, ‘이것뿐이야’ 보다 ‘이것으로도 넘친다’, ‘겨우 이것 밖에’ 보다 ‘와 이렇게나 많이’, ‘왜’ 보다 ‘오, 우와’, ‘아직도 부족해’ 보다 ‘벌써 넘치고 충분하다’를 자주 외쳐야겠다고 다짐했다.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미소는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음이다. 웃음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이다. 내가 짓는 작은 미소 하나가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표정이나 행동, 생각과 감정까지도 하나로 연결된다. 그래서 행복한 느낌, 우울한 기분, 분노나 두려움 같은 다양한 감정들도 모두 전염되는 것이다. 오늘 한 일이 비록 잠깐 웃어준 것일 뿐이라도 우리는 이미 세상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내 생각을 행복하게 만들어보자. 행복 낚시터에서 행복할 이유를 찾자. 하루 한가지씩 행복할 이유를 꼭 낚아보자. 속 좁은 생각과 딱딱하고 쭈글쭈글해진 마음을 따뜻한 다리미로 반듯하게 넓게 곱게 펴보자.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12-28 17:02

언제부터 ‘법’이라 하는 것이 동네 양아치들 편 가르기에만 사용되었는가? 법을 만드는 사람은 그 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법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만 덮어씌우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그 법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법이라는 칼자루만 마구마구 휘두르고, 법이 정한 대로 해석하고 판결하여 범법에 대한 죄의 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데 자기 맘대로 해석하며 푸석해진 고무줄만 당기고 있다.불쏘시개도 못 되는 허수아비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왜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그들은 언제부터 나하고 동업했는지 알 수 없지만, 꼬박꼬박 세금고지서를 보내오니 분통이 터 진다. 그 고지서를 볼 때마다 열불이 난다. 요즘에는 책이 아닌 것을 책이라 하며 책값 청구서도 수북이 쌓이고 있다. 자랑을 통해 자신을 하늘 끝까지 높이고 비난을 통해 상대의 자존심을 지옥 문턱에까지 낮추려 한다. 체면 따윈 귀신에 홀린 강바람에 실려 보내고 양심 따윈 길바닥에 머리 조아리는 비둘기에게 내주었나 보다. 다정한 눈빛 교환도 하기 전에 엉큼한 청구서부터 내미는 그들에게 헛되이 세금 낼 일은 없어야 하리니, 그들을 꼭 기억하자.내 편만의 지지로 당선되겠다는 총선 출마 예정자를 오랜만에 만났다. 누구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 녹슨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는 기억의 단초(端初)를 찾아내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반가운 마음에 덥석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내 얼굴을 기억이나 할까 하는 두렵고 어색한 마음이었다.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봐 주니 다행이었다. 그는 안부 인사도 나누기 전에 선거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더 가관이다. 친구들이 소통하고 있는 단체방에 출마 소식을 공지로 띄워달라는 것이었다. 그냥 살던 대로 살지 왜 이쪽으로 곁눈질을 하는 걸까? 당선만이 그동안의 소원함을 면죄 받을 수 있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듯, 소통이 먼저가 아닌 돈 통이 먼저라 우기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열심히 살아가면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친구들도 수두룩하다. 마음이 멀어져서 모른 척 지내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편하게 지낼 친구를 찾게 된다. 혼자 잘난 맛에 주변 친구들 무시하며 살다 그 친구마저 마지막 잎새처럼 휑하니 떨어져 나가면 그때 서야 마음 알아주는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큰소리치며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친구들의 응원이고 배려였음이리라.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 가사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그 뒤를 따라온다.인생은 Give & Take다. 세상 태어남에 앞뒤 순서가 있겠지만 존경받음에는 순서가 없다. 받는 것만 앞세우며 살았던 인생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받아야 할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내가 주어야 하는 사람들만 보이게 된다. 그렇다 보니 받아야 할 상대로서 기억에 사라진 친구를 찾게 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면 습관적으로 받고 싶은 목록을 거리낌 없이 내밀게 되는 것이리라. 음식점의 코스 요리는 순서대로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바둑에서도 수 순이 중요하다. 