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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이지만, 아름다운 봄풍경은 어디나 있다. 늦었지만 배움의 자리는 언제나 아름답다성동문화원 윤필교 주임께서 어르신 문해교육 장소를 일러주었다. 평소 교육이 이뤄지는 소월아트홀 내 구민대학이 마무리 공사 중이라 장소를 옮겨 수업이 이뤄진다는 말씀이었다.  장소는 행당1동 주민자치센터. 건물 바깥으로 난 계단을 오른 뒤에, 다시 좁고 가파른 철제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겨우 장소에 도착했다. 성동문화원 교실 안내가 거기 덩그라니 붙어있다. 교실로 들어가는 양 옆은 캐비넷 사물함이 촘촘하다. 거기 어르신들 이름이 작게 붙어있다. 옆에는 서예 수업 때 쓰는 한지 받침이 돌돌 말려 있다. 아마도 시간을 번갈아가며 수강생을 받는 모양이다. 교실 한켠에서 햇살이 들어오는데, 젊은 선생님은 앞에서 칠판에 글을 쓰고 있고, 늙은 학생들이 고개를 들었다 숙이고 들었다 숙이며 연필로 공책을 채우고 있다. 할머니들의 머리는 한결같이 뽀글이 파마를 해서, 뒤에서 보면 마치 브로콜리 같다. 벽 달력엔 '일동제약 아로나민 실버_프리미엄' 광고가 보인다. 이곳은 어려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을 위한 늦깎이들 학교다. 2022년 3월 7일 월요일, 21대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날의 화이트보드엔 이런 글자들이 쓰였다 지워지고, 쓰였다 지워졌다.  저녁마다 외삼촌이 PC(피씨)방에 간다. / PC 방에서 인후염이 옮았다. / 강원도에 산불이 났으니, 상부상조합시다. / 과부가 홀애비 심정을 안다. 동병상련 / 부조금을 천만 원 했어요.소련은 1991년에 해체됐다. / 우크라이나에서 석류를 3kg 사왔다. / 生(생)과일 주스 3.5ℓ를 만들었다. / 대선 지방선거 총선외숙모는 신경인지장애 검사를 했다. / 신경인지장애^치매. ^는 등호. / 작년에 밴댕이젓을 3kg 샀다. kg=킬로그램 “부조금이에요. 부주금이 아니고. 우리 얼마나 봉투에 넣을까요? 오만 원? 에이, 우리가 말로만 하는 건데, 더 쓰세요. 백만 원? 천만 원 하죠! 좋아요. 어머니들, 은 이거 아시죠. 꽁치! 세월호 리본같이 생긴 거. 이거는 리터예요. ( )는 괄호예요. ^ 는 등호, 같다는 말이에요. 괄호 치고 글을 쓰면 그건 왼쪽이랑 같다 이런 말이에요. 똥구멍이 평소에는 어떻게 돼 있어요? 네, 꼬옥 닫혀 있죠. 그리고 응엉엉~ 할 때는 어때요? 열리죠? 의사선생님들은 그 똥꼬를 뭐라고 하냐면, 괄약근. 이런다고요. 어려운 말로. 열고 닫고 하는 거. 여기 '괄'이 그런 괄짜예요. 우리는 우리끼리니까… 똥꼬~.”할머니들은 여고생이 된 것처럼 까르르르 웃는다.“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대선이구요. 우리 서울시장님, 구청장님 뽑는 선거가 지방선거예요. 총선은 국회의원 뽑는 선거예요. 내일모레 우리 선거 하잖아요. 어머니들도 선거 꼭 하세요. 아들하고 딸하고 누구누구 뽑으세요 한다고 뽑지 말고, 어머니들이 이것도 보시고, 저것도 찾아보신 다음에 투표하셔야 해요.”교실은 빼곡하다. 코로나가 무섭지만 배움의 열기는 내내 가시지 아니했다문해교육은 단순한 글자배움 아니다. 세상 여는 열쇠교육을 받는 할머니의 눈은 초롱하고, 손은 굳세다수업을 뒤에서 듣고 보고 있자니, 지금 이 자리 문해교육은 단순히 '글자'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빛을 보지 않는다. 빛이 비추는 세계를 본다.”고 하는데,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말이 비추는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선거는 똑같은 선거지만, 국가와 자치단체가 다르고, 행정부와 입법부가 다르다는 걸 새삼 안다. 언어는 글자만이 아니라, 기호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이들이 사는 세계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알게 된다.  의사의 언어와 우리들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치매를 신경인지장애라고 하는지를 처음 알았다. '괄'이란 말이 '조이고 단속'하는 것이로구나 깨닫는다. 치매는 이들에게 가까운, 어른어른거리는 그림자다. 세상은 말을 통하여 비로소 이들에게 각인된다. 강렬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강사 지현정(51) 님의 말. “이분들의 수업은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일이에요. 어린이들이 흡수지처럼 받아들이지만, 할머니들은 … (방수시계처럼 잘 안 스미죠!-기자(웃음) 그게 잘 안 되죠. 제가 자주자주 생활과 가까운 말씀들을 드리면서 수업하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그렇게 해야 어머니들이 기억해요. 또 하나는, 어머니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돕고 싶은 거죠. 어머니들이 사는 세계가 남편하고 애들하고 집만 있는 게 아닌 거잖아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아가는 건 당연한 거예요.우리 세대는 공교육이란 걸 너무나 당연하게 체험한 세대죠. 하지만 이분들의 시대는 그러지 못했어요. 가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교사상도 영향을 끼쳤죠. 여자아이들은 배울 필요가 뭐가 있어. 집안일 하고, 시집 가면 그만인데. 여기 계신 분들도 자녀분들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남편도 은퇴하시고 그렇게 시간이 되어서야 늦깎이로 공부를 하러 오신 분들이에요.”농부들은 논에 물들어 가는 소리를 가장 좋은 소리라 듣는단다. 부모들은 자식 목에 밥 넘어가는 소리, 아이들 글읽는 소리에는 배고픔을 잊는단다. 그네들에게도 그 소리만큼 듣기 좋은 소리가 없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글 읽는 소리는 어떤가? 그들의 목소리도 더없이 듣기에 좋다. 학생 참여자 박성자(75)님의 말. “너무 좋아요. 나는 늦게 소식지를 보고, 전화를 했어요. 그리고 다음날 찾아와서 그날부터 수업을 하게 된 거예요. 우리도 읽는 것은 읽는데, 읽기만 하지, 솔직히 잘 받아쓰지를 못하는 거라. 알면서 사용하니까 좋지요. (읽을 수는 있는데, 쓸 수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이죠?) 솔직히 우리 말이 '얼라를 낳는다!' 이러잖아요. '병이 나았다' 이것도 있단 말이에요. '그게 더 낫다' 이런 말이 다 다른 건데, 읽을 때는 '낫다' '나따' 이렇게 같으니까. 공부를 하면서 그게 다른 걸 아는 거지요.”이건 글자 교육이 아니다. 세상 교육이고,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노인을 위한 나라 없다. 그래도 스스로 피는 꽃처럼'이렇게나 좋은' 수업을 위하여 거쳐야할 어려운 과정이 여럿이다. 첫째 이런 수업이 있다는 걸 들을 통로가 별로 없다. 이분들 중 많은 이들은 이 소식을 <성동구 소식지>를 통해서 알게 됐는데, 거기 글씨가 너무나도 작다. 사회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도 한다. “지금 글자를 배워서 뭘 하겠다고?” 그동안 글을 모르는 엄마이고,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 이런 것에도 스스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있다. “수강자 분들 사진을 찍으시면 안 됩니다.”하고, 문화원의 담당자는 내게 단디 일러주었다. 한국사회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대입이다. 거기에 온 나라가 달라 붙는다. 다음에는 중등이나 초등 혹은 유아 교육이 순위를 다툰다. 어릴 적 여하한 이유로 배울 기회를 놓치고 여기까지 온 이들을 위해서는 별 국물도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잔혹한 추격극이요, 스릴러인데, 우리 현실에서도 그렇다. 초등학교를 마친 이들을 위한 중학과정은 훨씬 더 드물다. 성동구 역시 중학과정이 하나쯤 있긴 하지만, 고등과정은 아예 없다. 문해교육은 겨우 '한글' 익히기에 족하고, 영어나 수학 같은 과목에 대해서는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강의자들이 강력하게 원하는 부분이 여기다. 왜 이런 환경에서도 이들은 배우기를 멈추지 않을까? “옛날엔 강이면 다 강인갑다 했지. 세상은 그냥 세상인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강에는 미국강도 있고, 인도 강도 있고, 세상엔 5대양 6대주가 있는 거잖아요.”- 이건 할머니 학생의 말이다. “할머니들이 예전에는 파리바케트를 못 읽으시니까, 거기 파란 간판 있는 데서 만나! 이러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 가게가 없어지면, 한참을 다른 곳에서 도시기도 하는 거죠.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면 이제 세계가 열리는 거예요. 동기동창이 생기기도 하는 일이잖아요.”이건 강사 지현정 강사의 말. 그는 말을 잇는다. “어르신들을 위한 문해교육에 국가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아요.(유엔에서는 '문해교육의 해'를 선포한 해가 1990년이었다) 이전에는 뜻있는 분들이나 단체에서 개별적으로 진행하다가, 나라에서 평생교육의 차원으로 지원을 하기 시작한 거거든요. 어르신들을 뵈면 정말 열정적으로 배우세요. 공부만 제대로 했으면 정말 큰일을 하셨겠다 싶을 만한 분들을 많이 뵙거든요. 우리가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아서, 그만큼 나라에도 손해가 됐다 그렇게 생각하죠. 아직도 늦은 일이 아니구요.”문해교육을 받는 할머니의 책상 풍경남자어르신들, 더 많은 교육장과 프로그램…등 할 일 아직 많다“어머니들이 문해교육을 받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에요. 여기서 한번 배우기 시작하면, 점점 자신감을 가지시거든요. 그러면 사회복지사에도 도전하고,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얻으러 다니시고 그러세요. 졸업장은 그냥 종이 한 장이 아니라, 그 다음 세상으로 가기 위한 출입증 같은 거예요. 그래서 성동문화원도 코로나 기간에 어머니들의 요구로 문을 열어 놓았던 거죠.  여러 군데로 옮겨다니며 불편하셨을 텐데도, 다 따라오신 거구요.”남자어르신들이 거의 없는 건, 그분들은 모두 다 글을 알고 있어서는 아니다. 가난으로, 전쟁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이들은 이들도 별반 다를 것도 없다. 다만 그들은 '늦게 배우는 일'을 들키는 일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네들의 손을 이끄는 다정한 환대의 손길이 없어서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아직 차가운 햇살 아래 장기를 두고 있거나 그 옆을 서성이는 종묘근처의 어르신들이, 소월아트홀 옆의 남자어르신들 몸짓이 애잔하다.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아니(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한 날들. 전쟁으로 다툼으로, 미세먼지로, 마스크로 아득한 서울 한복판. 이 땅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이곳이 생각났었다. 어머니들께 “아름다운 꽃 사진 한 장 찍자!”말씀드렸다. 당신네들의 이 모습은 얼마나 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냐고…. 그네들이 공책을 앞에 들어보이며 사진을 허락하였다. 세상으로 나오는 창과 문을 앞에 두고, 그 뒤에 어머니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문해교육은 한글만이 아니라 영어와 한자를 넘나들고 국어와 사회를 섞는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3-15 12:42

