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관통하는 가로선과 세로선의 교차점에 대하여…소로의 ‘월든(Walden)’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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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관통하는 가로선과 세로선의 교차점에 대하여…소로의 ‘월든(Walden)’을 읽고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2.11.2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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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술
(전) 상문고등학교 영어 교사 키르기즈스탄 비슈케크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전) 상문고등학교 영어 교사 키르기즈스탄 비슈케크 코이카 해외봉사단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저 ‘월든(Walden): 숲 속의 생활’의 16장 ‘겨울의 호수’에는 눈길을 끄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소로는 1845년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2년 2개월 남짓 생활했다. 그는 거기서 사는 동안 그 호수의 수심을 자기 방식으로 직접 측정했다. 월든 호수의 수심에 대한 억측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물이 들어오거나 빠져나가는 데가 없는 월든 호수는 바닥이 아예 없거나 심지어 지구 반대편까지 뚫려 있다고도 했다. 이에 소로는 그러한 근거 없는 생각을 바로잡고 싶었던 것이다.

소로는 1846년 초 꽁꽁 얼어붙은 호수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얼음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1파운드 반 정도의 돌을 매단 낚싯줄을 이용하여 호수 바닥의 수백 군데 깊이를 측정했다. 소로는 호수 바닥에 던져 넣은 돌을 다시 끌어올릴 때, 손에 장력이 느껴지는 그 순간의 낚싯줄 길이가 호수의 깊이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한 측정 결과, 소로는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이 102피트(약 31미터)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둘레가 1.7마일(약 2.7km)이고 면적이 61에이커(약 75,000평)인 월든 호수의 면적에 비하면 매우 놀라운 깊이였다.

소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호수의 50:1 축소 지도를 그렸고, 호수 바닥의 백 군데 이상 여러 곳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측정 수치를 모두 지도에 기입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사실도 발견하게 된다. 즉,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분명히 지도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 지점에서 호수의 가장 긴 가로선과 세로선이 정확히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이었다. 둘레가 불규칙한 호수의 작은 만이 있는 데까지 모두 잰 것인데 그러했다.

소로의 통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수의 깊이에서 관찰된 바가 인간의 삶에도 똑같이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호수의 가장 긴 세로선과 가장 긴 가로선의 교차점이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인 것처럼 인간 삶의 총합을 관통하는 가장 긴 가로선과 세로선이 서로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이 그 사람의 성품(character)의 깊이 또는 높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로가 상징으로 지칭한 인간 삶의 가로선과 세로선은 과연 무엇일까? 즉, 우리네 삶의 총합을 관통하는 길이와 너비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두 개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이 인간 성품의 높이 또는 깊이가 된다면 그 교차점은 또 어떤 것일까? 호수의 경우에는 그 가로선과 세로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인생이란 호수에서도 그 길이와 너비가 우리의 눈에 보이기는 한 것일까? 우리네 삶에서 가로선과 세로선이 교차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먼저 삶의 가로선과 세로선은 이성과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매일매일 우리네 행동은 이성과 감정의 지배를 받으니까. 하지만 이성과 감정이 삶의 총합을 관통하는 길이와 너비가 될 수 있을까? 그 총합에 다른 것들은 없을까? 또는, 이성과 감정이 어우러지는 그 교차점이 바로 삶의 총합이거나 인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도 머릿속을 스친다. 호수가 아닌, 인간의 경우에는 생각이 삶의 길이에 해당하고 행동이 그 너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생각과 행동이 만나는 바로 그 교차점이야말로 그 사람의 성품이 아닐까? 어떤 생각이 행동으로 발현되는 그 순간들의 총합이 바로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의 깊이 또는 품격이 되지 않을까?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백 년이나 천 년을 내다보는 그런 빼어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즉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있어도 그 생각이 행동으로 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인품에 공감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주변에서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나 종교인들, 또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남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은밀히 들려오는 양심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니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태인 학살에 앞장을 섰던 나치 당원들이 그러했고, 오늘 이 순간에도 독재자나 군부지도층의 명령에 따라 시위대를 향해 거침없이 발포하는 군인들의 행동도 또한 그러하다. 이와 같이 아무리 거침 없는 행동을 해도 그 생각의 길이가 너무 짧으면,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 사람들도 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류 역사에서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약 700년 동안을 ‘축(軸)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현자(賢者)들은 그 생각의 길이와 행동의 너비가 참으로 길고도 넓었다. 이를테면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야, 에우리피데스 같은 현자들이 그렇다. 이들의 생각과 행동의 밑바닥에는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마라”는 황금률이 숨쉬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각과 행동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미국 정부의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1846~1848)에 대한 항의 표시로 세금 납부를 거부하여 투옥됐고, 그러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시민 불복종≫으로 출판하여 후세에 경종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소로가 말한 삶의 가로선과 세로선의 함의는 바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될 것 같다. 생각이 행동으로 발현한 순간들의 총합이 우리네 삶일 테니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사상가ㆍ수필가. 순수한 자연생활을 예찬하였으며, 시민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하였다. 작품에 ‘월든: 숲속의 생활’, ‘시민 불복종’따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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