수 순이 뒤바뀌면 살아 있는 돌이 죽게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것이 아름다운 순서이리라.먼저 받고 나중에 주겠다는 것은 정이 아닌 계약거래가 아닌가? 먼저 주고 나면 언제 받을지 몰라서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든다고 정 나눔에 주저하면 언제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까. 뿌린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허허한 빈터에서 무얼 기대할 수 있을까?. 친구와의 만남이 설렘으로 기다려진다면 그는 분명 아름다운 삶을 살았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선거철이 다가온다. 편 가르기도 바퀴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너 누구 아니냐’ 하면서 우선 손부터 붙잡는다. ‘오랜만이다. 거기서 밥 한 그릇 하자’ 하면서 어색한 웃음 한 방울 흘린다. ‘지금 어디서 사는데’ 하면서 돈이 되는지 표가 되는지 열심히 데이터 분석을 한다. ‘한 표 줍소 한 표 줍소’ 밤이 되어도 끝낼 수 없다. 내가 먼저 베풀었다는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 그래도 당선되고 싶은 마음에 어색하게나마 만나야 할 사람이 많은데 돈 통이 바닥이니 이를 어쩌나, 진정한 소통은 뒷전이 될 수밖에. 겨우 하루 동안 주인 노릇 하다 1,460일 동안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두 눈 부릅뜨고 두 귀 쫑긋 열자.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12-16 19:54

송란교 / 논설위원저는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누님댁에서 멀리 않은 양주 불곡산에 수목장(樹木葬)으로 모셨었다. 어머님이 보고 싶을 때면 그냥 편하게 그곳을 찾는다. 그럴 때면 농사를 짓고 계시는 누님댁을 방문하여 일손을 거들곤 했다. 밭에서 바쁘게 손놀림을 하고 계시는 누님은 제가 찾아가면 반가움도 제쳐두시고 하던 일을 계속하신다. 논이며 밭이며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으니 그것을 먼저 해치워야 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럴 것이라 믿는다. 저도 인사는 건성으로 하고 쌓인 일감을 줄이기 위해 곧바로 일을 시작하곤 했었다.다만 누님댁을 떠나올 때가 되면 누님의 마음은 급해지셨다. 어딘가에 준비해둔 수확물들이 있을 것인데 하면서 밥숟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저장창고로 달음박질하고 밭으로 내달리곤 하셨다.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는가 보다. 시골에 사셨던 어머니는 자식들 도회지로 유학 보내놓고서 한참 만에 집에 오면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싸주시고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여 보내려 하셨는데 누님의 마음도 엄마의 마음을 그렇게 꼭꼭 닮아가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챙길 것 다 챙겨주고도 또 빠진 것이 있나 없나 사방팔방 또다시 살피는 것이었다.며칠 전, 절임 배추 가져가서 김장하라는 전화를 받고 밤늦게 누님댁을 찾았었다. 누님댁에 들어서자 집안을 며칠 동안 비워야 하는데 씨암탉에게 먹이를 줄 수 없게 되었다며 닭을 모조리 잡고 계셨다. 그 귀한 암탉을 동생들에게 한 마리씩 안겨주시려는 누님, 받는 동생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누님의 마음은 땅 위의 산정호수보다, 하늘 아래 떠다니는 파란 호수보다 더 넓고 더 아름답다. 저 닭을 어떻게 요리를 할까? 백숙으로 할까? 장조림으로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오래된 씨암탉이니 오랫동안 삶아야 한다”고 귀띔까지 해주신다. 그렇다면 백숙보다는 장조림을 해두고 오래도록 삶아서 떡국 끓여 먹으면 제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질게 견디고 끈질기게 버텨온 씨암탉의 날개와 다리는 질기고 질기다. 좀체 물러지지 않는 악바리 근성을 지니고 있었나 보다. 오랫동안 삶아야 한다는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요즘 암컷이 설친다고 때아니게 눈살찌푸린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암탉이 울면 달걀을 낳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동물에게 쓰는 단어를 사람에게 쓰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동물로 비하(卑下)하는 것이다. 동물에게 동물격(動物格)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분명 인격(人格)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딸, 부인, 어머니, 할머니가 되시는 분들을 ‘암컷’이라 비하했다면, 본인이 알고 사용했든 모르고 사용했든,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표현이기에 분명 고쳐 써야 할 말이다.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사람은 그 무시할 권리를 누구한테 부여받았다는 말인가. 무시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무시하라고 말한 적이 없을 진데 갑자기 그런 대접을 받게 되면 기분 좋을 리 없다. 주먹다짐하지 않으면 다행한 일인 것이다. 