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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업이 만난사람]  어린이미술관+동네놀이터+에코뮤지엄 헬로우뮤지엄 김이삭 관장젠트리피케이션으로 사라질 뻔한 헬로우뮤지엄을 구해준 것은 주민들이었다. 헬로우뮤지엄이 동네미술관을 지속하는 이유다. 김이삭 관장 옆에 세월을 이겨낸 옛 아이들의 책상이 놓여있다.소녀는 호텔 부근에 사는 게 틀림없었다. 집에서 혹은 학교에서 빠져나와 어김없이 이곳에 오는 듯했다. 아이가 가는 곳은 호텔 안의 미술관이었다. 막는 이는 없었다. 미술관은 한적했고, 대신 압도적인 색과 선과 질감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는 거기서 오래 머물렀다. 한국의 근대화 70년대가 막을 내리고 이제 88올림픽을 기점으로 하는 현대화-세계화로 나아가는 즈음이었다. “워커힐 아파트서 살았어요. 놀이터서 그네를 타면 멀리 풍납토성까지 보였죠. 놀이터 말고는 놀게 없는데. 근처 워커힐호텔 안에 있던 미술관은 무료였어요. 집서 호텔까지 난 길을 따라 거길 갔죠. 워커힐 미술관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어법을 따르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국전작 전시라든가 미술인 사교모임을 넘어 세계적 거장이 된 작가들 전시들도 많았어요. 공공미술도 많이 다뤘고. 우리 조각상이 여성 인체와 모자상일 때도 거기선 대형, 기하학 작품, 전위적 실험적 작품들이 전시됐어요. 에어컨은 계속 나오지.(웃음) 거기 큰 창가에 대리석 단이 있었는데, 거기 누우면 시원했어요. 옆으로 누우면 자연의 풍경이 보이고 다시 옆으로 누우면 왼편에는 미술작품들이 걸려있는 거죠.”좌풍경, 우미술. 혹은 우자연 좌예술. 그 경계에 누워 한없이 상상하고 즐거워하던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이젠 '중년이 된 그 소녀' 김이삭 관장을 지난 5월 8일 헬로우뮤지엄에서 만났다.헬로우뮤지엄은 지역과 협업한다. 봄봄서울숲을 진행하기 위해 헬로우뮤지엄의 도서관 라보를 옮겨왔다. 왼편부터 김이삭 관장, 김윤지 북큐레이터, 허지유 인턴, 이하린 학예연구원 ◆워커힐 호텔 속 미술관 찾던 소녀 어린이미술관을 세우다김이삭 헬로우뮤지엄 관장은 사뭇 바빴다. 5월 아닌가? 헬로우뮤지엄은 서울숲에서 <봄봄서울숲> 행사를 치루는 중이었다. 헬로우뮤지엄 내 도서관 라보(Library of Art Book)에서 예술 그림책 300여 권쯤을 빼 서울숲 커뮤니티센터로 옮겼다. 거기서 <에릭 칼의 작은 친구들 展>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울숲은 성수동과 함께 신세대 외국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한국-서울의 생태관광지가 된 곳. 이들을 위한 공연과 생태체험도 넣었다. 국악실내악팀 다감의 공연과 독일의 환경운동가 엘렌과의 서울숲 탐사대 등은 그런 활동의 일부다.보여지는 꽃 아래엔 뿌리의 수고가 있다. 김이삭 관장은 일상에서 접하는 예술의 감상을 통해 창조성의 뿌리가 되는 그 감수성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헬로우뮤지엄은 성수동 성수일로 12길 20 성동안심상가에 위치해있다. 2층 전층을 쓴다.  5일 어린이날에는 <얘들아~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단다>를 주제로 성능경 작가가 퍼포먼스를 펼쳤다. 옛 가족사진들과 색색깔의 사탕, 카라멜 껍질들이 현란하게 붙어있다. 경희대자연사박물관과 협업한 압화들과 박제한 물고기들도 빼곡하게 벽면에 피었고, 또 유영한다. 수평수직을 알려주는 레이저 빛이 반짝이는 공간 사이로 학예사, 큐레이터들의 발길도 분주하다. 이곳 저곳마다 작업지시를 줘야하는 김이삭 관장의 시간을 쥐어짜 짬을 만들었다.- 이삭이라는 이름이 궁금했다. 종교적 배경 혹은 다른 뜻? “남동생이 있는데 대원이다. 클 대, 이룰 원. 나는 효정이. 효가 있는 정원.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젠더 감수성 측면에서 첫째를 딸로 낳아서 외할머니가 친할머니 얼굴을 못 봤다는 그런 이야기도 들었다. 시대적 상황이겠지만 기울어진 운동장 같았다. 내가 좀 저항적 기질이 있다. 스스로 이름을 짓자 생각했다. 나는 어떤 거에 감명을 받았지? 아! 황금빛 벼들. 이삭은 곡식이 여물어 열매가 맺힌 부분이다.”- 현재는 긴 과거를 갖고 있다. 어떤 부모,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궁금하다.“아버진 광고일을, 어머니는 작가생활을 하셨다. 어머니는 개성, 아버지는 평양분이셨다. 두 분은 서울서 만나셨지만 외가 친가 모두 이북이다. 명절 때 만나면 북한방송서 들었던 사투리들도 들리고. 기억 속의 엄마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밖에 작업실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부엌과 엄마 작업실이 늘 혼재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전부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지. 아빠가 어려운 시기를 당하자 엄마는 내조에 매진하셨다. 붓을 한번 꺾으신 건데, 기로에서 가정을 선택하셨던 게 아닐까? 나는 엄마 그림의 따뜻한 색채를 좋아했다. 엄마 친구분들 중엔 '괴팍한 분들'도 많았다. 긴 머리에, 꽃 꽂고. 자기 색깔을 가지고 살던 그분들 모습이 내게 영향을 미쳤다. 엄마도 내가 가부장적 사회 안으로 들어오는 걸 원하지 않았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 세계 안에서 너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도 하게 된 거고.”