문화는 방대하고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김구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높은 문화의 힘'이란 백성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작동하는 삶이요 예술이었을 테다. 그 문화를 붙들고 씨름하는 중핵이 성동문화재단(이사장 정원오)이다. 2015년에 출범한 성동문화재단은 지난해 두 번째 대표이사를 맞이했다. 지난해 6월 취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윤광식 대표를 n개의 서울 <성동별곡> 관련 일로 만났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넷, 문화체육부 의원을 그만큼쯤 보좌한 입법과 정책관련 전문가였다. 식사하는 한 시간 동안 가볍게 시작한 성동문화와 재단 이야기는 깊고 다양하게 뻗어갔고,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3월 15일 성수아트홀 재개관을 앞둔 윤광식 대표를 다시 만났다. 문화의 하드웨어적 인프라는 어느 정도 갖춰졌고, 마을공동체 역량이 풍성하지만, 성동의 문화적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함께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윤광식 대표이사_새로 조성된 소월아트홀 광장을 바라보는 2층 연습실에서.문화 정책과 입법에 오래 관여한 문화행정가- 소월아트홀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문화재단은 8년째다. 어떤 분은 코로나19가 16부작 미니시리즈 중 14부작 정도를 지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도 곧 종식되면 성동문화재단(이하 재단)도 큰 변화를 맞을 거다. 먼저 정원오 구청장이 내신 <지속가능도시 ESG>를 혹시 읽으셨나?“물론. 발로 뛰어본 이만이 쓸 수 있는 책이었다. 일단 재밌게 썼고, 현장 중심으로 쓰셨고. 슬슬 넘어갔다. 일관된 철학도 있었다.”- ESG(환경-사회-협치)를 마을에 적용해 보면, 매우 통합적인 어떤 걸 요구하는 개념이다 싶었다. 시대의 큰 조류이고. 재단에서도 관련한 움직임이 있을까 궁금하다.“심플하게 보면 환경 문제를 기초로 하고, 소셜 그러니까 사회에 대한 참여, 공동체의 확산이나 회복 이런 문제들 아니겠나. 지역 밀착도를 높이고, 지역 예술가나 전문가와 협업체를 구성한다든지, 구와 저희 문화재단이나 도시공사 같은 출자 출연기관들의 더 밀접한 협업을 구상하고 있다. 거기에 이코노미, 지역 경제가 살아야 된다는 화두도 있다. 현실적이고, 100%합당한 얘기다. 거기 원칙이 있다면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야 자유와 창의가 샘솟는 문화 경제가 만들어진다.”- 아참, 먼저 재단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해주신다면?“올 7월이 되면 7년이다. 현재 문화재단이 소속 기관들의 위탁기관까지 포함해서 21개 기관이다. 도서관이 7개, 소월과 성수 아트홀, 아이꿈 누리터라고 복지 쪽에 있는 초등학교 돌봄센터가 7개, 청소년 문화의 집, 상담센터들, 어린이집 두 개, 다락옥수와 갤러리 허브 등 전시실 공간 2개 등이다. 청년 상담센터 성동오랑도 있고. 직원이 대략 380여 명, 문화쪽만 160여명이다. 기간제를 합하면 더 많고. 성동문화재단은 2014년도 지역문화진흥법이 국회에서 만들어지고, 저도 그때 국회에 있으면서 상당한 역할을 했었는데, 그리고 그 안에 지역 문화의 진흥과 발전, 그 다음에 지역 문화 창출을 위해서 지역 문화 재단을 만들 수 있다는 규정이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법에 근거해서 이제 문화재단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전엔 대개 조례상에 기반해 만들어졌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국가보조금법상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상태의 국가 국비 지원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돼 있다. 지금 재단이 약 102억 정도 예산으로 경상 운영과 일부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거다.”한국콘텐츠진흥원 협약표창장 그리고 감사패, 펑펑 울던 직원들을 어찌하나 문화는 자연스레 태도와 관점에 스민다. 법령과 예산, 가용가능한 자원부터 짚는 것은 아마도 윤광식 대표에게 제2의 천성이 된 듯했다. 문화정책에 정통한 문화행정가가 본 성동문화재단의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출범 테스크 포스를 꾸리고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신생 문화재단은 많은 고민을 안고 있었을 터였다.“준비와 내용이 없는 건 아닌데, 재단이 나아가야 될 중장기 발전 계획에 아쉬움이 컸다. 앞으로 문화재단이 어떻게 걸어나갈 것인가를 제대로 연구 용역하고 그다음에 구성원들의 의견도 좀 들어보고, 또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문화재단의 모습을 살펴본 다음, 세계적인 추세, 흐름 이런 것들이 결합이 돼야겠는데, 이제 막 그런 걸 만들어가고 있다. 또 예술가 공예가 활동가 이런 이들과도 어떻게 협치해 갈지, 방향을 잡고 구체화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구청을 쫓아가는 관치적인 측면도 여전히 강한데, 이제 슬슬 탈바꿈해서 문화재단만의 독자성을 확립해가는 시작이, 이제부터 벌어질 거다.”- 문화재단 블로그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봤다. 직원 두 분이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았다. 문화사업부 정현정 님, 그리고 도서관운영팀 정도일 직원이었다. “저는 상을 준다는 것이 나름 품격과 존중과 그분이 했던 노력의 가치가 스며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구청장께서 코로나로 나갈 수가 없는데, 구민들 문화에 대한 향유권을 높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베란다 음악회, 자동차 극장 공연을 총괄 주도했던 게 정현정 주임이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제일 힘들게 고생했다.”- 다른 분은 감사패를 받았다.  “취임후 21개 기관을 3번에서 4번 정도 돌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훑어만 보는 게 아니니까. 저는 지하부터 시작해서 옥상까지 다 열어보고 꼼꼼히 본다. 그런데 그 분은, 용답도서관인데, 방 상태가 너무 청결하고 깔끔했다. 일반적으로 본인만의 공간이거나 시설직 공간이 그러기 쉽지 않다. 공구함들 정리해 놓은 방이었는데 딱 느낌이 '정갈하구나!'. 그리고 만나 말씀 들어보면 이분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이런 분이 반드시 귀감이 돼야한다. 전 직원들한테 모범으로서’ 소개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공무원에게 상벌은 당연한 것일 수 있는데, 무엇이었나?“부임후 한 2개월 정도 지났을까. 전 직원들 면담을 시도했다. 한 90명 정도를 개별 면담. 따로 부르는 건 아니고, 보고 들어오면 자연스레 말을 붙인다. 생활이 어땠는지, 근무 여건은 어떤지. 그다음에 본인 생각은 어떤지, 각종 성과 평가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재단이 어떻게 갔으면 좋겠는지. 직장내 갑질은 없는지, 불편하거나 불만족스러운 건 어떤 거였는지를 쭉 묻고 들어보려는데 처음에는 얘기 잘 안 한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대표시니까.(웃음) “한 30분에서 한 시간쯤 얘기를 나눈다. 한 5분 정도는 쭈뼛쭈뼛 하다가 한 10분 정도 되고 하면, 쭉 얘기하는데…. 그중에 한 70~80프로는 펑펑 울고 나갔던 것 같다.”- 마음 아픈 일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에서 그런 일을 겪는다고 한다. 죽도록 일이 많거나, 비합리적인데 자신의 목소리는 묻혀만 가는…. “그동안 재단 자체가 전체적으로 좀 '인색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도 없고 관심도 없고 서로 간에 애정도 없고. 그 이유가 뭐였냐 봤더니 원 퍼슨 원 프로젝트, 1인 1사업 체계였다. 들어온 지 1년6개월 된 친구나 십년 된 친구나 똑같이 사업을 하나씩 받아서 독립 채산으로 하고 있는 거였다. 10년차면 노하우도 있고 금방금방 잘할 거 아닌가. 그럼 가르쳐야 되는 거지. 그런데 소통은 불가하고 내 일에 관여 말고, 그러면서 잘 되든 잘못되든 서로 외면하다 보니, 직접 책임도 지게 되면서 트러블이 많아지고 악순환이었다. 그것부터 바꿔나가야겠다라고 생각했다.”사무실에서 윤광식 성동문화재단 대표이사. 뒤에는 김구선생의 말씀 _한 없이 높은 문화의 힘_이 붙어있다. 가능한 문화자원과 기업들과도 협력해 문화도시 큰 꿈 이루겠다 - 문화재단이라고 해도 역시 직장은 직장인가 보다. 어떤 과정이었나.“소통을 해야 되겠는데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였다. 먼저 저를 보여줬다. 거기 신뢰가 있어야 따라올 거 아닌가. 머리를 쥐어 짠 게, '야, 문화재단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문화적 지식이 좀 있어야 되지 않겠냐?' 했다. 문화가 결국 역사와 종교와 철학 이게 다 결합된 건데. 해서 잘 모르지만 열심히 공부해 서양문화사 열 강좌, 동양문화사 열 강좌, 그리고 한국문화사, 문화 행정이 어떤 건지를 좀 강의를 좀 하고 싶다. 이렇게 선언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방법은 아침 시간밖에 없었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대표가 불러냈다는 소리 나올까 봐 ‘철저하게 자발성’에 기초해 듣고 싶은 사람만 왔으면 좋겠다.”처음에 다섯 명부터 시작하자 했는데, 처음에 28명 정도가 나왔다. 두번째 강좌에서, 불만은 아닌데 '이걸 교육 이수로 해달라. 근무로 쳐달라!’이런 요구가 왔다. 그래서 제가 화를 버럭 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인 것도 같은데.(웃음) “상도의가 있어야지! 여러분들이 한 시간 먼저 오는 만큼 나도 한 시간 먼저 온다. 강좌 준비에 주말도 반납하고 준비한다. 자발성에 기초해야지 싶었다. 유튜브로 찍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러면 현장의 재미를 잃게 되니까, 안 했다. 최종적으로 한 스물두세 명까지 나왔다. 문화행정에 대해선 전체 직원들이 좀 들었으면 좋겠어서, 소월아트홀 개관하면 크게 해볼 생각이다. 물론 자발성에 기초해서….”(웃음)- 문화도시에 대한 구상은 신선했다. 기대도 크다. “문화도시는 예비도시 선정후, 본도시가 되면 200억의 예산을 5년간 집행한다. 우리 구의 문화적 역량들을 모아 준비하고자 한다. 문화자원이란 말을 행정용어로 처음 적용한 게 저였다. 조례도 먼저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데, 진행중이다. 타지역 공부를 마쳤고, 성동구 내 문화자원들과도 협의체를 구성하고 있다.”새 단장한 소월아트홀 2층 연습실에서 바라본 성동의 파노라마 풍경. 지역의 문화는 공간에서 꽃필 수 있다. 앞에는 광장이 펼쳐진다. 윤광식 대표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문화관련 단체와 기업등과 만나 업무협약을 맺는 일이다. 그간 가수협회, 한국실연자음악연합회 등 협력을 협의했고, 한국화랑협회와도 협약을 앞두고 있다. 성수동에 자리잡은 엔터테인먼트 기업 SM과도, 원 밀리언 리아킴과도, 그리고 도서관 자동화 시스템 이씨오도 재단과 '친구'가 됐다. 행정은 경영이 아니지만, 결과를 위해 모든 자원을, 체계적으로 동원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다. 세상에 있는 규칙에 충실하면서, 차근차근. 기사에 채 담지 못한 긴 인터뷰가 끝나고, 신영옥 홍보팀장께서 개관을 준비중인 소월아트홀을 안내해 주었다. 아직 비어있으나 산뜻하게 새단장한 350석 공연장, 예술가들과 공예가들이 햇살을 받으며 주민들과 만날 너른 아트홀 앞 광장, 그 광장과 왕십리를 파노라마 배경으로 가진 2층의 연습실, 디자인을 더욱 다듬은 성동문화재단의 로고 등까지 구석구석 새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코로나가 다행이었다. 우리가 준비를 충실히 할 수 있었다"는 윤대표의 말씀이 다시 상기됐다.무엇보다 공간을 다니며 함께 문을 열어준 직원들의 따뜻한 환대가,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가 계속해서 보였다. 사진촬영을 웃으며 거부한 그네들 뒤로, 새 모습을 한 재단 그리고 소월아트홀의 역사가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참, 성동의 문화정체성이 무엇이냐고? 이제 성동문화재단을 더 유심히 바라보시라. 문화행정가들은 문화로 그것을 실천하고 보여주는 법이니까.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3-11 18:39