분노가 폭발한 동물에게 이성적 판단을 요구할 수는 없다. 특히 먹거리를 앞에 둔 그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싸운다. 무조건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상대로 여길 뿐이다.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으로 덤비고, 앉아서 죽느니 서서 과감하게 싸우다 죽겠다 하면 상대가 누구인들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도 화가 치솟으면 동물이 되는가 보다. 아름다운 인격을 지닌 사람은 저돌적으로 덤비고 무자비하게 물어뜯는 이성 잃은 동물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김장 맛있게 하라 하시며 차에 듬뿍 실어주신 누님의 사랑 목록이다. 타이어가 무겁지만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납작하게 누워 절을 한다. “알 배추, 절임 배추, 쪽파, 대파, 양파, 갓, 무, 무생채, 일반 고춧가루, 청양 고춧가루, 생강, 마늘, 쌀, 씨암탉, 달걀, 단호박, 노란 호박, 콩, 두부, 들깨, 참기름, 삶은 옥수수, 도토리 가루, 묵, 밤, 감자, 고구마. 수수, 뽕나무버섯, 상추, 얼갈이, 청국장, 떡국떡, 만두, 땅콩, 엄마의 마음” 등등. 언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준비해두었는지 참으로 고맙고도 감사할 일이다. 묵직하고 넉넉한 마음 안고 집으로 오는 길에 어머니가 계신 불곡산 너머 서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석양 노을에 걸터앉은 엄마를 닮아가는 큰 누님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니 왠지 숙연해지는 마음이다. 이 고운 빚을 언제 갚을까? 텅 빈 저장창고를 무엇으로 채워드릴까?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11-30 10:30

송란교/논설위원철없는 빈대가 시도 때도 없이 날뛰니 그놈 잡으러 독한 살충제가 뿌려질 모양이다. 선거일이 꽤 멀리 있는데 설익은 자들은 벌써 당선자 신분이라도 된 듯 오만추태(傲慢醜態)를 부리려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짓거리가 꼴값을 떤다’고 하더이다.예전에 모 대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던 시절, 교수님과 함께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밤늦게서야 일을 마친 교수님께서 택시를 타고 가셨는데, 그 택시가 일명 총알택시였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교수님께서 출근하지 않아 그 사유를 알아보니 온몸이 굳어서 옴짝달싹 못 하겠기에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곡예 운전, 과속, 급정거를 반복하는 통에 온몸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고 손잡이만 꼭 붙잡고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다 보니 놀란 근육이 뭉쳐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속이 훈장이고, 난폭운전이 영웅이던 시절도 있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다. 급하게 치닫고 급하게 멈추면 차량 그 자체도 힘들고 타고 있는 승객도 불안하고 걸어가고 있는 행인도 놀라게 된다. 과적 상태로 과속하며 좌로 우로 왔다 갔다 회전하면 전복(顚覆)될 수밖에 없다. 수족관에 실려 남해안 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물고기들이 모두 죽었다면, 그 원인은 스트레스가 아닌 뇌진탕이 아닐까 싶다.선거철이 다가오니 묘한 일들이 다반사로 생기고 있다. 국회의원 자리를 마치 제 호주머니 속 물건인 양 취급한다. 표라는 물건이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데 자기 것이라 우기며 내놓으라 생떼를 쓰는 것이다. 빚진 사실이 없음에도 빚 갚으라고 협박을 당하는 꼴이다. 내 물건이 언제부터 그 사람들 물건이 되었더란 말인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민심을 향해 미소짓는 마네킹에 속옷만 걸쳐둔 체 그냥 서 있으라 한다. 가을 추수 끝난 들판에 허접한 허수아비처럼 서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에 다를까?탄저병(炭疽病)과 탄핵병(彈劾病)은 같은 종류의 병인가 보다. 식물이 탄저병에 걸리면 볼품이 없고 가치도 없게 된다. 그 병이 발생하면 좀체 박멸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탄저균(Bacillus anthracis) 감염으로 급성 감염질환에 걸리기도 한다. 탄저병에 걸린 고추는 신속하게 떼어내야만 곁에 있는 싱싱한 고추가 병들지 않는다. 검은 숯 빨간 녹이 갉아 먹은 고추는 전혀 쓸모가 없고 아름답지도 못하다. 주인의 마음만 아프게 할 뿐이다. 탄저병은 해 갈이로 끝이 날 수 있는데 탄핵병에 걸리면 그 완치의 끝을 알 수가 없다. 탄핵병에 물 들면 모두 단풍잎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백주(白晝) 대낮에 태양이 두 개 떠 있다면 그림자도 두 개가 그려진다. 두 개의 태양을 이쪽저쪽 바라보라고 눈이 두 개 달렸을 리 만무하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태양을 서로 강요하다 보니 눈이 쫙 찢어진다. 자신이 숭배하는 자에게 서로 끌어가려 하니 짧은 가랑이도 길게 늘어진다. 검은 눈동자는 사라지고 흰 눈동자만이 사납게 춤을 춘다. 