◆어린이미술관에서 동네놀이터로 에코뮤지엄으로그가 '용기를 갖고' 시작한 것이 '비영리미술관' 헬로우뮤지엄이었다. 삼성이 운영하던 어린이박물관이 채 20여년을 채우지 못할 만큼(이곳은 삼성이 서울시 상상미술관 위탁을 받으면서 사업 중복을 이유로 폐관했다), '비영리+예술' 사업은 쉽지 않은 일. 어쨌든 그가 2007년 강남구 역삼동서 개관한 '국내 최초 어린이미술관'은 놀랄 만한 성과를 지금껏 보여왔다. 17년간이나 '생존'한 것. 그와 뮤지엄은 어떤 길을 밟아왔을까?- 관장께선 예술중고교를 거쳐 대학서 회화를 공부하고, 외국에서 미술관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내셔널갤러리와 스미소니언박물관을 거쳤고(그는 이곳서 어린이와 청소년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했다), 한국에선 국립중앙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 개관에 참여했다. 사설 비영리미술관을 운영하고자 했던 게 비대칭적인데.“큰 공간서 일했고, 사회 초년생때 공조직에서 배우기도 했지만, 한계들을 많이 느꼈다. 혼자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보자! 그래서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해봤지만, 지속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주변에서도 다들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 그러신다. 내가 시도하는 것들이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었다. 언젠가 소멸하는 시기가 있긴 하겠지. 금호동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했을 때, 회원들의 성원으로 여기에 왔다. 곧 코로나가 닥쳤을 때 문 닫아야하나 싶었지만, 성동구의 임대료 면제 등 지원이 있었다. 근근히 버텨왔지. 리듬이 있지 않나? 소멸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잘 소멸할 것이고 더 할 일이 있으면 더 잘 해내겠지.”- 참, 늦었다. 헬로우뮤지엄에 대하여 소개를 해주시면?“아이들이 스스로 질문을 가져보도록 하는 공간이다. 예술에 그저 '아름답다' 이렇게만 반응하는 거 말고. 이곳서 행위예술을 펼친다. 할아버지가 왜 부채질을 하지? 왜 운동을 하고 있지?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경험들을 하는 것.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전시, 그림책을 모으고 연구하고, 현대미술 작가들을 연구해 발굴하고, 전시 교육도 한다. 어린이들과 예술을 잇는 매개자라고나 할까?”- 헬로우뮤지엄 변천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2007년 강남서 개관할 때는 어린이미술관, 2015년 금호동은 동네미술관, 2019년 성수동으로 오면서 에코뮤지엄을 내걸었다.”◆창조성의 원천은 감수성, 일상 속 예술 즐겨야 큰다.- 강남서 “대통령의 손자들과 재벌회장이 손녀들의 필수 예술교육 코스”이런 이야기도 있었다는데. “당시가 5일제가 도입돼 전개되는 시기였다. 어린이문화가 시작하는 때인데, 갈 만한 예술공간은 드물었다. 아트 랩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과 실험했다. 나도 스무 명쯤 아이들과 함께 하고. 그저 비닐봉지 열 개만 가지고 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공감각을 어떻게 드로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활동도 했다. 연주가들도 필요하고, 실험적 재료들도 써야하니 비용 포함해 부모들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걸 끝까지 같이 간 집단들이 있었다. 전국서 오신 분들. 그런데 경제적 수요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게 점점 불편해졌다. 교육을 줄이고 전시를 주요기능으로 넣어 금호동에선 더 많은 아이들과 만났다.”- 서울문화재단이나 C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했다고 들었다. C프로그램은 뭔가?“게임회사, 아이티히사 등등이 사재를 털어 만든 공익 벤처기부펀드다. 네셔널 지오그래픽이나 저희 같은 곳을 후원해 주셨다. 금호동 공간을 운영하고, 여기 이사 오는 것까지 도와주셨다. 아이들과 실험하면서 그 안에 아이들을 위한 해방의 공간을 만들 수 있던 힘이었다.”= C프로그램은 실험적 프로젝트에 투자-지원해 왔다. 놀이와 배움을 키워드로 하는 곳들이 주요 대상. 그들의 공간은 질문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실험을 지속하는 힘은 무엇일까?” “학교가 없는 곳,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교사 대신 테블릿만으로 배움이 가능할까?”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 중심 학습이 가능하려면 어떤 시스템이 필요할까?” 나도 질문했다.- 성수동의 헬로우뮤지엄은 에코뮤지엄을 표방한다. 생태와 환경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지만, 그것을 강조하다 보면 도덕과 윤리, 사회와 정치의 영역과 겹치거나 넘어가게 될 위험이 있지 않나?“환경재단도 아니고, 동물복지에 관심이 있어서 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요? 하고 우리 직원도 물었다. 예술이 삶과 연결되는 지점을 잃으면 예술도 자기 목적성을 잃는다. 어린이를 둘러싼 자본주의적인, 신자유적인, 하나의 꼭지점을 향해가는 획일주의. 전쟁이거나 생태거나, 사회학적인 담론들을 건드리지 않고는, 어린이들 삶에 접근하기 어렵다.  