꼬끼오 치킨호프의 박태선 사장이 딸 이지영 작가의 책을 들고 있다. “여름 밤엔 밖에서도 자리 폈으면… ”소박한 꿈도 꾼다.박태선 사장은 51년생이다. 겨울 초입 12월이 생일이니, 지난해말 정확히 일흔의 세월을 살았다. 그중 35년 동안 치킨 그리고 호프는 그녀의 일이었다. <꼬끼오 치킨호프>. 마장동축산물시장 서문을 건너, 육교쪽으로 조금만 오르면 그녀의 가게가 있다. 살짝 자리를 파고들어간 '겸손한 자리'다. 35년을 그 한 자리에서, 이름을 바꾸지도 않고, 메뉴를 고치지도 않고, 특별히 종업원을 쓰지도 않으면서 88년 올림픽을, 2002년 월드컵을 그리고 2018년의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동네 사람들과 소리지르며 박수치며, 묵묵히 치킨을 튀겨내고 골뱅이소면을 말면서 함께 자리를 지켰다. 지난해 우연히 들르게 된 그 가게엔 자녀들이 보낸 꼬끼오 35주년 축하 화환이 문 앞에 우뚝 버티고 서있었다. 그리고 매장 안에는 그 박태선 사장의 따님이 지은 책 세 권이 나란하다. 《엄마의 돈 공부》 《엄마의 첫 부동산 공부》 그리고 《엄마의 경제독립 프로젝트》.2020년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보았을 이들이 박태선 사장같은 자영업자들이었다. 어려움의 시기 동안에도 꼬끼오 치킨호프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50억 자산가의 엄마이자, 35년 자기 가게를 굳건히 지켜온 사장 박태선 님과 지난 2월 10일 만났다. 인터뷰 후에도 박태선 사장은 가게를 열기 위해 자신의 일터로 갔다. 35년간 한 자리, 한 메뉴, 엄마 박태선의 가게- 35년은 강산조차 세 번 반쯤 바뀌는 세월이다. 오랜 동안 수고 많으셨다. 자녀들의 같은 마음으로 축하인사 전하고 싶다. 처음 가게를 이곳서 하게된 계기가 궁금하다.“1986년 찌는 여름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중곡동. 거기서 2년여쯤 첫 치킨호프 가게를 하고 있었다. 장사가 잘 됐는데, 비워달란 말을 들었다. 서대문에 있는 녹십자병원에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 문을 연 호프집을 봤다. '대낮부터 장사를 하다니, 이곳 목이 좋은가보다!' 그렇게 생각해 돌아오는 길에 내렸다. 우리집 옆 선경부동산이 옛날엔 몽성사였다. 그곳 할아버지가 이곳을 소개해 주셨다. 당시 돼지갈비식당이었던 곳이었는데, 살짝 건물이 들어가 있어 가게세가 좀 쌌다. 인수를 한 뒤 중앙시장 가서 에어컨도 설치하고, 인테리어도 한 다음에 7월초 문을 열었다. 어느새 35년이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앞의 치킨 호프집이다. 장사는 잘 됐나?“당시엔 시장 경기가 좋았다. 상인분들이 바빠서 옷도 못 벗도 여길 오시는 거다. 장화 신고,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로, 노란 의자였는데 핏물이 고이기도 하고…. 그래도 뜨거운 치킨이랑 차가운 맥주를 맛있게 드시고,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좋았다. 위로 받고 가시는 분들도 있고. 직원 없이 홀로 버티면서 식사를 챙기기도 어려우니까 배고플 때도 여러 번이다. 겨울에 문열러 오면 춥고, 밤늦게까지 하려니 힘들지. 그래도 묵묵히 도와주는 분들에게 힘을 얻었다. 따뜻한 눈인사로 추위도 잊고, 가끔 김밥 같은 거 사서 들러주는 분도 있고. 그런 분들 덕분에 현재까지 버틴 거지. 이젠 두 아이도 다 출가하고, 손주까지 있지만, 계속 가게를 하는 이유일 거다. 놀면 너무 심심할 것 같고.”- 35년여 기간 동안 어려운 일이 많았겠다 싶다.“가게에 불이 난 적도 있다. 우리집은 치킨을 압력솥에서 튀긴다. 훨씬 더 보드랍고 잘 익으니까 오래전부터 그렇게 했지. 헌데 어느날은 내가 가스불만 줄여진 상태로 마감을 했나 보더라고. 아침에 와서 보니까 솥에서 연기는 나지, 기름은 쫄아붙었지. '장사 해야지!' 하는 급한 마음에 거기에 물을 부었다. 그랬더니 확 기름증기에 불길이 번져서 천장에 불이 붙은 거라. 실크도배지라 금새 번지는데, 마침 옆집 성인약국 할아버지가 소화기를 갖고 계셨다. 옆 치과서도 소화기를 갖고 와 함께 꺼주셨다. 전기가 다 나가고 난리가 났지만, 그래도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이웃들이 늘 고마운 이유다.”-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을 안 물을 수가 없다. 식당이나 카페처럼 사람이 모여 음식을 먹는 곳의 매출은 특히 어려울 것 같은데.“우리집 꼬끼오는 오후 4시부터 장사를 한다. 그리고 9시면 영업을 마쳐야하니까 손님이 1/3으로 줄었다. 1차 손님을 받을 수는 있는데, 2차는 못받으니까. 어려움은 물론 코로나19 이전에도 있었다. 여름엔 손님들이 바깥에서 앉아 먹었으면 한다. 우리 가게는 바깥에 상을 펴도 사람들 통행에 방해가 덜 되는 편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야외에서 영업을 하다가 누군가 신고를 하면 그걸 못하는 거다. 벌금도 물고. 한 삼년여 그런 신고 때문에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한여름에만 2달 정도 장사를 하는데. 유럽 같은 데는 노상 카페도 있고, 이게 한여름 밤의 낭만도 되는 건데…. 그런 점을 행정에서도 배려를 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35주년을 맞은 박태선 사장의 가게에 가족들이 축하 화한을 보냈다 “나를 위해 돈 쓰세요!”20억 자산 가진 딸이 엄마에게 하는 말- 따님의 책이 가게에 전시돼 있었다. 돈 공부, 부동산 공부, 경제독립 프로젝트 관련한 책이었다. 20억대의 자산가시라고. 김미경TV에서 200만회 조회에, 유튜브 강의 모습도 봤다. 그 책들의 엄마가 혹시 박태선 사장님인가?(웃음)“그건 아니고. 우리딸 지영이가 평범한 엄마였다. 밖에서 일하고, 집에서도 일하고, 애들 키우고, 그게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런 이들이 돈도 벌고, 집도 사고, 경제 독립도 했으면 싶어서 낸 책이란다. 책 사다가 열심히 읽고, 밤새서 공부하고, 세미나도 참석하고 그러더니 책을 냈더라.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 지금은 강의도 하고, 지방에도 가고 해서 엄청나게 바쁘다. 돈을 제대로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가계부 같은 것도 내서 총 다섯 권을 낸 걸로 알고 있다.”- 저자 이지영이 부모님 이야기를 책에는 무엇이라고 썼나?“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다투는 모습?(웃음)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되게 쉽게 읽힌다고 하더라. 다른 재테크 관련 책은 읽기가 되게 어려워지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게 쓰여졌다고... 다 내 이야기 같고 눈물이 나더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면 엄마로서는 따님의 책을 보고 새롭게 배운 부분이 있을까? 그 부분은 무엇인가?“나를 위해 돈을 써라! 그렇게 말했더라.”- 돈을 나를 위해 써야 한다고? “그 말이 맞다. 내가 없이 살 때도 아이 교육비를 아끼지 않았거든. '무슨 과외를 해?' '대학을 무슨 돈으로 보내?' 그렇게 주변에서 이야기할 때도 우리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건 엄마가 딸을 위해 쓴 것 아닌가?“딸도 자기 투자를 많이 했다. 해외여행을 해도 그게 자신의 추억이 되고 힘이 되고 그러니까, 그런 건 한다. 나도 일요일이면 등산을 하고 여행을 간다. 토요일 밤에 떠나서 일요일 돌아오는 때가 많다. 돈 아낀다고 안 가고 집에 있어봐야, 아프면 그게 다 병원비로 들어가는 거니까. 건강하게 활력을 찾고. 자신에게 보상을 해야, 새롭게 살아갈 힘이 생긴다는 거다. 그런 건 딸에게 배운 거다.”지영씨는 책에서 '엄마가 이렇게 자신을 위해 투자'를 하는 모습을 처음엔 서운해 했다. 손녀의 생일도 간단히 토요일날 점심때 가게서 때우자는 이유가 밤이면 엄마의 여행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영씨도 곧 마음을 바꿔 엄마를 응원하고 있다.  - 누구와 함께 가시나?“마장동에 녹색산악회라고 있다. 향일암에도 가고, 정동진으로 새해 해돋이도 보러 가고. 주변 세탁소 아저씨랑 풍물방 사람들도 함께 간다. 이웃들도 만나고 참 좋다. 남편은 다른 취미가 있어 함께 가지 않는다. 나는 산을 정상을 갔다 와야하는데, 남편은 좋아하질 않으니까.”박태선 사장은 남편을 젊어 다니던 회사에서 만났다. 규모가 큰 무역회사였다. 당시 아홉 살 위이던 남편은 불문학을 공부했던 사람. 딸이 영어통역대학원에 갈 만큼 영어에 관심이 크고, 책을 몇 권이나 낼 만큼 문재(文才)가 있는 건 아마 그런 영향일 것이다. 엄마 태선이 딸 지영에게 권한 공부는 수학과였다. 이러한 이력으로 지영씨는 당시엔 외국계 사모펀드가 최대주주로 있던 은행에 입사, 본점에서 최고경영자들을 수행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더랬다. 인생의 일들이란 허투루 쌓이지 않는 법이다.따님 이지영 작가가 낸 책들. 엄마는 그 자격만으로 돈을 벌고 인생을 즐길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성실하게 일하고 넉넉한 마음 지닌 엄마는 이미 부자 딸 지영씨가 쓴 책에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모님은 평생 집을 산 적이 없다. 부모님의 사업이 잘 되어 꽤 넉넉할 때조차도 전세로 살았다. 몇십 년 전 알아봤던 아파트의 분양가가 1억2천만원, 전세가가 8000만원이었는데, 부모님은 담보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결국 8000만원을 내고 전세를 살았다. 이를 그 집주인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결국 그때 집주인은 분양가와 전세가의 차익인 자기 돈 4000만원을 갖고 새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아파트의 시세는 7억원이다. 더 안타까운 건 그때보다 연세가 더 많아진 부모님께서 지금도 전세로 살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은 전세금은 언제든 받을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 돈이고, 집을 사게 되는 순간 리스크는 커진다고 여기신다.”-《엄마의 돈 공부》72쪽에서지영씨는 어떻게 했을까? 지영씨는 5:1:1:3 원칙을 지킨다. 일단 수입의 50%는 먼저 저금하고, 30%는 생활비로 쓴다. 1/10은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1/10을 다시 자신을 사랑하는 일, 즉 보상에도 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영씨는 이러한 방법으로 종잣돈 1억원을 3년 안에 모은 다음, 꾸준히 공부를 하면서 집을 마련하고, 부를 쌓아나갔다.다음에 오는 세대는 이전의 세대보다 늘 더 나은 법이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세대가 다음 세대보다 더 낡거나 바보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가고, 새로운 세대가 거기 적응하고 있을 뿐. 부모는 변하지 않는 세상의 더 큰 원칙에 충실한 이들일 뿐. 딸 이지영 씨도 엄마가 자신의 삶을 즐기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 데 대해 경의를 표했었다.- 따님 이지영은 “엄마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경제 멘토”로 책에 소개됐다. 따님이 <꼬끼오 치킨호프>를 프랜차이즈화 하자고 하지는 않나?(웃음)“하하. 말만. 딸이 미혼모를 돕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오히려 그랬지. 혹시 그 친구들이 내 기술을 배우러 온다고 하면 아낌없이 가르쳐 주겠다고.”태선 사장의 낭군은 아침이면 재료를 준비해주고, 가게 청소를 하고, 정리정돈도 해준다. 넉넉한 마음을 일에도 관계에도 쏟는 엄마는 이미 충분히 부자였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2-23 16:53

코로나19는 지난 2년여간, 지구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미증유의 영향을 끼쳤다. 코로나19보다 '천배쯤 그 파장이 클 것'이라고 예상되는 지구온난화는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지만, 이제야 국가와 기업이 행동에 나서는 모양새다. 바이든은 대통령이 되면서 제일 먼저 트럼프가 탈퇴했던 기후변화협약에 재가입했다. 세계최대의 자산운용사라는 블랙스톤은 그들이 투자하는 각국의 대기업에 서한을 보내 “거의 모든 투자에서 ESG 평가를 반영할 것”을 선언했다. 이제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대한 고려와 적용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인다. 하지만 의구심은 여전히 있다.2022년 올해는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가 나온 지 50년이 되는 해다. 여기서 언급되고, 이후 큰 현안이 된 단어가 '지속가능성'. 즉 우리는 이미 50년 동안이나 지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이어졌지만, 사태는 현재까지 왔다. 지구온도는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성동구의 ESG 상황은 어떨까? 성동구는 지난해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발족했다. 정원오 구청장은 『지속가능도시 ESG』를 책으로 펴냈다. 올해 성동구에선 9억9천의 예산으로 'ESG 실천공모사업'도 실시한다. 기업쪽은 어떨까? 한기선(세림기계) 대표를 만난 것은 그가 '기술적인 해결책'을 가진 '기업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폐그물이나 부자같은 해양 스티로폼, 플라스틱, 폐비닐, 폐목재 등을 처리하는 환경산업 최전선에서 일하는 연구자 겸 경영인이다. 환경(E)문제에도 사회(S) 구성원과 여러 영역 협치(G) 필요 - 여러 환경문제가 있겠지만, 코로나19 이후로는 일회용품 재활용쓰레기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현장에서 매일 이런 문제를 접하고 있을 텐데?“쓰레기 문제를 발생시킨 것은 인간 아닌가. 그러니 인간이 스스로 우리가 발생시킨 쓰레기들을 처리해야 하지 않나. 쓰레기를 발생지에서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쓰레기 처리를 외부로 옮겨야 할 경우에 또다른 환경오염과 물류비용이 발생한다. 어느 지자체에서 다른 곳의 쓰레기나 재활용품을 받으려 하겠나. 2025년엔 서울의 쓰레기를 이제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인천을 탓할 수가 없다.”- 또 다른 문제가 있나?