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27 미운 사랑 체르고리
상태바
문학칼럼 27 미운 사랑 체르고리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3.09.19 2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석영
수필가⋅문학평론가⋅문학 강사⋅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대표저서; 가위바위보⋅반딧불 반딧불이⋅스타 탄생의 예감⋅영화 쏙쏙 논술 술술⋅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카페 정담
수필가⋅문학평론가⋅문학 강사⋅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대표저서; 가위바위보⋅반딧불 반딧불이⋅스타 탄생의 예감⋅영화 쏙쏙 논술 술술⋅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카페 정담

 어둠의 장막을 열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발끝에 걸리는 풀숲의 부드러운 촉감이 여행객의 설렌 마음을 더욱 두근거리게 한다. 억겁의 세월 동안 쉼 없이 흘러내리는 빙하 계곡에는 천상天上의 역사가 전해지고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 히말라야 준봉은 대자연의 경이를 느끼게 한다. 어둠 속에서 눈에 불을 쓰고 방문객을 경계하는 야크 떼의 모습이 이국의 풍경을 실감하게 한다. 발목을 넘지 않는 시내를 건너 옷매무시를 가다듬을 즈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신의 빛이 인간세계로 내려온다. 설산은 온통 황금 광택으로 치장하고 띠구름 한 점 바람에 실려 해맑은 웃음으로 달뜬 영혼을 맞이한다.

 내를 건너고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몸은 새의 날개를 단 듯 가볍다. 네팔에 와서 하루 세 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지만 하루하루 새로운 곳을 걸을 때면 어디서 힘이 솟는지 항상 가뿐했다.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이 경이롭게 다가오는 히말라야의 눈경치가 사방에서 펼쳐진다. 급경사의 아찔함은 예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발맛을 느끼게 한다. 언 땅을 지나니 눈길이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지진으로 경계가 불확실했던 소로가 눈까지 덮여 있으니 좀체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 다행히 앞서 간 사람들이 쌓아 놓은 작은 돌탑을 따라가다 보니 능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캰진곰파에서 체르고리 정상까지의 고도는 대략 1,200m이다. 걷다 쉬다를 반복하여 숨이 멎을 듯한 상태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출발지로부터 4시간 20분이 걸렸다. 체르고리 정상에 서니 온 우주가 밀려와 마음에 박힌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현재의 눈높이에서 히말라야의 준봉을 수평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이 나를 감동하게 한다. 격한 감동에서 서서히 벗어날 즈음 주위 경관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마음을 추스르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 다음 가이드와 함께 사진 몇 장을 찍고 있는데 외국인 서너 명이 정상에 올라왔다. 힘들어하는, 그러면서도 함박웃음을 짓는 그들을 보며 그들도 조금 전 내가 느꼈던 감정 그대로를 마음속에 품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들과 나는 일상에서 맛볼 수 없는 신비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체르고리봉의 높이는 4,980m였다. 나는 힘차게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여기가 오천”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반 시간 정도 정상에 머물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이드를 먼저 내려보내고 혼자서 걸었다. 조금 전까지는 설산을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형국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상황이 되었다. 눈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 하나하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아름다움의 결정체結晶體였다. 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각각의 봉우리는 이따금 구름을 끌어들이기도, 밀어내기도 하면서 동적 감흥을 키워가고 있다. 나는 때때로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고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착시현상까지 느끼기도 했다. 순간을 포착하여 사진을 찍고, 떠오른 생각을 수첩에 옮겨 적기도 하면서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던진 질문에 만족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걸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언어가 ‘아름답다’라는 하나의 독립어로 생각될 만큼 정신이 온통 한곳으로 쏠려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고통은 종이 한 장이라고 했던가. 아차 하는 순간, 나는 급경사 아래로 내동댕이쳐졌고 찰나와도 같았던 산상 여행의 감흥은 거기까지여야 했다.

 히말라야의 환영幻影에 크게 상처를 입은 나는 우선 현장 수습이 급했다. 경사면 아래쪽에 위태하게 걸린 선글라스와 스틱을 주워 올려야 했고 매무시도 추슬러야 했다. 가까스로 장비를 챙기고 나니 조금 전에 보았던 환상적 풍경은 흐릿해서 더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슬쩍 훔치니 피가 흥건하게 묻어 나온다. 평소 익혀두었던 응급상황에 대한 학습 동작으로 피를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피는 좀체 멎지 않는다. 숙소까지 남은 거리를 계산해 보니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은데 아득하기만 하다. 한쪽 눈이 완전히 가려지면서 공간 감각이 떨어지고 급경사에서 오는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래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숙소까지 가야만 한다. 흐르는 피는 스포츠 타월 한 장을 다 적시고도 멈추지 않는다. 허둥대며 내려가고 있는데 희미한 영상 하나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는 것 같다. 움찔하는 몸의 반응과 함께 주변을 살폈지만 내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히말라야 오지에 나 혼자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한참 후에야 영상의 실체가 나의 그림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본질을 외면한 현상 집착에 대한 어리석음이라 생각했다. 사고 지점으로부터 두 시간 삼십 분 만에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 내려왔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숙소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늦은 밤에 숙소에 도착해서 이른 새벽에 출발했으니 지형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조급한 마음이 들어 불안감이 높아 가는데 마을 주민 한 분이 다가와 내 손을 꼭 잡고 안내했다. 롯지에 와서 휴식을 취하는데도 피는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동료 K1은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는 말 반 울음 반, 젖어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친다. 숙소 여주인은 피에 젖은 수건과 장갑을 깨끗이 빨아 주며 자신의 수건을 내주었다. 포터 S는 곁에서 근심 어린 표정으로 상처 부위 지혈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다. K2는 안경과 카메라에 묻은 피를 수건으로 닦아 놓는다. J는 헬기를 부르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주위 분과 동료의 덕분으로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는 고도 관계로 높이 날지 못하고 계곡의 좁은 지형을 따라서 비행하는데 한 마리 새와 같다. 노련한 조종사의 비행 덕에 카트만두 국제병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응급처치가 끝나고 병실에 홀로 남겨진 나는 외로움의 골에서 방황하는 신세가 되어 또 다른 고민과 마주했다. 체르고리에서 나를 따라다니며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그림자가 그곳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형체도 없는 그림자와 싸우면서 본래의 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날이 서서히 밝아올 즈음 나는 그림자에 대한 추억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어릴 적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상대의 그림자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다가 제풀에 지쳐 맥이 풀렸을 때 순간적으로 친구의 허리를 움켜잡고는 그림자의 실체가 사람의 몸이었음을 알고 그렇게 좋아했던 일이 있었다.

 하산 중에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그림자의 실체는 바로 나의 육체였다. 그런데 왜, 나는 나의 그림자를 보고 두려워했을까? 육체는 그림자를 만들어 낸 실체임에 틀림없지만 육체는 다시 영혼의 허상이었고 나는 그 허상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육신의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영혼의 그림자인 육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그림자는 내가 살아온 지난날에 대해 아쉬움이기도 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이어져 이것이 삶의 끝점이라면 너무나 안타까울 거라는 예측을 미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두 가지 요인이기도 하다. 어느 시점에서, 지난 시간 동안 좀 더 진지하게 세상을 살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점에 대한 회한과 무계획적인 삶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다행히 나는 그림자를 통해 내 안의 본질과 이성의 조합법을 알게 되었고 과거의 영혼을 통해서 미래의 영혼을 내다볼 수 있는 상식을 얻었으니 비록 큰 상처와 맞바꾼 교훈이었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미운 사랑, 체르고리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깊은 메시지를 전달 받은 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좋은 감정으로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