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음을 닮아가는 큰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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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음을 닮아가는 큰 누이
  • 송란교 기자
  • 승인 2023.11.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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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 / 논설위원
송란교 / 논설위원

저는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누님댁에서 멀리 않은 양주 불곡산에 수목장(樹木葬)으로 모셨었다. 어머님이 보고 싶을 때면 그냥 편하게 그곳을 찾는다. 그럴 때면 농사를 짓고 계시는 누님댁을 방문하여 일손을 거들곤 했다. 밭에서 바쁘게 손놀림을 하고 계시는 누님은 제가 찾아가면 반가움도 제쳐두시고 하던 일을 계속하신다. 논이며 밭이며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으니 그것을 먼저 해치워야 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럴 것이라 믿는다. 저도 인사는 건성으로 하고 쌓인 일감을 줄이기 위해 곧바로 일을 시작하곤 했었다.

다만 누님댁을 떠나올 때가 되면 누님의 마음은 급해지셨다. 어딘가에 준비해둔 수확물들이 있을 것인데 하면서 밥숟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저장창고로 달음박질하고 밭으로 내달리곤 하셨다.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는가 보다. 시골에 사셨던 어머니는 자식들 도회지로 유학 보내놓고서 한참 만에 집에 오면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싸주시고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여 보내려 하셨는데 누님의 마음도 엄마의 마음을 그렇게 꼭꼭 닮아가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챙길 것 다 챙겨주고도 또 빠진 것이 있나 없나 사방팔방 또다시 살피는 것이었다.

며칠 전, 절임 배추 가져가서 김장하라는 전화를 받고 밤늦게 누님댁을 찾았었다. 누님댁에 들어서자 집안을 며칠 동안 비워야 하는데 씨암탉에게 먹이를 줄 수 없게 되었다며 닭을 모조리 잡고 계셨다. 그 귀한 암탉을 동생들에게 한 마리씩 안겨주시려는 누님, 받는 동생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누님의 마음은 땅 위의 산정호수보다, 하늘 아래 떠다니는 파란 호수보다 더 넓고 더 아름답다. 저 닭을 어떻게 요리를 할까? 백숙으로 할까? 장조림으로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오래된 씨암탉이니 오랫동안 삶아야 한다”고 귀띔까지 해주신다. 그렇다면 백숙보다는 장조림을 해두고 오래도록 삶아서 떡국 끓여 먹으면 제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질게 견디고 끈질기게 버텨온 씨암탉의 날개와 다리는 질기고 질기다. 좀체 물러지지 않는 악바리 근성을 지니고 있었나 보다. 오랫동안 삶아야 한다는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요즘 암컷이 설친다고 때아니게 눈살찌푸린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암탉이 울면 달걀을 낳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동물에게 쓰는 단어를 사람에게 쓰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동물로 비하(卑下)하는 것이다. 동물에게 동물격(動物格)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분명 인격(人格)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딸, 부인, 어머니, 할머니가 되시는 분들을 ‘암컷’이라 비하했다면, 본인이 알고 사용했든 모르고 사용했든,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표현이기에 분명 고쳐 써야 할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사람은 그 무시할 권리를 누구한테 부여받았다는 말인가. 무시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무시하라고 말한 적이 없을 진데 갑자기 그런 대접을 받게 되면 기분 좋을 리 없다. 주먹다짐하지 않으면 다행한 일인 것이다. 분노가 폭발한 동물에게 이성적 판단을 요구할 수는 없다. 특히 먹거리를 앞에 둔 그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싸운다. 무조건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상대로 여길 뿐이다.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으로 덤비고, 앉아서 죽느니 서서 과감하게 싸우다 죽겠다 하면 상대가 누구인들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도 화가 치솟으면 동물이 되는가 보다. 아름다운 인격을 지닌 사람은 저돌적으로 덤비고 무자비하게 물어뜯는 이성 잃은 동물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장 맛있게 하라 하시며 차에 듬뿍 실어주신 누님의 사랑 목록이다. 타이어가 무겁지만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납작하게 누워 절을 한다. “알 배추, 절임 배추, 쪽파, 대파, 양파, 갓, 무, 무생채, 일반 고춧가루, 청양 고춧가루, 생강, 마늘, 쌀, 씨암탉, 달걀, 단호박, 노란 호박, 콩, 두부, 들깨, 참기름, 삶은 옥수수, 도토리 가루, 묵, 밤, 감자, 고구마. 수수, 뽕나무버섯, 상추, 얼갈이, 청국장, 떡국떡, 만두, 땅콩, 엄마의 마음” 등등. 언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준비해두었는지 참으로 고맙고도 감사할 일이다. 묵직하고 넉넉한 마음 안고 집으로 오는 길에 어머니가 계신 불곡산 너머 서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석양 노을에 걸터앉은 엄마를 닮아가는 큰 누님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니 왠지 숙연해지는 마음이다. 이 고운 빚을 언제 갚을까? 텅 빈 저장창고를 무엇으로 채워드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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