“지난해 부산 서구 생곡의 재활용처리센터에서 노동자가 분신자살을 했다. 처리주체, 노동환경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던 곳이었다. 4차산업 혁명의 시대에 아직도 제대로 된 처리환경이 되지 못하는 곳이 많다. 환경처리노동자들의 인권과 생존권조차 보장되지 못하면,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 대상도 된다. 이전처럼 쓰레기 문제를 대처하면 안 되는 시대다.”- '어쨌든 우리 지역에서 쓰레기 처리는 안 된다'는 주장은 여전하다. “정치가 설득을 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민간에 인센티브를 주고,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방안을 낼 수도 있다. 사용자가 깨끗하게 세척하고 분리해낸 재활용품에 대해서 보상을 하는 안이다. 에코코인 같은 걸 활용하는 곳도 이미 있다. 재활용처리 시설 같은 것을 만들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전체 구민에게 주식으로 주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적기업화를 하면, 이게 그린산업이 되도록 주민참여를 이끌 수도 있다.”폐합성수지 무촉매자연순환형 열분해 정제유 제작 과정. 여러 종류의 폐기물들은 열분해 과정을 거쳐 정제유로 환원된다. 자료제공 (주)세림기계- ESG에서는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와 지배구조도 중시한다.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거나 민·관·산학의 협치도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성동구 같은 경우도 진행되어 오던 유지처리장 같은 시설설치가 무산됐다. 성격은 약간 다르겠지만 결국은 거버넌스 협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성동에서 재활용정류장 같은 정책도 운용한다. 아파트같은 곳은 관리가 되는 편이지만, 일반 주택가에서는 재활용품 관리가 잘 안 되니까, 이를 관리하는 데 지역 자활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환경 문제에 사회적 배려가 적용되는 것이다.“필요한 정책이라고 본다. 민간의 협조와 이해 없이는 쓰레기 폐기물 처리장 같은 것도 짓기 어렵다. 정책 집행자들이 제일 신경을 쓰는 곳이 어디겠나? 기업보다 유권자다. 학계의 전문가들이나, 민간의 시민단체등과도 긴밀하게 협조하고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 쓰레기는 처리만이 아니라 애초에 줄이는 노력도 해야하는데, 여기에도 민간의 참여와 압력은 절대적이다.많은 곳에서 환경운동은 곧 시민 소비자 운동이기도 하다.”폐플라스틱, 폐비닐, 폐스티로폼 처리할 기술적 비즈니스적 대안 이미 있어- 현재의 재활용품 처리 방식이 궁금하다. 폐지나 캔은 잘 알려져 있고, 페트병 같은 경우는 따로 모아서 섬유를 만들기도 한다. 하나하나 묻자. 우선 스티로품 처리는 어떻게 하나?“용적을 우선 줄인다. 그걸 감용작업이라 하는데, 전기열선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이옥신 등 유해물질이 배출된다. 우리는 스티로폼을 고압스팀으로 찌는 방식을 사용한다. 유해 물질이 발생하지 않고, 바닷가에선 조개나 기타 이물질이 붙어도 제대로 처리된다. 유럽에서도 권고하는 친환경적인 처리방식이다.”- 감용되고 남은 그 재료는 어떻게 처리하나?“부피를 줄인 다음 그 물질은 액자나 건설현장 몰딩 소재로 재탄생된다. 폐기물 처리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 성동구엔 축산물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도 폐비닐이나 스티로폼이 엄청 많이 사용된다. 코로나19 이후로는 각 가정에서도 플라스틱과 폐비닐도 배 이상 늘어난 것 같다. 이런 처리는 어떻게 하나?“기존의 방법은 고형폐기물연료(SRF)로 만들어 태우는 거였다. 지방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열병합발전소나 시멘트공장 등에서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태울 때 다이옥신 등 2차오염 물질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온실가스도 나오고. 항산화물 질산화물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규제를 받으니까 막대하게 환경설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동안에는 제재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이제 탄소세라든가 하는 것들이 강제로 부과가 되면 역시나 큰 어려움에 빠질 거다. 환경오염 등의 문제로 주변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는 별개로 하고.”- 세림은 조금 다른 방식인가?“최근 우리는 폐합성수지 무촉매 자연순환형 열분해 정제유 재활용 설비를 개발했다. 600도씨 무산소 환경에서 용융로에 폐플라스틱, 폐비닐, 나일론 같은 걸 집어 넣는다. 그러면 등유와 비슷한 기름이 추출되고, 납 등 물질은 비중에 의해 가라앉는다. 비닐이나 플라스틱이 원래 석유에서 온 것 아닌가. 역분해, 역반응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런 상태로 처리한다. 오염된 폐비닐 같은 것은 기존엔 재활용 처리되지 못해 소각되던 거다. 폐지라든가 캔은 돈이 되고, 처리기술도 있다. 어려운 문제같지만 기술적 대안도 분명히 있다는 점을 강조드리고 싶다.”- 환경문제, 기후변화 대응, 이산화탄소 저감…. 이런 목소리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기업은 왜 일찍 이 문제에 나서지 않았나? 혹은 이미 나서고 있는데 우리가 모르는 것인가?“기업은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쪽이니까. 그동안은 탄소배출에 대한 규제가 적었다. 유예기간이 지속됐고. 해마다 기업에 국가에 배출가스에 대한 저감목표를 준다. 그런데 예를 들어 생산량이 떨어지면? 80% 생산목표에 탄소배출이 백만톤이 목표였어. 그런데 우리가 50만톤밖에 생산을 못했어. 그러면 감축할 이유가 없는 거다. 그런 오류에 빠지면 자구적 노력을 안 한다. 목표치를 어떻게든 외면하거나 낮게 가져가는 전략이 통했다. 이제는 부족한 배출가스는 돈 주고 사야하는 시대가 됐다. 저항이 여전하지만, 실제로 삼성이나 SK같은 데서 탄소세 때문에 정제유 재활용 열분해에 관심이 높다. 투자도 많이 하고. 그간 투자를 안 한 것은 아닌데, 실패를 한 다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거지.”인간이 지구에 가한 위협 인간이 스스로 제거해야- 이런 일에 어떻게 나서게 됐나? 한기선 대표의 이력이 궁금하다. “90년대초 충남대에서 임산공학을 공부했다. 산림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가장 친환경적인 재료가 나무 아닌가. 소재 중심, 목재자원의 솔루션을 찾는 게 내 관심이었다. 석사과정에서 당시 복합재료를 연구했다. 그 이후 들어간 곳이 LG화학기술원. 복합바닥재 개발에 나서서 건강마루, 구들장마루 등을 개발했다. 무기 유기소재를 10년쯤 다뤘다.그 뒤 카이스트 옛 동료와 국가가 과학기술에 대한 공공기술 이전 사업화 모델을 컨설팅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날리지 웍스라고. 한국기술정책연구원(STEPI) 멤버들이 세운 회사였다. 한 3년쯤 했나? 그 뒤 금호석유에서 일했다. 신재생에너지사업 분야였다. 거기서 8~9년쯤 일했다. 바이오매스도 주요한 업무 분야였다.”- 바이오매스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준다면?“생물 유기체로부터 만들어지는 모든 종류의 물질을 통칭한다. 티베트같은 곳에선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고, 우리 선조들은 인분에 재와 겨 등을 섞어 퇴비로 만들어 땅에 뿌렸다. 자원의 재활용과 순환이란 측면의 접근이다. 기후변화 시대 우리의 화두다.”- 회사를 나와서 새로운 기업의 대표가 됐다. 계기는?“단순하게 보면 폐기물이 이제 돈이 되는 시대가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훨씬 더 절실하게 기후변화에 대한 해법을 실천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유일한 해법은 탄소배출을 저감하고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거다. 지구가 현재에서 1.5도 이상 기온이 높아지면 해안 도시들에 큰 재앙이 온다. 폭염 한파 폭풍 산불이 일상화될 거다. 무엇인가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만들고 배출해낸 쓰레기와 화석연료의 부산물질들은 결국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 쓰레기를 처리하고 다시 자원으로 100% 재순환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이 사는 법이다. 거기에 산업의 미래도 있다고 생각한다.”·(주)세림기계 : 공장 경북 경산시 자인면 울옥길31-24 ·연구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동로 46-1(남양동3-7) ·홈페이지 : www.serimmachine.com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2-23 16:45

청년 이상국은 이번 주에 다시 강원도 주문진 향호리의 주민이 된다. 지난 2012년 봄쯤 서울로 이촌향도해온 지 딱 10년만이다. 2012년 당시 그는 스물일곱.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서울서는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이 성수동이었다.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하는 누나가 당시 성수동 일러스트학원에서 1년 정규코스(꼭두는 수료후 연구년제와 공동작업실 체제도 운영했다. 해서 많은 예비 작가들이 성수동을 기반으로 주거와 작품활동을 했었다)를 밟고 있었다. 경일초등학교 근처서 집을 얻었다가, 뚝섬역 6번출구 가까운 다세대주택으로도 옮겼다가 옥수-금호동 경계의 산동네로도 이사했으니, 10년쯤 그는 서울시민, 성동주민으로 살았다.서울서 그는 주로 문화와 예술이 깃드는 공간에서 일했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도 여럿 했다. 그때마다 그는 책이거나 잡지거나를 만들고, 꾸준히 활동과 사고의 흔적을 인터넷 공간에도 남겼다. 그의 10년 서울 성동의 생활을 공유한다. 성동엔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제법 될 것이니…. 테마파크서 웃던 가족들, 특별한 경험을 일상으로 만들고 싶었던 청년 - 서울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재작년 7월 여름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뇌출혈로 알았지만, 최종 진단은 뇌종양의 일종인 뇌수막종이었다. 큰 수술을 하고 서울의 국립재활원에서 집중재활도 했다. 현재는 강릉에서 재활의 과정을 밟고 있다. 아버지를 설득하여 서울의 재활병원으로 이끈 사람이 나였다. 재활병원 입원하여 1년을 함께했다. 아버지는 아직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 곧 전입신고도 고향에 할 생각이다.- 고향은 어떤 곳인가?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다. 강릉에서도 북쪽 끝의 주문진에서 살았다. 동해 바다와 산이 접해있고, 동해안에는 바다와 연결된 자연 호수인 석호가 많았다. 내 고향 향호리도 그런 곳이다. 부모님은 그곳 농부였다. 지금도 여전하고.- 고향 떠나 홀홀단신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나. 직업과 직장, 연애와 결혼 그리고 주거와 독립 같은 큰 과제는 청년의 과제였고. 어떻게 생활했을까 궁금하다. 먼저 일에 대해서.   “서울에서의 첫 일터가 서울어린이대공원이었다.”- 대공원이 있는 광진구가 본래는 성동구였다. 거리가 가까워서?“그런 요인도 있겠지만 일하고 싶은 곳이었다. 문화기획자로서 사는 것, 테마파크에서 다시 일하고 싶었다. 군 제대후 알바를 했던 곳이 에버랜드(예전엔 용인자연농원이었다)였다. 에버랜드 엔터테인먼트팀에서 공연 가이드로 일했는데, 관객들을 위한 이벤트를 만들고 또래들과 함께 일하면서 큰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직원들을 캐스트라 부르는데 분기별로 자유이용권이 나왔다. 부모님과 외할머니, 외삼촌 등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했었다. 공연도 보고 퍼레이드를 함께 했던 기억이 추억으로 남았다. 현실은 그저 일상의 경험이지만,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게 정말 즐거운 추억이 된다면, 우리의 일상에 새로운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않나? 본질적 가치에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농촌 테마파크 같은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졸업후 첫 직장인 어린이대공원 일은 어땠나?“캐릭터월드라고 복합문화공간이었는데, 키즈 테마파크였다. 