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죽는 법’을 연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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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죽는 법’을 연습하자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2.09.28 2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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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시조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강남문학회이사. 저서로 산문집 『피아노 치는 시인』 등 3권. 시조집 『얼레와 어금니』 등 3권. 양천문학상, 『현대시조』좋은 작품상 등 수상
시조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강남문학회이사. 저서로 산문집 『피아노 치는 시인』 등 3권. 시조집 『얼레와 어금니』 등 3권. 양천문학상, 『현대시조』좋은 작품상 등 수상

나는 오래전 꽃상여를 타고 요령을 흔들며 구슬프게 외치는 선소리꾼의 선창에 맞춰 상여꾼들이 후창으로 들려주는 상여소리를 따라 이 세상의 하직 길에 오르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마지막 배웅 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항시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막상 내 주위의 가까운 분들이 세상을 하직하면 그렇게 인생이 허무할 수가 없습니다. 네 분 모두 90을 넘기시고 돌아가셨기에 천명을 다하셨다 해도 그 체취와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수많은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위기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죽음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또 사후에라도 종교에 귀의 합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없다면 애초에 종교는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확신입니다. 죽음 후의 세상을 알 수 없기에 사람들은 사후에 천당이나 극락에 가기를 바라면서 예수나 부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간곡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생물이 수명이 다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구상에서 생노병사의 과정을 거쳐 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창조주의 순리입니다. 이를 거역할 힘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에게 원천적으로 없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이자 가장 큰 슬픈 이별입니다.

몇 년 전 모 방송국에서 방송된 인기 일일 연속극 ‘모래시계‘에서 주먹계의 대부인 태수(최민수 분)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친구인 검사 우석(박상원 분)과의 마지막 면회시간에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깁니다. “우석아! 나 떨고 있니?”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보는 바깥세상이 두건 밖으로 사라지면서 사형집행이 마무리 됩니다. 그 당시 “나 떨고 있니?”라는 태수의 말이 한동안 사회에 유행되면서 이 말이 위기에 직면하였을 적에 쓰는 화두로 떠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태수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을 거 아닙니까?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아주 가슴이 먹먹해지는 ‘30대 사형수가 부르는 마지막 찬송가’라는 다음의 글을 읽어 보았기에 그 중 일부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두꺼운 감옥의 문이 “철커덩!” 닫히고 사형수 신복철(가명)이 사형집행을 당하려 끌려 나갔다. 그러자 감옥의 전체 사동은 무거운 정적이 흐르며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마치 사동 저 끝 쪽의 방에서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내 귓가에 들릴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히고 코끝이 시큰 거려 자꾸만 눈물이 고여 들었다. 각자의 방에서 3렬 횡대로 질서정연하게 앉은 죄수들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고 사동에 근무하는 담당 교도관조차 먼 곳을 응시한 채 그림처럼 붙박혀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사동 저 안쪽 방에서 낮고 가녀린 음성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그 노래의 주인공은 바로 그 역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30대 초반의 사형수였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동그란 눈을 가진 동안의 사람이었다.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제쳐두고라도 그의 노래 실력은 대단하였고 그러기에 그 노래가 가지는 정서와 어우러져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든 것이다.“

이 글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의 실화라고 합니다. 나는 이 사형직전 정황을 설명한 글을 읽으면서 내가 만약 그 사형수의 입장이 된다면, 아니 병들고 늙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 때의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고 살고 싶어 몸부림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죽음이란 모든 동물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입니다. 말 못하는 소마저도 도살장 문턱을 넘을 때는 안 끌려들어 가려고 뒷걸음을 친다고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죽음을 당하는 사람의 공포가 이러할진대 그 죽음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또 어떠할까. 마지막으로 두건을 씌우고 밧줄을 거는 사람은 물론이고 밧줄을 당기는 사람, 사형장으로 사형수를 끌고 가는 경호관까지 사형집행과 관련된 사람들은 그 살인의 죄책감에서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스러워했을까? 그래서 사형 집행자들의 명단은 사형집행 하루 전에 교도소장에게 통보가 된다고 합니다.