이런 것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 그러니까 문제를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는 것. 이것이 내가 아이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이미 젊은 세대들은 그런 것들을 공공선으로, 자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과 함께 가고자 한다.”= 2019년 10월, 성수동 헬로우뮤지엄 재개관전은 '헬로 초록씨'와 '미술관의 개구장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자연과 인사했다. 성능경, 이건용, 윤진섭 같은 1세대 예술가들과 만났다. '원로'들은 온몸으로 미술관에 밀고 들어와 아이들과 놀았다. 아이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그냥 알아보았고, 감응했다. 전위적인 할아버지 예술가들에게 어린이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왼쪽부터 성능경, 이건용, 윤진섭 작가. 이들 노작가들은 행위예술을 통해 어린이들과 만났다. 예술은 아이들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열쇠다.“미술을 감상한다는 건 그냥 시력을 갖고 보는 일이 아니지 않나. 무슨 말을 어떤 방식으로 한 건지 느끼는 것이다. 시각적 문해력이기도 하다. 작품을 통해 본 세상은 풍요하다. 그냥의 삶과는 다르다. 거기 삶이 바뀌는 고갱이가 있다. 요는 문화자본이 아니라, 감수성이다. 미술엔 그 키가 있다. 도슨트를 통해 해설을 듣다보면 공감하고, 알게도 된다. 식물의 뿌리처럼, 영양분을 빨아들일 기저를 만드는 것. 일상에서 자주 미술과 만나고 알 수 있는 경험을 해야한다. 헬로우뮤지엄은 오랜 동안 그 일을 해온 곳이다.”2024년은 '제네바 아동권리선언'이 채택된 지 100주년이다. 그 당시 아이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먹이고, 보호하고, 구조하고, 교화하는' 것이었다. 102년 전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선언엔 더 진전된 혜안이 있었다.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 주십시오.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2024년 5월, 소파가 한국에 온다면? “공부만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아이들을 핸드폰, 게임화면 구경 시키지 마시고 헬로우뮤지엄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하지 않을까? 40년 전쯤, 자연 속에서 미술관을 향해 걷던 그 어린이가 생각났다. 5월의 성수동에, 우리 사는 마을 곳곳에 그런 어린이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고, 어린이만 아니라 어른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그림책, 아이들 이야기, 노작가의 흔적들도 이삭처럼 주워가야지 싶었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4-05-10 15:31

지준기문학평론가천우문학관 회장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큰 공적을 이루었을 때, 명성과 이름을 거두고 물러날 때를 잘 간과하는 현자가 되어야 한다. 즉 잡을 때 손 흔들며 명쾌히 떠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덕장이다. 절대 쉽지 않은 어원이지만 실천에 옮기는 자만이 공경받고 후세에도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법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다에서 죽고 산 숲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속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의 화근은 자신에 달려 있다는 뜻이라 생각한다.무릇 사람들은 자신에 걸맞은 옷을 입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며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한 사람과 인연을 가진다면 반드시 멋진 삶의 주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지고지순한 사랑학은 결코 이중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하는 성급한 결정과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은 유유자적한 평상심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인도의 타고르 시인은 조국을 위하여 살고 이념을 사랑하며 아시아인으로서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1917년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는 詩를 헌시로 썼듯이 희망은 현실적인 사상을 생산하는 힘의 원동력임을 명심하기를 바라며 선조 현인들처럼 온 누리를 밝힐 동쪽의 나라 일출에 경의를 표한다는 타고르 시인의 예언자적 세계관과 국가관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번 달의 화두는 자신에게 주어진 때와 시기를 잘 다스리는 자만이 겸양지덕의 으뜸이 아닐까 한다.

뉴스 | 성광일보 | 2024-05-10 1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