공간을 임대받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1년3개월쯤 됐을 때, 경영상 문제로 폐쇄를 맞았다. 다른 부서로 이동할 것인가? 일을 관둘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전자라면 안정적일 순 있을 테지만, 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후자를 택했다. 다음으로 옮겨간 곳은 캐릭터 상품을 개발하는 회사였다. 캐릭터 라이선싱 사업을 했다. 나는 캐릭터를 테마파크로 조성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으나, 주어진 업무는 기대와 달랐다.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다시 떠났다.”일에 열심, 사람에 진심! 직장도 마을도 삶의 스승들2011년 서울시 보궐선거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의 슬로건은 '시민이 시장입니다'였다. 그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에 정책의 방점을 찍었다. 북카페나 마을예술창작소 같은 문화예술공간을 지원하고, 대안에너지나 미디어, 마을공동체나 사회적경제 지원을 위한 센터를 짓고, 자발적인 시민 주민 활동을 지원하는 활동이 서울의 마을 곳곳에서 펼쳐졌다. 내가 이상국 씨를 만난 것도 마을에서였다. 그는 성수1가2동의 마을계획단에서도 활동했고, 마을공동체 사업을 하면서 소식지 편집을 맡기도 했다. '청년'은 드물고 귀한 존재였다. - 시민영역을 제3섹터라고 한다면, 3섹터서도 여러 활동을 한 것으로 안다. “사회적경제 영역의 청년활동가로 시작했다.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발행하는 사회적경제 뉴스레터의 에디터로 기사 작성, 인터뷰, 편집 등의 기술을 배웠다. 이후 서울시 시민기자로 문화 공간을 찾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당시 청년위원회라는 곳에서 정책조사단으로 청년 정책을 조사하는 활동을 지속한 것도 그때 시작됐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이 지금까지 관계를 맺고 있다.”- 다가치놀자 성수동에서라는 프로젝트도 수행한 게 기억난다. 숲에 가고 마을도서관을 찾고, 주민들 포럼도 만들고. 아마 많은 분들은 지역활동가로 상국씨를 기억할 거다. 대학에서도 일한 이야기도 궁금하다.“2년 동안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도 일했다. 당시 청강은 성수동에 교육실험장격인 청강랩[카페성수]을 열고 다양한 문화예술 강좌도 하고 여러 교육 실험을 했다. 셀프쿠킹클래스, 웹툰워크숍, 과학 북클럽, 하우스콘서트 같은 것이었다. 나는 주1~2일은 카페서, 3~4일은 이천에 있는 대학으로 출근했다.”- 대학이라는 큰 조직은 무엇이 특히 달랐나?“도시의 커뮤니티 내에서 조직이 시스템과 체계로 움직인다는 것은 약속과 합의가 중요하다. 큰 조직에는 내부 구성원들끼리 보이지 않는 약속과 합의가 존재했다. 청강에서는 조직 문화를 좋은 방향으로 개선 시켜 나가기 위해 내부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는 분위기가 있었다.”- 조금더 설명해 준다면?“새로운 문화를 탐방하고 함께 모여 배우려 했다. 사람책이라고 있지 않나. 내부 구성원들끼리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서로 배우고 성장하려는 문화가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경청하는 기술 그런 것들은 사실 사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건데, 청강에 있을 때는 여러 영역 작가나 교수님들과 협업을 하는 일도 많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배우는 게 되게 많았다. 일하면서 가장 많이 성장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청년 문화기획자 이상국 씨가 포스팅했던 지난 기사들. 고향 마을의 감자를 팔면서 '감자 오래 보관하는 세가지 방법'은 많은 이들이 읽고 댓글도 달았다. 가는 이제 지역에 내려가 그동안 경험하고 배웠던 것을 실천할 계획이다.아버지 간병 떠맡아, 고향서 아버지와 함께 일어서는 꿈꿔상국 씨는 청강 이후 실업급여를 받았다. 그동안 공부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구직활동도 했다. 청소년 진로 관련 교육회사 재취업. 야근이 많고 퇴사자도 많은 곳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쓰러졌다. - 직장이 안정적이고, 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그러니까 아버지 간병을 맡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무엇을 느꼈나?“사실 내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일을 아예 안 한 건 아니다. 친구들과 프로젝트를 계속했었다. 청년으로 내가 아버지 간병을 하면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거는 어떻게 보면 당시 내가 엔(n)잡러였기 때문이었다. 청년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프로젝트를 맡았었으니까.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내가 간병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를 같이 완수 해야 될 책임 같은 게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 일을 해서 조금 더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간병 돌봄 문제는 사실 개인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하는 거는 정말 너무 어려운 일이긴 하다. 사회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이상국의 서울 10년은 문화기획자로서 성장하는 도시에서의 과정[사진 위]이었다. 이제부터의  삶은 고향 향호리와 아버지와 함께인 삶일 것이다. 그가 꿈꾸는 농촌테마파크의 현실을 기대한다.- 이제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간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일단, 리프레쉬?(웃음) 그동안 프로젝트나 일을 마칠 때마다 여행을 했었다. 그런 여행도 좀 하고 싶다. 앞으로 할 일? 강점 가진 걸로 해야겠지. 글 쓰고 편집하는 일을 해왔으니까. 디지털 온라인 공간과 지역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국제통상을 공부했고, 그중 유통에 관심이 컸다. 고향의 농산물, 유휴공간이나, 빈 하우스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오고 있다.”- 이곳 서울로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지역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국씨의 '귀향'이 크게 귀한 일이겠다. 지역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풀어갈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니까.“아버지를 돌보면서 눈에 안보이던 사회적 문턱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걸 돌파하는 일이 어떤 게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이 많다. 아버지는 편마비 환자로 왼쪽 신체가 불편하시다. 신체활동의 제약은 크지만, 그렇다고 바깥 사회활동을 못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강릉이나 지역에 대한 이야기도 굉장히 많이 알고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분이다. 그걸 마을라디오 같은 형식으로 풀면 어떨까? 아버지는 답답함을 해소하고, 근처 어르신들과 교류도 할 수 있는 통로가 될 테니까. 얼마 전 TV 프로 한국인의 밥상에서 봤던 <풍정라디오> 이야기 같은….”하동, 목포, 전주, 순천 그리고 강릉의 공통점은?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정석 교수가 한달살이를 했던 지역이다. 지역의 고민과 희망을 안고 고군분투하는 지연민들과의 깊고 오랜 만남에서 정석 교수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 하나는 '소다연강미(小多連强美)', 작더라도 그 수가 많아지고 서로 이어지면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지역엔 희망이 있다. '일백탈수'도 그의 주장이다. '일 년에 백만 명 탈수도권해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것. 여기 희망의 씨앗 하나가 이제 막 지역으로 뿌리를 내리러 갔노라 전해야겠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2-14 12:54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풀뿌리 기초자치단체장이자 도시탐험가다. 그동안 그가 낸 책들생존을 하는 데는 큰 혈관이 필수겠지만, 생활이 활기있게 이루어지려면 모세혈관이 건강해야 한다. 정치나 외교, 국방과 경제 같은 큰 영역은 국민의 삶을 좌우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곳은 역시나 지역이다. 내가 사는 동네와 학교, 우리 마을과 교회, 이웃들과 부대끼는 작은 공간들. 그곳의 삶은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삶의 풍경을 지배한다. 골목과 도시가 건강하고 지속한 가능한 곳에서만 사회도 국가도 건강하다.설명절 기간 동안 정원오(성동구청장)의 신간 《지속가능도시 ESG-ESG에 Economy를 더해 지속가능도시를 탐구하다》를 읽었다. 298쪽에 출처와 설명을 자세히 단 미주(尾註)가 열세 쪽이나 되고, 표와 그림 색인도 달린 책(아이쿠, 이거 학술서 같은 거 아냐?) 아닌가 싶었지만 오랜 만에 머리를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는 각오였다. 쓴 사람도 있는데, 그걸 못 읽겠어? 그저 재밌고 자극적인 기사나 영상만 보아온 터! 참회의 의례를 해야지. 이유는 또 있다.책은 중요한 사례로 성수동, 성동구를 든다. 2004년 주거를 시작해, 2012년부터 곳곳을 다니면서 '마을활동'을 하고 있는 나로선, 반가울 수밖에. 이 책은 내가 최근에 안고 있는 불안 혹은 욕구에 단비가 됐다. (우리는 아이들을 낳아 길러도 되는 걸까? 지구온난화는 어쩌누?) 10년 마을살이의 정리도 됐다. SNS나 신문의 쪽정보로는 만날 수 없는 포괄적 맥락과 해소에 이르는 길들의 지도가 거기 있었다.  분명코 도래할 고통의 그날들_우리 도시는 이래도 괜찮나?책은 '도시'에 대한 개괄로 시작한다. 도시는 성장해 왔다. A.D 1년으로부터 1820년까지의 59개국 평균 1인당 GDP는 겨우 1.5배 성장한다. 그런데 1820년 이후엔 10배 성장(1820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한다. 한국은 그 성장의 기세가 더 대단하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최근까지 우리의 GDP 성장률은 500배다. 1920년 서울 인구는 25만4천명인데, 100년 동안 서울인구는 약 40배로 증가한다. 서울만이 아니다. 서울과 '똑같은' 도로, 주택, 기반시설을 누리는 도시들은 '수도권'을 형성하고 있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을 넘어 메갈로폴리스가 된 것이다. 11.3%의 땅넓이 수도권 인구는 50.2%다. 2,604만명이 산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니, 지금은 그보다 늘었을 터다. 문제는 이러한 성장이 지방의 소멸을 부른다는 데 있다. 지난 2018년 인구감소지역은 89곳이었는데, 2020년에는 105곳으로 늘었다. 대도시권 또한 네크로폴리스(폐도시, 무덤도시)가 돼 갈 수 있다. 수확체증의 법칙으로 성장한 도시에 수확체감의 법칙이 엄습하는 것이다.코로나19의 펜데믹(전지구적 감염)은 도시 팽창이 자연의 파괴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준 고통보다 100배쯤 파괴력이 크다고 여겨지는 기후변화도, 세계적으로 광범하게 진행된 산업화 즉 도시화의 직접 결과다. 도시란 곧 4차산업혁명이니 세계화(글로벌화)니 하는 말과도 동의어다. 이는 곧 양극화 불평등의 심화도 내포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생산력은 엄청나게 높아지는데, 노동은 체계적으로 제거된다. 땅과 공장을 가진 지배계급이 있었던 시절엔 많은 수의 중간관리자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애플이나 구글이나 메타(페이스북)이나 네이버나 카카오나 하는 주식시장의 상위 포식자들은 훨씬 더 작은 수의 기획자와 엔지니어(프로그래머) 그리고 디자이너만 데리고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 키오스크(무인 대면결제 설비), 무인공장, 자율주행차와 드론이 전통적 물류시스템의 인간들도 갈아치우게 될 것이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처럼, 생산력은 극히 높아지고 임금에 의해 지탱하는 소비력은 종말은 필연적이다.   