사형이라는 것은 한 번 집행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각국에서는 사형제도를 점차 폐지해 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형이 죽음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판단이나 오심으로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도 사형집행국의 하나이지만 1997년 이후 단 한건도 실제 사형이 집행된 경우가 없어 사형 폐지국이나 다름없지만 유신정권 때 민주 인사들이 반국가 죄나 간첩으로 죄명을 씌워 억울하게 사형에 처한 예가 민주정부 수립 후에 구성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실위원회’를 통하여 밝혀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엠네스티를 비롯한 인권 단체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사형제도가 헌법에 명시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제도라고 위헌 소송을 냈지만 헌법재판소에 의해 사형제도가 합헌이라는 두 번의 판결을 받은바 있습니다.

사형제도는 살인이나 어린이 성폭행 등 흉악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제도이긴 하지만 실제로 흉악 범죄가 줄어들게 하는데 별효과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형이 집행된다고 해서 그 피해가 보상되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살아지는 것도 아니며 사형은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되는 또 다른 살인일 뿐만 아니라 오심에 의하여 사형이 집행된 뒤에는 생명을 되살려 낼 수가 없다는 문제점도 제기 되고 있습니다.

사형제도의 기원을 따지자면 기원전 175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제왕 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함무라비왕은 전쟁이 없는 정의의 나라를 세우고 싶어 했고 공정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습니다. 법 조항에는 “자식이 아버지를 때리면 그 손을 잘라버린다.”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리면 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린다“는 식의 보복 심리를 담고 있어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속담처럼 복수 심리를 담고 있어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체형별에 관한 조항은 20여개에 불과하고 사실을 엄밀하게 따져들면 당시의 가족관계를 보호하는 따뜻한 법률이었다고 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후에 로마법대전이나 나포레온 법전을 거쳐 현대 법률의 기본 정신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함무라비법전이 모태가 된 현재의 각국 법률을 보면 사형제도의 필요성과 반대론자의 입장이 팽팽한데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사형제도를 아예 폐지하거나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집행을 유예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생명존중사상이 확대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실존 인물 바바라 그레이엄의 연기를 실감나게 연출하여 지금 까지 탁월한 연기자로 기억되고 있는 스잔헤이워드 주연의 미국 영화 “나는 살고 싶다(I want to live)”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바바라 그레이엄은 사회에 대한 불신과 본인의 과거에 대한 증오로 거짓증언을 해주면 살려주겠다는 검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한다, 결국 검찰은 법정에서의 완벽한 증거 조작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을 선고하고 바바라 그레이엄을 샌프란시스코 여자교도소로 이감시켜 산퀀틴의 가스실에서 사형집행을 명받게 된다. 밖에서는 바바라의 친지들과 변호사가 대법원에 탄원서를 넣으나 기각당하고 사형집행 절차가 행해지는 순간에도 법정에서는 논란이 계속되지만 결국 32세의 나이로 무고하게 가스실에서 목숨을 몰수당한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여우 주연상을 받은 수잔 헤이워드가 마지막 가스실로 향하면서 귀거리를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여성의 본능과 사형실로 향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삶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을 보면서 스스로 안대를 달래서 착용하고 눈을 가린 채 가스실로 향하는 처절한 모습과 질식해 오는 가스로 몸을 비틀던 모습이 눈에 아련합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사형집행 시간이 계속 연장되면서 바바라와 관객 모두를 초조하게 만드는 장면은 바바라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까지 조잡하게 악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한 실화라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듯이 사람이 법관의 오심이나 조작, 정치적 목적 등으로 사형을 집행당하는 억울한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물리적으로 정의 하면 죽음이란 생물로서의 활동을 끝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는 자신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눈 바 있습니다. 우선 첫째 단계가 부정(denial)의 단계, 두 번째 단계가 분노(anger)의 단계, 세 번째 단계가 협상(bargaining)의 단계, 네 번째 단계가 우울(despression)의 단계, 마지막으로 수용(acceptance)의 단계 등 다섯 가지 단계를 거쳐서 죽음을 받아드린다는 가설입니다. 그만큼 누구나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는 뜻일 겁니다. 특히 자식의 죽음을 경험한 부모들은 비교 그룹 보다 더 자주 병에 걸리고 더 많은 부부갈등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특히 자식을 잃은 지 20년이 넘은 부모들 역시 여전히 우울증과 트라우마 증세를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받아들일 수없는 악몽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부부는 연세대 4학년이던 28살의 막내아들을 사고로 앞세운 지 금년으로 18년이 됩니다