짜디짠 소금에 절인 자반고등어는 어디를 보고 있어야 할지 어리둥절하여 두 개의 눈동자를 계속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지럼증이 심해져서 끝내는 멀미를 하게 된다. 그 고등어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그 양아치 같은 사람들의 눈동자보다 더 싱싱하게 보인다면, 설명이 가능할까?체크 앤 밸런스(Check & Balance, 견제와 균형)는 어디에 있는가? 국가나 단체는 어떤 사람에게 권한을 부여하면 그에 따른 책임도 함께 지우는 것이 상례다. 그것을 무시하고 권한만 주어지거나 책임만 부여한다면 그 조직은 일순간 무너지게 된다. 달콤한 권리만 갖겠다고 악을 쓰면서 왕의 DNA를 지녔다고 유세 떠는 사람들이 스스로 태양의 몸종이 되겠다고 아귀다툼이다. 민심을 따르는 종이 되려 노력하면 더 좋으련만, 이를 일컬어 노안비슬(奴顔婢膝)이라 하는가 보다. 후세 교육을 어이 할꼬.두 개의 태양이 함께 떠 있으려 하니 받들어 모실 국민은 가랑이 찢어지게 생겼다. 태양이 두 개면 온 나라가 더 따뜻해야 할진 데 갈수록 더 추워진다. 태양이 두 개면 낮이 더 길어져서 그만큼 할 일이 많아야 할 것인데 일감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해가 뜨면 해가 뜬다고 화를 내고, 달이 뜨면 달이 뜬다고 화를 내고, 화낼 거리가 없으면 없다고 또 화를 내고....아무때나 도지는 이 홧병을 어찌 불사를꼬.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11-17 10:28

 송란교/논설위원수만 대의 자동차를 싣고서 이 항구 저 항구를 드나드는 화물선도 한 조각 한 조각, 수만 개의 작은 철판을 붙여야 만들어진다. 바다 위를 떠다니려면 물샐 틈 없이 붙여야 한다. 날마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수만 개의 부속품을 붙이고 연결해야만 굴러간다. 눈곱만한 제품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이다. 치열한 선거판에서 당선되려면 유권자의 표심을 한 표 한 표 금붙이 끌어모으듯 모아야 한다. 그것도 상대방보다 최소한 한 표는 더 많아야 이기는 것이다. 역사의 유물이라는 웅장한 모습의 피라미드 건축물도 수만 개의 돌덩어리를 쌓고 이어 만든 것이다. 철판 조각 하나 표심 하나 돌덩이 하나가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완성품은 어느덧 고철이 되어간다. 쓸만한 부속품들은 다른 제품으로 환생하기 위해서 조각조각 잘리게 된다. 쪼개고 합하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쓸모있는 제품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착한 민심은 선거가 끝나면 악한 무리에게 처절하리만큼 무시된다. 왜 이것만은 고쳐지지 않을까?단체로 하는 스포츠게임에서는 참가자 모두가 합심 단결해야 이길 수 있다. 마음이 쪼개지면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음이다. 어려운 시국, 어려운 상대일수록 각각의 마음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해야 한다. 방향성 잃은 마음을 사방팔방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으면 아니 될 일이다. 혼자 사냥했더라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니던가?자신은 떳떳하지 못하면서 짐짓 떳떳한 척 다른 사람의 떳떳하지 않음을 지적한다면 누가 그의 말이 옳다 하고, 누가 그의 말이 정답이라 말할 것인가? 온갖 못된 짓만 하다가 자식들이 그 못된 짓을 따라 하면 왜 따라 하냐 나무랄 것인가? 자식은 부모를 앞세워 배우고 따라 한다. 천사의 말, 천국의 말 보다 악마의 말, 지옥의 말을 먼저 가르치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익힐 것인가. 솔선수범(率先垂範)하라 했더니 못된 것만 먼저 하려 들면 정말 곤란하다.말이 쪼개지면 병든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마음이 잘게 부서진다. 말의 뜻이 갈리면 믿음과 겸손과 존경이 사라지고 비난과 무시와 불신만이 커진다. 말의 뜻이 갈지(之)자면 법의 잣대도 구부러진다. 물이 가는 길을 법(法)이라 하였거늘 법의 해석이 이리저리 갈리면 그 잣대는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오히려 악인의 손에 칼을 잡히는 꼴이다. 말의 뜻과 법의 잣대가 흔들리면 결국 사실과 진실은 멀어지고 거짓과 오해만 늘어나게 된다. 내 편 네 편 우리 편 말 사전이 필요하다면 분명 불통의 사회인 것이다.귀가 시리도록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 코 앞이다. 알을 품은 황제펭귄들이 한데 모여 몸을 비비면서 서로의 체온으로 혹한(酷寒)의 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허들링(Huddling)’의 지혜가 생각난다. 선거철이 다가오니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기형적이고 불공평한 선거구획정을 지칭함)도 벌떡 솟아나려 한다. 날이 차면 따뜻한 아랫목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양지바른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 소통이 있는 따뜻한 말, 맛있는 말일 것이다.말이 소통의 기능을 잃어버리면, 한쪽에서는 이어 붙이려 용접봉을 하염없이 녹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서로 떼어내려 날카로운 그라인드 날을 태우고 있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둥글납작한 무거운 망치 내리치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따름이니 서로 듣는 게 없게 된다. 