개인의 자유와 도시의 풍요와 현대화의 편리를 조금도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이 시대에서 코로나19로 잠시 맑아진 지구의 하늘 대신 우리는 양산되는 1회용 쓰레기, 땅을 뒤덮은 물류차량과 오토바이들의 물결을 새롭게 만났다. 전기차로 배터리로 혁신을 다진다는 현대차같은 대기업이 성과급 잔치를 벌인 날 그날, 지역에 뿌리박고 있는 자영업자들은 파산선고를 했다.ESG+e 환경 사회 지배구조 그리고 경제라는 대안비극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곳은 선진국, 잘 발달한 산업도시에서였다. 중후장대의 도시 디트로이트나 철강도시 피츠버그 그리고 조선업의 도시 스웨덴의 말뫼 같은 곳도 파산의 눈물을 흘렸다. 이는 점점 더 세를 불려가는 세계화의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렉서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이들은 억만장자가 되지만, 올리브나무처럼 붙박혀 사는 지역 토박이들은 쪽박을 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 책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암울한 전망이었다. 도시는 어떻게 이에 대처해 왔는가?이 책 <지속가능도시>가 제시하는 대안의 이름은 ESG. 이제 우리-정부와 기업과 시민들-은 환경(Environment)을 최우선에 두고, 사회(Social)와 지배구조(Governance) 혁신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책은 여기에 경제(Economy)를 더한다. (그게 없는 건 기업으로서는 이 부분이 이미 전제조건이기에 그럴 뿐이다)이 네 가지는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필수요소들이다. 하나라도 없으면 그건 모두는 '0'이 된다. 2002년, 스웨덴 말뫼의 상징이었던 코쿰스 조선소의 대형크레인은 현대중공업에 1달러에 팔렸다. 해체와 이전이 조건이었다. 지역의 상징이자 생명줄이었던 조선소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알마르 레팔루 시장을 필두로 한 주민들과 기업인과 전문가 그리고 공무원들이었다. 이들은 신문지면에서 토론하고, 콘퍼런스를 거듭하면서 중공업의 도시를 지식산업도시로 탈바꿈시키는 현실의 도전을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미디어혁명도시(Media Evolution City)를 선포하고, 직주근접의 스타트업도시를 친환경적으로 건설한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스웨덴에서 해고는 자유롭단다. 하지만 직업을 잃어도 삶을 잃지 않아도 될 만큼 든든한 복지시스템이 동시에 존재한다. 평생학습은 사회 제도적으로,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구조에 적응해 그 안에서 다시 몸을 일으킬 충분한 지식과 기술을 얻을 수 있다. 필요한 재정은 국가의 재정균등화 정책으로 확보할 수 있다.피츠버그도 좋은 사례다. 한때 공동화위기에 빠져 청년층이 50만여명이나 빠져나가고, 고용율은 25%의 도시가 이곳이었다. 1994년 취임해 2005년까지 재임한 톰 머피가 시장으로 있으면서, 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3위에 오른다. 어떻게? 피츠버그엔 48킬로미터 이상의 수변이 개발돼 녹지가 조성된다. 1천 에이커의 산업부지는 상업/주거/공공 복합단지로 변신한다. 도시는 내부에서부터 커갔다. 외부의 자원을 들어오려 했던 디트로이트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이들이 그들의 아이디어로 꾸준히 추진됐다. 정책적 지원은 그들을 모일 공간을 마련하고 지원해주는 것이었다.혁신과 포용 이룬 지자체들, 희망을 만들어가다지속가능성이란 미래의 필요와 자원을 해치지 않고, 현재를 유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환경이 깨끗하고 풍부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정주하려 한다. 성동구의 성수동이 현재와 같은 '전성기'를 구가하게된 결정적 요인중 하나는 중랑천과 한강을 끼고 조성된 서울숲 덕분이었다. 그 환경 하나만으로 충분한 매력으로 보고 몰려온 청년예술가들, 기획자들의 땀이 성수동에는 여전히 스며있다. 성수동은 사회적 연결선 안에 있다. 성수는 2호선 라인(2호선은 종로 을지로 퇴계로 구도심들과 영등포라는 물류와 산업 중심 그리고 강남이라는 신도시를 연결하는 라인으로 구상됐었다)이고, 뚝섬역-성수역 양옆으로는 한양대와 건국대라는 지식 기반도 근접해 있다. 이곳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직간접적으로 성동구내의 여러 정책 형성과 실질적인 지역 활성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강을 따라 형성된 복부간선, 동부간선, 강변북로의 잘 짜여진 도로망과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하는 철로 그리고 강남 압구정이나 영동과의 인접성도 발전의 기반이었다. 서울에 희소하게 남아있는 준공업지대인 점도 메리트가 됐다. 예술가들이 공장과 협업을 하고, 기업가들이 스타트업을 일으킬 때, 이곳은 최적지였다. 말하자면 성수동 '지역사회가 가진 정체성'이 시대의 물결을 탄 것이다. 서울숲 옆 도로에 카페와 스튜디오, 식당과 스타트업들이 들어서기 전, 성수동엔 담장허물기 사업이 진행되어 있었다. 가게들 사무실 상점들이 쉽게 들어선 이유다.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을 호소한 청년기획자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성동구의 '젠트리피케이션 대책'이 시작됐다. <성동구 지역공동체 상호협력 및 지속가능발전구역 지정에 관한 조례>는 서울숲길, 방송대길, 상원길의 몇 구역에는 프랜차이즈나 대기업의 입점을 막는 협의체와 함께 존재한다. 구청은 건물주들과 직접 협의하고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임대료를 일정 한계 내에서 막는다. [이 조례는 이후 2021년 5월 지역상권상생 및 활성화에 관한 법률]로 발전한다. 지배구조(Governace)란 곧 협치인데, 이는 성수동이 코로나19가 득세한 현재도 지속해 활기를 유지하는 비밀이기도 하다.책에선 여러 키워드가 읽힌다. 도시 운영에 새겨둘만한 이야기들이다. 환경문제 혁신의 주체로 '기업'을 든 것은 인상적이다. 행정의 규제나 시민들의 도덕적 실천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다. 필요를 인식케 하고, 이익이라는 유인책을 두어야 한다. 포용은 사회구성원 모두를 품으려는 마음이다. 그건 자선이 아니다. 그 안에 다양한 발전과 생존의 가능성이 있다. 천재의 오만과 오판에서 오는 부패를 막을 힘도 거기 존재한다. 갈등은 피하고 싶지만, 퇴비와 같다는 말도 적어둘 말이다. 땅에 뿌려지면 우리에게 큰 열매로 돌아오니까.  책 <지속가능도시>엔 지역과 자치단체가 환경(E)과 사회(S)와 G(협치) 그리고 경제(E)를 조화롭게 버무려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사례도 촘촘하다. 퇴폐업소가 빼곡했던 성안로에 앵커시설 엔젤공방을 만든 강동의 사례도 보이고, 세대이음을 실천해 보육과 교육 그리고 노인의 교육과 돌봄을 활성화한 양천의 모습도 보인다. 경남 기장은 '교육이 최고의 복지'를 내세웠고, 동작구에선 어르신 행복주식회사를 운영한다. 건물클리닝과 아이돌보미 산타가 되고, 수공예 제작판매망도 있으니 봉사로 활력을 찾고, 경제적 효능이라는 일거양득의 현장이 거기 있다. 도시재생의 도시 순천이나 구역 정체성을 유지한 수원도 향후 여행지로 점을 찍어둔다. 기초자치단체는 작은 곳이지만, 이곳의 장은 시민의 삶과 전면적으로 만난다. 삶과 일과 쉼이 버무려진 그 안에 우리의 세계가 있다. 이곳이 구해지면 세계 또한 구해질 것이다. 수퍼맨조차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함께 서로를 구하고자 하면 나 또한 구해질 것이다.                               원동업기자(성수동쓰다 편집장) <iskarma@daum.net>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2-14 12:38

이홍렬 선생이 마장동서 아이들을 위해 기획했던 이웃 직업인과의 대화 《직업을 말해줘》와 함께. 왼쪽부터 명영순 송경민 윤상임나는 2016년 2월 1일의 블로그를 보고 있다. 제목은 '다시 색전술'. 블로그 주인장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지금 막 수술을 위한 사전 조처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다. 그의 왼팔엔 링거가 연결돼 있고, 제모크림을 발라 털을 녹여떨어뜨린 터라 겨드랑이엔 약냄새가 남아있다. 사람들이 모두 자는 밤에 홀로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가, 오늘 찾아갈 그 사람 이홍렬이다. 그의 글.“병원에서 노인들을 보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20대의 젊은이를 보면 안타까움이 가슴으로 밀려오고 어린 아이가 부모와 함께 휠체어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 온다. 그렇다면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을 보면? 열심히 살다 이제 쉴 때가 된 사람을 보는 느낌? 아니면 앞으로 돌진하다 돌부리에 넘어져 쉬는 가련한 중생?몸이 아프니 겸손해졌다. 잘난체 하던 젊은 시절에는 남들을 참으로 자주 무시했다. 무엇이 그리 잘 났다고 그랬는지 알고 보면 자랑할만한 것도 없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으나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죽도록 사랑하다 보면 진정 사랑을 알겠지. 병실의 환자들이 코를 고는 시간에 나 홀로 글을 쓴다.”- http://m.blog.naver.com/ipleelee 중생전의 이홍렬얼마 더 살지는 모르지만, 죽도록 사랑해야지“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겠으나”라고 썼던 그는 2018년 1월 3일 고인이 됐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다 보면 진정한 사랑을 알겠지”라고도 썼다. 그가 베푼 사랑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왜 풍납동에 살고 있던 그가, 마장동에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지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오바마 대통령을 초대하려던 '직업을 말해줘'> 기사 참조] 알고 싶었다. 이홍렬과 함께 '직업을 말해줘'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윤상임, 송경민을 만난 이유였다. 근처 사근동에 살고 있는 이홍렬의 형수 명영순 님도 자리에 함께 했다. - 이홍렬 선생은 <직업을 말해줘>의 기획자이자 기록자였다. 마장동 홍익교회 하마방에서 시작해 5년여 가까이 많은 직업인들을 모셨었다. 초대된 강사들중엔 이홍렬 선생과의 인연으로 오신 분들이 다수라고도 들었다. 이홍렬과 마장동과의 인연을 듣고 싶다.명영순 : “시동생(이홍렬)의 고향은 제천이었다. 그후 워낙 많이 옮겨 다녔다고 들었다. 강원도로도 천안으로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 1960대 후반 1970년대 초 서울로 왔을 때, 터를 잡은 곳이 청계천변 판자촌이었다. 8만원 전세금인가를 주고. 홍렬은 마장동 동명국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청계천변엔 판자촌이, 하류와 중랑천변으로 '개미굴(토굴을 파고, 그 위에 비닐과 판자로 얹댄 임시거처)'이 많았던 때다. 가난한 삶의 풍경이 이곳 마장동 사근동 송정동 용답동 일대에서 펼쳐졌었다. - 명영순 : “남편 홍식이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마음에 큰 짐을 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비가 오면 우산 장사를 하고, 겨울엔 호떡장사, 여름엔 하드통을 메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들었다. 집안 사정상 벌 사람이 없으니 벌어야 했을 거다. 다들 고생을 많이 했겠지만….”- 이홍렬 선생의 과거 이력이 궁금하다. 어떤 분이셨나?명영순 : “형제는 2남2녀였다. 홍렬에겐 형과 누나가 있고, 여동생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남편 사랑에 대해선 한이 없다고 하셨더랬다. 굉장히 다정다감한 성격이셨던 것이고, 홍렬은 아마 아버님을 닮은 듯하다. 우리집 아이들이 아파 열이 나면, 아이들을 업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오곤 했던 게 시동생 홍렬이었다. 명절때면 제사 장만에 손을 보태주는 이도 홍렬이었다. 형은 숭실대 전자공학과를, 홍렬은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으니 형제가 이과적인 성격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둘다 음악에 심취하고, 사진도 찍고, 책을 읽고 글쓰는 일을 엄청나게 좋아한 사람들이었다. 형제가 그런 점에서도 비슷한 것 같다.”이상주의셨죠. 