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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의 북치고 장구치고>자존의 요 강 타존의 저 강논설위원
김정숙 논설위원

황정은의 소설 《계속하겠습니다》에서 등장하는 나나가 결혼 전 아기를 만든 남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시아버지 될 사람이 사지가 멀쩡한데도 평생 동안 요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 거실에 화장실이 한 개, 방 안에 화장실이 한 개, 무려 화장실이 실내에 두 개나 있는데도 아직도 요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 요강을 시어머니 될 사람이 평생 비우고 사는데 그런 가정환경이 이상하지 않은 거라고, 부부니까 그런 거라고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남자의 삶의 태도 때문이다.

물론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기를 만들자고 했던 것이어서 큰 핑계거리가 잡힌 것이었는지는 소설 속 이야기라서 깊이 물어 볼 방도가 없었다.

아기의 아버지 될 남자는 여자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괴로워하지만 결국 아기의 엄마는 결혼을 거부하고 편모슬하에서 아기를 낳을 것을 계획한다.

소설의 아기 엄마가 이런 이유에서 결혼을 거부한 마음은 어떤 것일까?
사지 멀쩡한 시아버지가 밤새 눈 오줌을 받은 요강을 비우는 시어머니의 꼴이 될 까봐 그게 싫은 것일까?
그런 환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살아 온 아들이 훗날 자신의 아내에게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일까?
남자의 아버지가 했던 대로 아들도 아내를 “어이”하며 부르고 지시하며 밤새 볼일을 본 요강을 비우게 할 까봐 그랬을까?

그렇다면 그 남자는 왜 그런 가정환경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랐을까?
남자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엄마로부터 무한한 희생과 헌신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일까?
워낙 순둥이로 자라서 부모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순응하며 자랐기 때문일까? 무서우리만치 권위적인 아버지의 기운을 받고 자랐기 때문일까?
어린 시절 우리 집에도 요강이 있었다.
스테인리스로 된 요강은 중년 부인의 펑퍼짐한 엉덩이 같기도 하고 커다란 사과모양 같기도 했는데, 꼭지가 달린 뚜껑을 모자처럼 눌러 쓴 둥그런 요강이 밤마다 마루에 놓여 있었다.
손잡이가 없어서 양쪽 밑 둥을 두 손으로 잡아야 미끄러지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요강은 들고 옮길 때 마다 꿀 단지 옮기듯 두 손으로 모셔졌다.

엄마는 새벽부터 나가고 오빠들은 깜깜한 밤중에도 대문 밖 개울가에서 인간 분수처럼 오줌을 싸서 요강을 사용하지 않으니 언니와 내가 요강 청소 담당이었다.

워낙 게으르고 잔대가리가 뛰어난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요강 비우는 당번을 피했다.
별수 없이 언니가 아침마다 요강을 비우고 저녁엔 우물가에서 낮 동안 펌프 물에 우려 놓은 요강을 마루 한 구석에 갖다 두곤 했다.

한 겨울의 영하 기온이 마루에 넘쳐 날 땐 요강도 꽁꽁 얼어서 꼭지 달린 뚜껑과 몸체가 달라붙었다.
그걸 열려면 잠시 동안 품에 안고 있어야 했다. 누군가 요강에 오줌을 누면 요강은 더 이상 얼지 않았다. 

언니와 나는 요강을 변소에 비울 때 마다 코를 쥐고 밤새 가족들이 쏟아 낸 암모니아 냄새를 맡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도 아침에 요강을 비우지 않으면 아버지가 불호령을 쳐서 언니는 늘 요강부터 비우고 학교에 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엔 마루 한 구석에 언니가 갖다 둔 요강이 식구의 오줌을 받으려고 앉아 있었다.

언니가 수학여행에 가거나 새벽 일찍 집을 나서게 되면 꼼짝없이 내가 요강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난 그 일이 싫어서 이따금씩 요강을 내다 버리곤 했다. 그럴 때 마다 엄마는 멀리 내다 버린 요강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귀신처럼 다시 찾아왔다.

깨부수면 쓰지 않을까봐 깨버리려 해도 스테인리스 요강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던지고 던져서 요강이 쭈글쭈글해 지자 엄마는 더 견고하고 커다란 무쇠 같은 요강을 사왔다.
밤새 요강을 쓰지 않기 위해 물을 마시지 않거나 자기 전에 오줌을 쥐어짜서 누고 자기도 했지만 나만 누지 않는다고 요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아니어도 식구 중 누군가가 한 밤중에 일어나 “쉬~이이” 하며 빈 요강을 채웠다.
잠결에 요강에 내리는 오줌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소름이 돋았다.
요강 비우는 일이 싫어서 아버지한테 변소 가는 길목에 전등을 달아 달라고 했지만 요강이 있는데 왜 전등을 달아서 전기를 쓰느냐고 야단쳤다.

나처럼 저녁에 물을 먹지 말자고 했더니 밥을 먹고 물을 먹지 않으면 음식이 얹혀서 탈이 난다고도 했다.
언니와 나는 계속 요강을 비우는 수밖에 없었다.
나야 이미 말한 대로 하기 싫은 일은 기어코 하지 않으려 했으니 결국 요강 당번은 언니가 도맡아서 했다.
그래도 언니는 군소리 없이 묵묵히 요강을 비웠다. 언니의 유년에 요강은 건너지 못할 작은 암모니아 강이었다.
그런데 훗날 언니가 스스로 그 강을 건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건널 수 없던 작은 암모니아 강을 수년 후 스스로 건넜다.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집을 떠났다.
나도 새벽으로 밤으로 밖으로 쏘다니며 요강을 만나지 않았다.
지금은 좀처럼 요강을 찾아보기도 어렵지만 어쩌다가 요강이 있는 집을 발견할 때면 애물단지 요강에 내리는 “쉬~이이”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소리가 담긴 암모니아를 비워내려 작은 두 손으로 요강을 품고 마당을 질러가는 언니의 모습이 보인다.
언니는 작은 손으로 아침마다 요강을 비우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소설 속 시어머니가 남편의 오줌을 비우는 것처럼 가족이니까 참을 만 했을까? 아버지의 권위적 기운이 무서워서였을까? 그렇다면 난 왜 그 일이 싫어서 요강을 깨곤 했을까? 내 자존이 가족을 위한 마음보다 앞섰던 것일까?

언니의 자존은 어디에 있었을까? 소설 속 시어머니의 자존은 어디에 있었을까? 가족의 암모니아 강에 언니와 소설 속 시어머니의 자존이 빠졌던 건 아닐까?

불경기에 다른 일을 해보고자 한다는 언니의 통화에서“이건 이래서 힘들 거구, 저건 저래서 어려울 거구”며칠 동안 말이 길다. 긴 말을 싹둑 잘라서 “그거 해봐 !”라고 했더니 “그걸 내가 어떻게 해, 너는 할 수 있겠지…”라는 말이 건너왔다.
언니는 늘 그랬다.
“그걸 내가 어떻게 해”
언니의 말엔 아직도 암모니아 냄새가 난다.
타존의 저 강에 머물던 암모니아 냄새가 언니에게 또 날아들었다.

광진투데이  kjtoda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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