이쪽에서 소통하자 손 내밀면 어깃장을 놓고 저쪽에서 통합하자 마음 열면 삿대질을 일삼으면, 악마의 말이 자라서 잉꼬부부를 갈기갈기 쪼개 놓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무엇을 쪼개고 어떻게 합칠까? 표가 되고 돈이 되면 무엇인들 못 할까. 어딘가에 숨어 구르는 정답이야 있겠지만 착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은 합하고 악한 마음 미운 마음은 줄여야만 행복이 함께 할 것이다.해가 뜨면 만나서 함께 일하고 달이 뜨면 헤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삶이다. 가위는 할 일이 없으면 허리를 포개고 할 일이 생기면 다리를 벌린다. 한 송이 꽃이 아름다우면 모아 놓은 꽃도 아름다우리.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 불통제거(不通除去)와 흥리제해(興利除害)를 생각해 본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11-03 14:09

송란교2023년 여름, 우리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 어쩌면 가장 시원했던 여름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기우였으면 좋겠다. 예상치 못한 이상기후는 각종 불편한 기록을 날마다 갈아치우고 있다. 지구온난화라는 단어가 낯설게 다가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는 이미 열대화에 익숙해지고 있음이다. 폭우와 폭염은 절친인가? 일란성 쌍둥이인가 이란성 쌍둥이인가? 불덩이 같은 날씨도 느림보 태풍도 옆 나라의 산불도 인류가 미처 경험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자연의 화난 경고음이다. 그 외침들이 큰 걸음으로 다가온다.글 제목과 어울리는 <그래서 너는 더 예쁘다>라는 필자가 작사한 곡을 옮겨본다.「바다 건너 찾아온 님 / 태산 넘어 찾아온 님 / 구름 타고 찾아온 님 / 내님이 찾아온다 / 그래서 너는 예쁜 향기를 풍기고 //」「해가 뜨면 떠나갈 님 / 달이 지면 떠나갈 님 / 이슬처럼 떠나갈 님 / 내님이 떠나간다 /그래서 너는 진한 그리움 남기고 //」「가시밭길 헤치고 / 끊어진 다리 잇고 / 뚱뚱한 비 맞으며 / 우린 기다린다 너를 /그래서 너는 언제나 고맙다 //」달빛 사이로 너의 고운 마음이 고이고 별빛에 걸린 너의 맑은 눈빛은 반짝이는 옥구슬처럼 구른다. 달무리 너머로 생명수 같은 빗물이 넘친다. 구름사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디면서 땅으로 미끄러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서쪽 하늘을 향해 잰걸음으로 넘어간다. 빗방울이 잠시 머물다 간 그 자리에 너의 예쁜 마음 미운 마음도 함께 머물다 간다. 어둠이 밀려오면 하얀 이슬은 안개를 머금고서 고요한 새벽을 부른다. 탈 없이 지낸 하루가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의 범위는 정해져 있지 않다. 매일 매일 매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를 외치면 될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도록 넘치는 지혜와 아름다운 인정이 함께 하면 좋겠다. 여길 보고 저길 보고 사방팔방 두리번거리며 감사의 춤을 추며 보름달보다 더 커다란 행복 미소를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배부른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더더욱 좋겠다. 파란 하늘 맑은 바람이 상쾌한 하루를 부른다. 햇님은 서둘러 솟아오르고 달님은 쫓겨 가듯 넘어가고 별빛은 굶주린 듯 희미해진다. 해가 떠있는 동안 숨은 보물찾기라도 하듯, 침침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발밑에서 담벼락까지 샅샅이 뒤져 찾아내는 것이 겸손과 배려라는 보석이었으면 좋겠다. '덕분에 행복한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이 흘린 부스러기를 먹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 핸드폰에 코를 박고 길을 건너다 다가오는 사람과 부딪히면 누가 잘못했을까? 들이박고서 상대가 피하지 않았다고 화를 낼 것인가? 백미러만 보고 운전할 수 없고, 뒤따라 오는 너만 바라보며 달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산이 없다고 핸드폰으로 비를 막으려는 거친 오만은 부리지 말자. 꽃비와 단비 사이에 걸터앉아 가기 싫어 서성거리는 여름을 보낸다. 주저주저 주춤거리는 가을을 향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시절 인연은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 뒤바뀌고 있다. 바람결에 흐느적거리는 꽃들도 푸르게 물들었던 들판도 이제는 황금빛으로 바뀐다. 너와 나의 발길은 다르다. 어느 곳을 지나왔는가에 따라 여름내 흘린 땀의 양에 따라 신발의 닳아진 모양도 모두 다르다. 다름은 그렇게 일상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태풍이 큰 말썽 없이 지나갔다고 서운해하거나 불평하는 그대여, '그만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자.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말,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소문난 태풍에 피해가 없네'라며 허탈해하면 어쩌란 말인가? 미풍(微風)에도 농작물이 쓰러지면 농부님네 마음은 더 아프다. 왜 그걸 모를까?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공감과 소통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서로 아끼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덜 자란 땡감이 스치는 치맛바람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아스팔트 위로 '툭 툭' 떨어진다. 아깝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08-24 16:41