발이 땅에서 떨어진 듯한이홍렬 선생은 간암 투병중에도 마장동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꿈을 잃고 생기가 가셔버린 아이들을 위해 '직업을 말해줘'를 기획하고 진행을 도맡아 했다. 창간호이자 종간호가 된, <직업을 말해줘> 소식지를 발행했다. 거기에 그는 썼었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없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꿈을 선사하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식사에 지인을 초대하여 손님의 직업에 관하여 자녀와 손님의 직업에 관하여 자녀와 손님이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한다고 합니다.아이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나요? 그러면 신뢰를 함께 주어야 합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부모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 자녀들을 전적으로 믿고, 자녀들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우리들의 아이들은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윤상임 : “선생님은 이상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 사는 분 같았죠. 아이들한테 책을 주세요. 당신이 읽던 책들. 영어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이예요. '자신에게 좋았고 좋아했던 책이니까, 아이들도 좋아할 거다!' 그런 거죠. 박물관 가고 음악회 가고 그런 것도….(웃음)”송경민 : “이홍렬 선생님과 매미우화를 밤새 보았던 일이 기억나요. 땀이 삐질삐질 나는 여름밤, 모기한테 뜯기면서 선생님과 함께 세림아파트 내 숲에서 있었어요. 밤에 탈피를 하니까. 저는 그 전엔 매미 자체가 안 보였었어요. 아이들하고 엄마들, 주변분들도 모두 다 참여 가능한 자리였어요. 영상도 제작해서 저희들과 공유해 주셨더랬죠.”- 윤상임 : “교회서 공부방을 했어요. 형편도 어렵고 학력이 달리는 아이들과 함께 하니까, 다른 분들이 '학업진도'나 성적과의 관련성 이런 것도 엄청 신경쓰는데, 이홍렬 선생님은 태평이세요. '아이들은 놀아야 하고, 스트레스도 없어야 한다.' 뭐 그러시는 거죠. 저는 수업에 사람이 올까 안 올까 걱정이 많은데, 선생님은 '없으면 놀지, 하나라도 있으면 하고.' 그러시는 거죠. 걱정이랑 해탈이랑 둘이 쿵짝이 맞았던 거 같아요.”송경민 :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하면 관심들을 가지실 테니까 <영어성경학교> 같은 것도 열었어요. 그러면 미국식 영어랑 영국식 영어를 구별해서 듣도록 준비를 해오시고요. 어원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관련 이야기들도 쭈욱 풀어주시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 청교도들을 알아야 영어 단어와 문장이 제대로 이해되기도 하니까….”왼쪽부터 이홍렬의 손그림전, 사진전 그리고 스마트폰 개인사진전. 그는 이웃의 가게, 공간에서 자신의 재능과 우정을 나눈 사람이었다.한 알 밀알이 떨어져 땅에서 썩으면 이홍렬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일을 좋아하는 사진가요 편집인이었다. 마을에서 섹소폰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던 예술인이었다. 그는 그 재능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재능을 이용해서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그가 기획한 <직업을 말해줘> 영상을 채운 것은 그의 사진과 그의 편집기술이었다. 그는 그린 그림들과 사진들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화이트큐브, 하얀 전시실의 벽면이 아니라 삶의 터와 가까운 가게와 카페에 걸었다. 누구나 밥 먹으러 와서, 차한잔 하며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사람들, 이웃의 풍경이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그 사진들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홍렬의 블로그 제목은 <오래 살지 말자 즐겁게 살자>다. 정신없이 앞으로 내딛다가, 고개를 들고 더 높은 곳을 향하다가, 어느날 다가온 죽음 앞에서 그가 찾은 것은 '사랑'이었다. 그가 남긴 블로그 기사를 차근차근 살피고, 그에 대한 이웃을 말들을 다시 재생해 듣는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쫓아 신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았다. 그의 죽은 자리에 어울릴만한 성경 단어가 내게도 생각났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덧붙이는 글>마장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신동한 할머니, 동명초 후문에 있던 문방구 한양슈퍼에서(아래 사진은 젊은 시절 신동한 님)이상돈, 사랑의 다리 세운 사람. 마장동 동마파출소장을 역임했다.지난해 마장동을 찾았다가 두 분의 인상적인 분을 만났었다. 한 분은 1970년대초, 마장동에서 순경과 파출소장을 역임했던 이상돈 선생. 그는 한영중고 앞 청계천에 '사랑의 다리'를 놓은 사람이었다. 당시 청계천변과 하류 중랑천변은 가난한 이들이 대규모로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생계를 꾸려가느라 교육의 현장에서 밀려난 어린이, 청소년들도 많았다.  이상돈 선생은 그들을 위해서도 애향기술학원을 짓고, 한글과 타자, 편직술등 직업교육도 했다. 겨울 내복도 장갑도 변변히 없는 버스안내양들을 위해서도, 넝마를 주워 파는 청계천다리 아래 재건대 아이들 위해서도 이상돈 선생은 힘을 썼다. 마장동서 <청계천박물관 이야기갤러리전>을 진행할 때는 동명초등학교 후문서 장사를 하고계신 한양슈퍼 신동한 할머니도 만났다. 50여년 가까이 문방구를 하셨던 할머니는 우리에게 그동안 간직해 왔던 문방구 제품을 모두 기증해 주셨다. 그리고 5만원의 후원금까지.(이상돈 선생님도 기부금을 주겠다고 하셨다). 마장동에서 만난 이 어른들은 한결같이 불쌍한 이웃들 아이들을 위하여 한없이 주고싶어 했다. 마장동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는 사람들의 땅이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1-25 21:07

전길영 선생, 그는 삶터의 삶을 기록한다. 그 기록은 남아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원동업1.뼛속까지 왕십리 도선동 사람 전길영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이는 교보생명 창업주 신용호 선생의 말이다. 이 말씀을 오마주 삼아 다시 말하고 싶다.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문화를 만든다”. 땅은 그 시대를 품고 있다. 땅의 생긴 모양과 그 위치는 그곳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서의 땅, 이 땅에서 생겨난 문제에 적응하고 응전하면서 사람의 삶도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다.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삶 역시 그 땅과의 인연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한해 동안 이곳 성동의 땅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려는 이유다. 그들이 만든 문화는 우리가 사는 땅에서 우리에게 양식으로 자라고 있다.930년경 전길영의 부친 정명록이 운영한 제일농원이다 지금의 왕십리로 교보생명 빌딩 근처였다.<성동문화원 제공>1945년경 전길영의 아내 김종분이 찍은 왕십리 전차다 왕십리는 기동차와 전차와 경원선이 함께 다닌 교통의 요지, 성동의 중심이었다.<성동문화원 제공>◆땅의 이야기 들려준 전길영 선생2021년 내가 만난 가장 인상 사람 둘을 고르라면 '뼛속까지 왕십리도선동 사람 전길영' 선생과 마장동에서 순경-경찰을 하셨다가 은퇴를 하신 이상돈 선생이다. 두 분을 처음 만난 것은 모두 책에서였다. 아흔을 넘긴 전 선생님과 '그분 돌아가셨다 하던데' 했던(죄송합니다) 이선생님을 모두 현실에서 직접 만나 뵈었다. 그들로부터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자료를 살피며 인터뷰를 하게 된 게 그래서 '신기했다'. 지난 12월 6일부터 10일까지 닷새간 열렸던 성동문화재단 성동별곡의 성과공유회에서 나는 이 두 분의 이야기를 전시했었다. 개관식날 참석하기로 사전에 약속했던 두 분이 모두 그 시기 '병상'에 누웠다. 그들은 이미 위태하게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있었다. 하루바삐 만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길영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성동문화원이 매년 발간하는 책 <근현대 사진 이야기전>이었다. 2009년부터 매해 빼놓지 않고 발간해 왔으니 어느새 13권째다. 그 안에 자주자주 전길영 선생의 제공 사진이 있었다. 이상돈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책 <마장동-수도권 최대 축산물 단일 시장>이었다. '2013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축산시장과 마장동 사람들의 삶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 이상돈이란 이름을 다시 위 <이야기전>에서 만났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판한 왕십리 지금은 재개발된 왕십리 도선동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발자취가 담겨있다전길영은 왕십리서 1928년에 났다. 지금은 헐린 전풍호텔 인근이 그의 집터였다. 당시엔 그곳은 세단쯤 되는 복숭아밭이었다. 그는 날리는 복숭아꽃 그늘 아래서 요람에 안겨 흔들렸을 것이다. 기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일성은 '그리운 고향 왕십리'였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깔려 운행을 하는 곳. 미나리꽝 배추장다리가 지천이던 이곳에 눈과 몸이 큰 잠자리 천지가 무수히 날았다. 밤이면 개똥벌레들이 '빛의 군무'를 추던 곳이 여기 왕십리고, 도선동이었다. 길영의 가족들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다. 전길영까지 13대째다. 하여 전길영은 서울토박이회 회원이다. 서울에 오직 하나 남아있는 중구의 토박이회를 그는 자주 찾았었다. 그의 조상은 나라의 녹을 오랜 동안 먹었고, 전길영의 부친 전명록은 왕십리에서 100여년 전에 이미 가게를 차리고 기업을 운영했다. '제일농원'은 왕십리에서 동대문으로 향하는 신작로에 자리를 잡아 장차 번성할 가문의 뼈대를 세우고 있었다. 현재 마장동 세림아파트 자리에 있던 한영중고등학교가 강동구 명일동으로 옮겨갈 때, 부친 전명록은 그곳에 소유하던 땅 전풍농장터 4,130평을 희사해 한영외고의 터가 됐다. 동국대 46학번, 1회 졸업생 전길영은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장교교육을 받고 전장에 나섰다. 제대후에는 한창 그 시대에 첨단 산업이던 '자동차 수리'업에 종사했다. 그는 도선동장도 했다. 그가 동장을 하던 1963년, 자택에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수염을 길게 단 할아버지들, 머리를 곱게 쪽진 할머니들이 자리를 채웠다. 당시에는 마을에 변변한 연회홀도 없던 때여서, 그의 부인 김정분 여사가 음식을 차려 냈다. 전길영의 동생 결혼식때 가족들이 모인 곳은 그네 집안의 가택이다. 예전에는 대청마루가 넓었는데, 거기 온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부인 김종분이 결혼 전 찍어서 갖고 있던 1946년의 왕십리 전차 사진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기록이다. 보노라면, 시대의 기록이란 결국 사람의 한 살이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왕십리2동 뒤편, 무학봉 근처에는 현재 수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거기 왕십리kcc스위첸 아파트도 있다. 이 아파트를 들어가 외편 길로 오르면 거기 뒤편 절벽에 마애불이 서있다. 신라 흥덕왕 2년 827년에 지어졌다는 절 안정사가 헐리고 남아있는 흔적이다. 도선동의 동명은 신라 고승 도선대사에서 왔는데, 도선의 탄생연도가 역시나 827년이다. 앞으로 5년 뒤인 2027년이면 이 절(터)의 역사는 1,200여년이 된다. 왕십리도선동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전길영 선생의 흔적은 도선동 동민회다. 이것은 전길영 개인의 기록만이 아니다. 200년전 영정조시대 산제치성제로부터 이어져 오는 마을축제와 제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동민회가 있는 도선동 360번지는 한때 개인 소유로 뺏길 뻔했던 마을총유재산이다. 그걸 찾느라 전길영 선생과 도선동 사람들이 함께 나섰더랬다.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함께 마을을 이루고 문화를 길러 다시 그네들이 사는 땅을 바꾼다는 증거가 여기 있었다. 추신: 유튜브에서 <왕십리 고향 전길영 작사 김성수 작곡>을 검색하면 시인 전길영의 '노래가 된 시'를 들을 수 있다. <성동의 사람들_전길영_땅은 사람을 사람은 문화를>을 검색하면 전길영의 위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원동업 기자 <iskarma@daum.net>도선동동민회_매년 음력 10월 1일이면 애향봉에서 산신제를드린다. 200여년 전 영정조 시대부터의 산제를 계승하고 있다.안정사는 2027년이면 1천2백여년의 역사를 갖게되지만 이미 헐렸다 . 안정사 터 뒤편에 남은 마애불과 표지판만이 그곳의 역사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전길영 선생은 그가 담양전씨의 후손임을 잊지 않는다 옆의 아령은 아흔다섯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옛아령이다상왕십리역에 세운 왕십리 도선동 홍익동 유래비다 홍익동은 홍익인간에서 왔다 도선동공원에는 도선과 무학이 만나는 조각상도 있다.현재의 왕십리 도선동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길은 없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1-13 14:05

