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념관, 성경의 ‘다윗 왕처럼 적나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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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기념관, 성경의 ‘다윗 왕처럼 적나라하게’
  • 관악신문
  • 승인 2023.08.2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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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배 한세연구소장
황준배 한세연구소장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존중(존경은 개인 가치관)되어져야 한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기념관 건립에 찬성한다. 역대 다른 대통령 기념관의 연장선으로 본다.

그 이유나 역사적 가치와 의미, 이분의 정치사적 사실은 다양한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도 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나름대로 타당하고 존중한다.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은 찬성하지만, 다만 우상화나 역사 왜곡은 경계한다. 콘텐츠는 성경처럼 다윗왕의 살인교사, 부하의 부인을 탈취, 이처럼 공과 과를 적시해서 교훈을 얻는 것이 전제다.

 

건국의 아버지’, 이런 표현은 경계해야 한다.

건국의 아버지’, 이런 표현은 걸맞지 않다고 본다. 일단 초대 대통령으로서 상징적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건국의 중심인물 정도여야 한다.

베트남의 호치민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러한 호칭이나 규정은 국민들 정서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그래서 이런 표현은 정당성이 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공, 과가 분명한 만큼 국민적 이해와 통합이 요구되어지는 정치인이다.

건립을 찬성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국가 체제의 기틀을 세운 공은 너무나 크다. 기준은 헌법적 가치다.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반공산주의, 국제 외교, 미국에서 명문대 출신으로 다양한 인맥은 위기 국면에서 국가에 유익한 것도 분명하다. 625전쟁에서 유엔군 참전은 기독교 인맥도 작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일반 역사학적 관점보다는 625전쟁사적 관점으로 보자면, 크게 다른 관점이 보인다. 북한의 남침과 반격, 연합군과 국군의 한-만 국경 진격과 압록강 진격으로 조국통일 직전에 중공군의 불법참전이 역사적 비극이었다. 이때 조국통일이 되었더라면 단일 민족정부가 세워졌을 것이다. 국내 정치인들의 운신이나 선택의 폭도 커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승만의 존재가 부각되는 지점이 된다.

김구 선생을 존경하나 당시 국제외교전에서 이를 헤쳐 나갈 정치적 역량은 의문이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은 국민적 지지를 가장 많이 받았으나, 소의 지지를 받은 이승만과 김일성이 등장한 것은 우리나라가 거역하기 힘든 역사적 흐름이었다. 625전쟁 관련 정치적 대 사건이다.

물론 이 분의 과에 대해서는 올바른 평가나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625전쟁 초기에 국민들을 버려두고 혼자 서울을 탈출해서 도피한 처신의 문제, 제주 4·3문제, 419혁명과 망명. 친일파 등용과 면죄부, 사생활 문제 등 산적하다.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미북한이라는 국제관계와 구도에서 나름대로 탁월한 정치력을 보인 것은 분명하다. 이승만 대통령을 가장 깊게 분석하자면 대척점의 인물들의 가장 큰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사의 최대 비극은 김일성, 박헌영의 행위였고, 이들은 625전쟁 흉악범이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동족상잔의 전쟁, 이데올로기 전쟁이나 사상전도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존재 가치도 부정당할지 모른다.

 

일제 강점기, 815 해방정국, 625전쟁의 비극과 민족사

이러한 역사적 변동기, 정치적 혼란기에서 정치 리더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혼란과 혼돈이 존재한다. 무엇이 정의인가, 불의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 다양한 가치나 세계관의 충돌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최근 유튜브에 ‘625전쟁 가장 탁월한 전투 지휘관을 소개했다. 임충식 장군(3사단 백골부대 제18연대장)이다. 625전쟁, “140회 이상의 계속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진일이 없는 상승을 자랑한다.”<중앙일보 1967.4.1>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았다. “임충식이도 백선엽과 비슷한 부류네요. 독립군 때려잡던 간도특설대를 자원입대했네요.”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한 내용이었다. 외면할까 하다가 나름대로 정성껏 답변을 올렸다.

~ 어떤 의미인지 공감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고요. 우리 민족의 비극이고 아픔의 역사입니다.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 백선엽과 임충식의 차이는 임충식은 전공이 탁월하고도 분명하다는 것이고, 백선엽은 625전쟁 초기에 개성이 무너져서 서울까지 포기해야 하는 패전을 당했다. 낙동강전투에서 240km 전선을 미군, 국군(해병대, 1사단, 6사단, 수도사단, 8사단, 3사단 등)이 분할해서 방어전을 펼쳤는데 백선엽이 혼자서 낙동강을 지킨 것처럼 과장했다는 점이 검토해야 할 대상입니다.’

낙동강전투, 전략적 요충지는 임충식의 기계-안강, 3사단의 경주-포항이었습니다. 이곳이 산악지대로 북한군 766유격대 참전, 포항여중 학도병 참전, 장사리전투에서 3사단과 합동작전 등을 보아서입니다.’

백선엽은 625 최대 패전이라고 할 수 있는 청천강전투에서 패전이 있고, 백선엽이 사단장이었던 육군 1사단의 평양 입성 전공은 미군과 제3사단의 최선봉 최북단 진격의 전략적 결과로 사실상 평양 무혈입성, 정도의 전공이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하되 용서하고, 역사적 실체나 사실은 올바르게 전승

‘625전쟁에서 잘 싸웠다고 간도특설대 경력이 묻힐 수도 없고, 간도특설대 경력 때문에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구한 전공이 묻힐 수도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억하되 용서하고 6.25전공을 올바르게 기리자. 이게 현실적 대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선엽은 10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인지, 1993년 일본에서 출판한 그의 저서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승만의 평가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초대 대통령의 위상이나 책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하지만, 일제강점기, 818해방, 625전쟁을 관통한 삶과 행위를 볼 때, 역사적 재해석이나 역사적 평가가 냉철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승만에 대한 합리적 의심, 음모론도 존재한다. 해방정국에서 요인들의 암살이나 정치 테러의 배후자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미국의 정보기관, 주변 강대국과 열강들의 치열한 전쟁 가운데 이승만의 존재, 그의 선과 악, 그리고 정치 리더십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나 강대국의 논리는 자세하게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민족 내부와 이승만의 정치적 평가에 국한하고자 한다.

미 군정청은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거의 그대로 활용했다.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미 군정청이 물려준 경찰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 득세의 한 가지 배경이다.

국가를 위해서도 정치사적, 역사적 정체성, 구심점이 필요하다. 성경에 보면 모든 리더들의 밝은 면, 어두운 면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역사다. 건국 초기의 이승만은 국제정치나 외교에서는 그 누구보다 탁월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체제, 자유민주주의 기틀과 초석은 이 분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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