송란교/논설위원갑자기 정전된 듯 사방이 온통 깜깜한 밤에 장대비는 어느 지역에 물 폭탄을 쏟아부을지 번개 보고 길을 안내하라 하는가 보다. 질러가는 길목에서 태풍보다 먼저 도착하려고 장애물이 듬성듬성 널려 있으면 자동차 경적(警笛)을 습관적으로 누르는 듯 천둥소리로 앞길을 정리한다. 굵은 빗방울은 그렇게 천둥 번개 앞세우며 어둠의 길을 뚫는다. 회오리바람이 일어 땅에 떨어진 비를 다시 하늘로 올려보내기도 한다. 그러니 안개에 묻힌 이슬비는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 하고 어정쩡 휘날린다. 그러다가 목 긴 장화 속은 물론이고 속바지에까지 헤집고 들어온다.먹구름 사이에 숨어 있다 불쑥 튀어나오는 앵두 알만한 우박도 가세한다. 한동안 머금고 있던 축축한 물방울의 무게를 더는 지고 가기 힘들다고 모두 풀어헤친다. 봇짐이 터진 것이다. 양수(羊水)가 터지면 아이의 울음소리 우렁차지만, 봇물이 터지면 동네 사람들의 악! 소리만 들린다. 누가 주룩주룩 사납게 날뛰며 밤새 우는 비를 달랠 수 있으리. 가로로 드러눕는 비, 차양 넓은 우산조차 수줍게 한다. 빗물에 불어터진 발가락, 축축한 신발 신기가 버겁다. 뽀송뽀송한 양말이 정말 그립다.요즘 내리는 비는 아련한 추억이 서린 그런 순한 비가 아닌 듯하다.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고마운 비는 더더욱 아닌 듯하다. 어디에선가 왕창 두들겨 맞고 이곳으로 몰려와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에는 넓은 지역에 골고루 내리던 비가 이제는 화살이 되어 좁은 과녁을 바늘처럼 마구마구 찔러댄다. 어쩌면 피의 복수를 꼭 해야겠다는 기세로 덤빈다.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비는 그냥 순한 비, 땅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비는 사나운 비, 옆에서 옆으로 날리는 비는 안개비, 가랑비인들 어찌 밑으로만 내리려 고집 피울 수 있겠는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얹혀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浮萍草) 신세다. 그런 빗속을 뚫고서 100년 묵은 비단구렁이가 사람들 몰래 용이 되려 하늘로 오르고 있을까? 덩달아서 날개 없는 이무기도 하늘 높이 오르려다 그냥 미끄러지며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제방(堤防)이 터져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도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답’이라 외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 반쯤 쪼개지다 만 산허리쯤에서 물난리에 놀란 황소는 황토물 뒤집어쓴 풀을 뜯는다. 날파리 초파리 쉬파리 똥파리가 눈썹에 앉아도 왕눈만 끔벅거린다. 불어난 물줄기를 타고 상류로 올라오다 낚시코에 걸린 붕어는 주둥아리만 뻐금거리고 있다. 아이코! 내 입이 방정이로구나 하면서 통곡을 하는 모양새다. 비를 벗 삼은 모기마저 허물어진 집안으로 쳐들어와 혈세를 내놓으라 수심 어린 종아리를 야무지게 물어뜯는다.퉁탕 퉁탕 흙탕물이 들판을 무작정 가로질러간다. 둑을 무너뜨린 여세를 몰아 물갈퀴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길을 내고 있다. 줄을 서본 적이 없기에 뒤에서 밀면 미는 대로 그냥 냅다 앞으로만 달린다. 가로막는 자 용서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각종 농작물을 집어삼키며 구부렁길을 만들어 놓는다. 기다란 능구렁이가 사람들의 정성이 모자라 승천하지 못했다고 화풀이를 하는 듯 그렇게 으르렁대며 기어간다. 간짓대처럼 키 큰 옥수수 대를 무너뜨리고 잘 익은 옥수수마저 쓱쓱 훑고 지나간다. 아직 덜 자라 키 작은 들깨는 어이할꼬? 농부의 마음을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대로변 사거리에 만국기도 아닌 현수막이 나불거린다. 적당한 눈높이에서 길게 드러누워 바쁜 발걸음을 붙잡는다.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고, 상대편 사람들 마음에 병이 생기라고 주문을 걸듯 화를 돋게 하는 글귀들이다. 바늘귀로만 하늘을 보려 하는 세상인심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름답지 못한 현수막의 글귀들로 하루의 시작이 상쾌하지 않고 하루의 끝이 고통스럽다. 예쁜 말, 맛있는 말, 격려와 위로의 말이 아닌 술맛 밥맛 오만 정 다 떨어지게 하는 말들을 훈장처럼 내걸고 있으니 말이다. 맛있는 말이 걸리면 하루가 행복하고 입꼬리도 살짝 미소 지을 텐데.자연이 오만방자한 인간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럴 줄 몰랐다’라는 변명은 이제 그만하자. 지금부터는 우리 세대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일들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 발상의 대전환이 절대 필요하다. ‘내가 난 데’하는 교만과 자만이 아닌 ‘우리 다 함께’라는 겸손과 배려만이 정답일 것이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08-07 14:40