애플의 CEO로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한 미국의 스티브 잡스는 “누구도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 곳에 가고자 죽음을 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목적지임에 분명합니다. 그 누구도 피해 갈수 없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 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계 4대성인의 하나인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철학적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현인, 성인, 철학자들이 깊은 사고와 삶의 경험, 예지력 등으로 파악되고 정의된 죽음관을 의미합니다. 에피쿠로스 죽음관, 데카르트의 죽음관, 사르트르의 죽음관, 칸트의 죽음관, 쇼펜하우어의 죽음관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철학적 죽음의 주요 연구 출발점은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포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죽음이 나은 것인지 삶이 나은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라는 말로 재판은 끝이 나고 끝내 사형이 언도됩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크리톤 등 주위에서 탈옥을 하라고 끈질기게 권유하였으나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으로 이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국 독배를 들고 맙니다. 그리고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가장 큰 축복‘이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세계적인 문호들과 예술가들의 죽음관은 어떠한지 한번 살펴보겠다.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애드가 알랑포우는 ‘삶이란 움직이는 그림자 일 뿐’이라고 했고 ‘젊은 베르테르의슬픔’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문호 괴테는 ‘죽음이란 해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눈에서는 해가 없어지지만 태양은 저편 어디에선가 빛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저자인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는 ‘무덤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열려있는 여행길이며 해질녘에 닫혔다가 동이 트면 다시 열린다. 나는 이제 시작이며 겨우 기초를 닦았을 뿐이다’라고 죽음을 정의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법정 스님은 ‘살 때는 철저하게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게 되면 삶에 조금도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죽음이야말로 철저한 탄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원죄입니다. 죽음은 이 원죄로 인해 신으로부터 받는 벌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영혼의 죽음은 생명의 원천인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육체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앞으로 갑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필연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또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일체 생명체는 모두 죽어 수명은 반드시 죽음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업에 따라 각각 선악의 과보를 받습니다. 복을 닦으면 천계로 올라가고 악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도를 닦으면 생사를 끊고 영구히 열반에 듭니다. 열반은 허공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가운데도 있는 것도 아니고, 산과 돌 사이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곳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해탈하여 죽음을 받지 않는 것이다 라고 설파합니다.

이상으로 일반적, 철학적, 문학적, 종교적 관점에서 죽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공통된 결론은 ‘삶만큼 죽음 또한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공수래 공수거라고 인생의 허무를 말하듯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이 세상에 나왔다가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납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과 없어 가난이라든가 부유란 것들은 모두 놔두고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권세와 재력과 같은 욕망은 모두 부질없는 것입니다. 가지고 떠나는 것은 마음을 비운 깨끗한 정신과 죽어서도 변치 않는 아름다운 사랑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진실해야할 인간들이 왜 거짓과 허영에 들떠 서로 티격태격하며 소중한 삶을 허비하는가? 특히 죽음은 되돌릴 수가 없으니 사형제도는 모든 국가가 신중히 다뤄야 하겠습니다. 목숨은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죽음> 보다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차원 높은 죽음>에 우리는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대통령도 죽고, 스님도 죽으며 신부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은 불변의 진리라고 정의합니다. 삶이 어데서 왔는지 모르듯이 죽음 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천당과 지옥, 극락과 지옥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다녀왔다는 실체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으니 살아서 좋은 일을 해야 천당이나 극락을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신뢰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행동을 삶의 지표로 삼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사후세계는 절대 신의 몫이니 신의 섭리를 거역하는 행동은 살아생전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구도의 길을 걸으면 신의 문은 열린다는 믿음을 평소에 가슴에 새겨 상선약수(上善若水)같은 선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삶의 보람을 느끼고 죽음으로부터의 공포도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때 비로소 죽음을 초월할 것이니 나도 ‘우아하게 죽는 법’을 지금부터 연습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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