송란교아름다움과 부의 상징인 귀걸이를 보면서 귀인과 걸인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멍때리며 생각 해본다.귀걸이를 장식용으로 사용한 역사는 기원전 3천 년 전으로 추정되며, 가장 오래된 귀걸이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도시 우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류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수메르에서 이러한 보석이 나왔다는 것에 견주어 볼 때, 아름답게 보이려는 본성은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있었음이다. 오래전에는 여신(女神)의 지위를 갖기도 했으며 부적(符籍)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고, 최근에는 권위나 부를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사용되기도 한다.귓불에 매달린 아름다운 귀걸이 덕분에 몇 년은 더 젊어 보인다고 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그런데 한여름에 치렁치렁 능수버들 가지 처지듯 목까지 흘러내리는 귀걸이, 땀 냄새 자욱한 지하철 안에서 내 코밑에 매달려 있으니 이를 어쩌나. 아름다움이 지나쳐서 다른 사람에게 걸리적거림을 안기고 있음이렷다.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본성을 어찌 나무랄 수야 있겠는가만, 외적 아름다움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귀걸이를 마음속 깊은 곳에 달아 놓으면 누가 바라볼 것이며 어찌 아름답다 여길 것인가. 하지만 20여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콧구멍은 물론이고 눈동자도 어디를 향해야 할지 조금은 불편한 시간을 함께해야 했다.국가나 단체의 유공자로 선정되면 금전적인 것을 포함하여 알게 모르게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에게는 일시적인 보상이나 배상이 주어 지지만 유공자에게는 당사자는 물론 유족에게까지 상당 기간 지원이 이루어지고 그 명예를 오랫동안 기리게 된다. 유공자는 사회나 민족, 단체를 위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기에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본받게 하려고 공적 조서를 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에 이런 공적 조서나 명단을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거짓 유공자와 거짓 공적 조서는 진짜 유공자들을 서글프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기려야 할 공의 가치마저 크게 훼손시키는 것이다. 유공자를 죄인이라 낙인을 찍는 일이 아니라면 왜 공적 조서가 공개되면 안 되는 것일까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다른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자랑할 수 없는 행적이 어찌 공적이라 할 것이며 어찌 유공자라 할 것인가? 함께 칭송하고 함께 기려야 할 가치를 내 편만을 위해 너무나 쉽게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찌 숨어서 칭찬받으려 하는 것일까? 공적 조서는 포상(褒賞)과 표창(表彰)의 기본이 되는 것이지 숨겨둬야 하는 죄상(罪狀)은 아닐 것이다.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귀걸이가 남들이 흉하다 하면 이를 어쩌나? 그런 귀걸이라면 누가 매달고 다니려 하겠는가? 공적 조서가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 받는 범죄 조서로 둔갑을 한다면, 누가 감히 유공자인데 하면서 공적 조서를 내보이려 하겠는가. 꼭꼭 숨겨 두어야 할 창피한 일이라면 어찌 유공자의 공적 조서가 되겠는가 말이다.극소수만을 위한 특별한 법을 만들어 놓고서 그 법 위에 올라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공익을 담보한 정정당당한 법이라 우기고 싶은가? 내 편만 끼리끼리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세상 밖으로 들춰지는 것이 두려운가? 곳간에 세워둔 쌀뒤주에 몰래 숨어 들어가 쌀을 축내고 있다 주인에게 들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생쥐 꼴인가?목이 터지도록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외쳤던 잠들지 못한 원혼을 달래려 이런 법을 만들었을 것인데, 모두가 동의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법이 제정되면 좋겠다. 국민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할 선한 가치가 일부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음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내가 안 하면 누가 하지?’와 ‘내가 안 해도 누가 하지!’라고 편이 갈리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후배들이 못된 것만 배운다고 나무라기 전에 못된 짓만 가르치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07-13 15:22

 송란교/논설위원어느 지인과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시어머니가 주제로 떠올랐다. 팔순 중반을 넘으셨는데도 기억력이 육십 대인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뭔 줄 알아?’ 하면서 불쑥 내민 말이, ‘머리를 쓰고 살아야지 가두거나 먹어 버리면 안 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머리를 자주 쓰지 않으면 조금 전에 보았던 맥문동이라는 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자꾸 시어머니에게 되묻게 된다’고 덧붙였다. 쓰지 않아 녹슨 머리로는 방금 본 것조차도 기억하는 게 버거운데, 골방에 갇힌 오래된 추억들을 어찌 생생하게 되새김할 수 있겠는가?머리를 예쁘게 쓰지 않으면 녹(綠)이 먹어 버리고 마음을 아름답게 베풀지 않으면 독(毒)이 쌓인다. 타고난 재능을 아끼고 살다 보면 장롱 속 운전면허증이 될 뿐이다. 소중한 것일수록 감추고 아끼면 똥이 된다는 선현(先賢)의 말씀은 결코 틀리지 않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생각 좀 하며 살지’, ‘머리 좀 쓰며 살지’, ‘마음 좀 넓게 쓰며 살지’. 이런 말을 듣기 전에 마음을 ‘넓게 쓰면 넓어지고 좁게 쓰면 좁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좋겠다. 서로 나누고 함께 어울림에 모두 당당하면 더 좋겠지요.‘나이는 혼자 먹어도 머리는 혼자 먹지 말자’.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말할 기회가 없게 되고, 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 쓸 일도 머리 쓸 일도 없게 된다. 혼자 꾸역꾸역 먹는 음식이 무에 그리 맛이 있을까. 물건은 누군가가 쓰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지만, 머리나 생각은 자신이 쓰지 않으면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조차도 그럴 것이다. 나누는 것이 어디 머리만 있겠는가만 마음도 웃음도 미소도 있음이다.무덥고 후텁지근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럴 때 ‘시원한 내 웃음 사이소’ 하고 외치면 지나가는 사람이 우스워서 따라 웃을 것이다.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커다란 그늘막이 웃음 우산인 듯 쉼과 웃음을 나누어주고 있다. 빈손이어도 반갑게 미소지어주는 부자의 마음을 나눌 수 있어 좋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좁은 공간을 빌려 쓰는 것이지만 그냥 고맙다. ‘자주 오면 뭐가 있는가 아니면 뭐가 생기는가?’, ‘생기긴 뭐가 생긴다고 그래, 정이 쌓이는 것이지.’만두를 맛두로 읽어 보면 어떨까? 정말 만두가 맛있다는 느낌이 팍팍 올까? 생각의 틀을 바꾸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모순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도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불편함을 초래하는 방해물로 변하기도 한다. 고정관념 또한 그렇다. 그래서 그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창조적인 발상을 거듭해야 한다. 그래야 발전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리라.참신한 기획과 새로운 발상 그리고 엉뚱한 생각들이 우리의 삶을 늙지 않게 한다. 지금은 우레같은 박수를 받는 말조차도 한 달이 체 지나기도 전에 꼰대 같은 말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늙은 꼰대 선생이 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말과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 늙은이와 어른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에서 온다고 믿는다. 한번 쓰고 버려지면 아까운 꽃처럼, 한 번 보고 지나친 사람도 아까울 때가 있다. ‘아나바다’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의 줄임 말이다.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마음도 아나바다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녹슨 생각, 부패한 음식, 떠난 사랑을 볼 때면, 마음과 육신의 게으름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 백발에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치매기 하나 보이지 않는 어른들을 볼 때면 평소에도 꾸준히 머리를 쓰고 있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 보 걷기에는 날마다 도전하면서 머리 쓰는 것에는 왜 평생 동안 게으름을 피우려 하는가?우리가 기다리는 내일은 결코 오지 않으리, 날이 새면 또 다른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일어나는 즉시로 ‘오늘은 무조건 잘 될 거야!’라고 외쳐야 하리. 오늘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면 그 선물은 우수마발(牛溲馬勃)에 그칠 것이다.

뉴스 | 송란교 기자 | 2023-06-30 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