<원동업이 만난 사람> 마장동축산물시장 상인과 주민 “함께 도시를 다시!”사진 왼쪽부터 이상희 이사장, 주민 박주환, 마장주민자치회장 김영진, 잔재물협동조합 총무 심현수,새해에는 주식시장의 황소처럼, 탐스러운 돼지처럼 복되시라 빌었다.마장동은 에너지 발전소다. 대성연탄이 있었고, 한전 내연발전소, 고려가스가 있었던 과거 때문만은 아니다. 우시장이 오랜 동안 있었고, 도축장이 있었던 역사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는 마장동축산물시장이 있다. 대한민국 고기의 상당 부분을 충당하는 주역이다. 그러니 대한민국 혹은 서울 사람들의 에너지가 여기서 온다. 45년이 훌쩍 넘어가는 마장동 먹자골목은 한우 고기를 제대로 먹고자 하는 이들이 작정을 하고 온다.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고기를 사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고기 익는 마을'도 진작 문을 열고 있다. 서문쪽으로 주로 한우가, 북문의 족발과 곳곳에 돼지고기 천지인 곳이 여기 마장동축산물시장이다. 관광객, 소비자가 방문하면 행복한 경험이 덤으로 온다.  이상희(왼쪽) 서울동물성잔재처리협동조합 이사장이 박주환 주민의 제안을 듣고있다.교통난과 냄새, 마장동 접근 가로막는 장애물그러나 이런 '에너지 생산-소비지'의 이면에 그림자도 있다. 외부인들을 가로막는 난제들이다. 교통난과 냄새-한번 왔던 손님은 다시 오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때문이다. 시장엔 3,500여 개의 정식 업소들이 혼재해 있다. 큰 업소엔 지방 도축장서 온 냉동탑차가 줄지어 고기를 내린다. 소매점으로 도매점으로 고기를 운반하는 오토바이들이 복잡하게 곡예를 한다. 바쁘면 카트와 수동수레도 동원된다. 한 사람 겨우 빠져나갈 만큼의 공간이 없어 차량은 정체를 이룬다. 당연히 위험도 상존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큰 문제도 있다. 냄새다. 축산물시장에 들어서면 맡아지는 이 냄새는 반갑지 않다. 내부의 상인들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가끔 오는 이들이야 '잠깐!'이지만, 주변 주민들로서는 '눈엣가시' 아니, '코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냄새의 주범은 고기 이외의 축산물에서 나오는 부산물들(혹은 폐기물들)이다. 마대에 실려 운반되다 흘러나오거나 제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해 부패하면, 냄새는 '지독한 혐오물'이 되고 만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이 과제와 오랜 동안 씨름해온 이상희 서울동물성 잔재물처리 협동조합 이상희 이사장을 만났다. 축산물시장의 교통난과 냄새는 주변 주민들에게는 큰 고민거리다.오토바이는 잔재물을 실어나른다 마대 대신 플라스틱을 쓰자는 운동이 한참이지만, 아직은 갈길이 멀다 - 소개를 부탁드린다. “열세살에 고향 경주에서 이곳 마장동에 왔다. 권투를 10여년 계속하다가 스물다섯살인 72년경 고기장사를 시작했다. 늘 보고 접하는 게 그쪽 일이니까. 내가 장사를 시작한 때는 이미 도축장도 생긴 때였다. 나는 여기 축산물시장상인연합회 2대 회장도 하고, 지금은 마장동 잔재물처리협동조합서 일하고 있다. 50년째 마장동 상인이다.”- 잔재물? 설명을 좀 해주신다면?“소 돼지 잡으면 고기와 뼈를 바르는 정형작업을 한다. 고기를 빼면 모두 잔재물이다. 부산물이라고도 한다. 시장에선 뼈는 뼈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선별한다. 이런 것들을 선진국에선 폐기물 취급한다. 미국 일본 블란서에선 오히려 돈 받고 치운다. 우리는 상품으로 본다. 가공하면 마가린도 만들고 쇼팅도 만들고 비누도 생산되니까. 해서 우리도 '폐기물법'을 만들자 했고, 환경부 농수산부를 거쳐 법제정이 됐다. 한 30년 됐나? 그런데 '폐기물법'은 그 규정이 되게 엄격하다. 해서 부산물-잔재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게 우리 협동조합의 시작이다. 사실 우리 협동조합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임무랄까? 과제를 안고 출발했다.”- 과제와 임무? 그게 뭔가?“고기가 들어가는 모든 정육업소에서 가공이 끝나면 잔재물이 나온다. 여지가 없지. 그걸 감자탕집 국밥집 도가니탕집 순대국집 같은 곳에서 사들인다. (마장동이 시민들 에너지 발전소란 게 이런 의미다) 그런데 여기가 도매로 하니까, 그 업소서 영업한 뒤 남은 뼈들, 기타 폐기물을 다시 이쪽서 회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축산물시장에서 나오는 잔재물이 하루 150톤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잔재물이 150톤쯤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모든 잔재물을 옮길 때, 마대자루를 썼다. 거기서 흘러나온 유지들이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냄새의 원인이 됐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성동구청과 함께 노력해 온 게 우리들이다.”마장도시재생 사업의 핵심이었던 처리장 해결 난항- 축산물시장에 오면 풍겨오는 냄새는 어려운 문제다. 그간 해결하고자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지 알고 싶다. “전 고재득 구청장도 애를 많이 썼는데, 하치장을 만들 장소가 없었다. 중구난방이니 그걸 정리하지 못했지. 정원오 구청장이 당선된 뒤 만났다. '오랜 동안 마장동서 일하시고, 회장도 하셨으니,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더라. 서로 노력을 많이 했다. 서울시에서 사무관으로 있다가 성동구청으로 오신 김재겸 교통건설국장이 나와 같이 다녔다. 대성유니드 근처 길거리의 집게차 기름차 같은 거라든가, 주변에 포장마차 같은 거를 거의 다 정리했다. 이후에도 지역경제과 조현용 팀장, 청소과 홍종철 과장도 함께 큰 애를 쓰셨다.”- 도시재생이 시작됐을 때,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유지처리 시설의 건립이었다. 경과가 어떻게 되었나?“현재 마장동 525번지에 건물을 짓고 있다. 원래 그 자리에 하치장 만들고, 유지처리를 깨끗이 해 민원이 안 들어오게 하는 목표가 있었다. 10억 예산도 받아서 가건물을 지으려 했는데, 주변 현대아파트에서 '들어오는 입구라 안 된다'는 민원이 있어 하지 못했다.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 마장도시재생사업을 하게 된 거다. 예산 130억을 받아 건물을 짓고, 거기 지하에 유지처리장이 들어가도록 했다. 현대아파트는 물론 마장동의 세림이나 기타 아파트와도 만나고 동의를 구했지. 차량도 밀폐된 걸로 바꾸고, 지하에서 처리하고, 처리용기도 마대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밤이나 새벽 운송 등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최근 아파트에서 반대 민원이 심했던 걸로 안다. 그래서 그 방안이 다시 취소됐다. 왜 반대하는지 정말 모르겠고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다.”이상희 이사장은 오랜 검토와 협의를 거쳐 추진돼 온 안이 막판 뒤집힌 데 대해 여러번 깊은 아쉬움을 토했다. [이 문제에 전력투구해 온 마장도시재생 강헌수 센터장의 '사직' 역시 이에 연유를 둔다.] '그런 시설을 하면, 축산물시장이 앞으로도 대대손손 유지될 것을 염려하는 아파트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애써 이해해도 그렇다. 시장은 먼저 박힌 돌. 굴러온 돌에 밀려 나는 게, 그들로서는 '정당한 일'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로서도 이곳은 삶의 터이니까. 아파트가 설 때, '시장은 이전됩니다'라는 '말'을 듣고온 주민들로서도 할말이 없는 게 아니지만….”청소, EM살포, 용기변경 등 노력 계속해와. 큰 문제 같이 풀어야  -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다. 그래도 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많은 부분 개선도 됐다고 하던데. “마장동축산물시장 하수관은 중랑하수처리장으로 연결된다. 전에 현대아파트 지을 때, 하수관을 이곳에 연결하려던 시도가 있었는데, 큰일 날 일이라고 우리가 막았다. 생활하수와 연결될 일이 아니니까. 하수관 청소도 기름이 껴 굳으니까 자주자주 한다. 도시재생이 들어오고 물청소도 화·목에 두 번씩 한다. 습식청소차가 들어왔다. 펀펀마주아리 같은 사회적기업(대표 박진옥, 예비사회적기업) 등에서 EM도 대로변 하수구와 오염이 심한 곳에 뿌린다. 마대를 오랜 동안 써왔는데, 플라스틱 통으로 바꿨다. 전에는 독수리 발톱으로 마대를 잡아올렸는데, 지금은 각 업소에서 통에 담아 소규모로 운반해서 처리한다. 구청에서도 단속을 강화했다. 업소나 수거업체도 영업정지 같은 강한 제재를 여럿 받았다. 이젠 다들 조심해서 최대한 흘리지 않고 처리하려고 노력하는 점도 달라진 점이다.”3대 마장우시장 상인연합회 이경래 이사장은 마장동 축산물시장 상인들에 대해 다음처럼 평한 적이 있다. “뭉치자 하면 안 뭉치는 데 일등이고, 협조해 주자 하면 십시일반 협조하는 데도 일등이에요.” 현재 마장동축산물시장상점가 진흥사업협동조합의 협회원 수는 대략 800여 곳이다. '조합'이 상인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면서, 내적인 규율에 의해 시장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면 '조합 가입률'은 중요한 선결 요인이 될 것이다. 마장도시재생 상인과 주민들의 상생협의체에서 주민대표를 맡았던 김영진(마장동 주민자치회 회장)의 말.“시장에서 50년 동안 마대 자루를 썼잖아요. 그걸 플라스틱으로 바꿨어요. 그거 보고 시장 상인들이 이렇게도 하는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한번 바뀌는 게 중요한 거지, 바꿀수 있고, 바뀔 수 있다고 봐요. 우리들이 더 소통하면서 노력해야겠지만.”'고기는 먹겠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일'은 나몰라라 해온 건 우리 관습-습관이었다. '고기는 옳지만, 냄새는 그르다'고 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우리 책임을 다른 곳으로 미룰 수 없다면, 제대로 달려들어,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풀어가는 일이 남았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지구 멸망의 상황에서 길을 찾는 이들의 응전을 보여준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마장동 주민의 제안> 박주환 선생이 고안한 트램 설계 및 구상도(가안) 교통난과 냄새 해결할 근본적 해결책 써보자.시장 누비는 트램 어떤가? 박주환 선생 세림아파트 한마음공동체 총무이자, 전에는 이곳 대표자회의 회장이었던 박주환 선생은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최근 참여했다. 마장용답사근의 생활권 위원회다. 입안을 위해 주민의견을 듣는 이곳에서 박주환은 최근 하나의 중요한 제안서를 냈다. <마장축산시장 환경개선방안 제안서>다. 시장의 교통난과 환경(냄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아이디어다.  - 제안서의 핵심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면? 현재는 냉동탑차와 오토바이 등이 마구 엉기면서 교통난을 만든다. 잔재물도 제각각 처리하면서 오염되고, 이로 인해 냄새도 가시지 않는다. 마장동 시장을 남북축과 동서축으로 궤도를 설치하고, 특수한 설비를 갖춘 트램(레일을 달리는 노면전차)을 설치해서 중앙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트랩이 설치되고 운영되는 이외의 곳은 공간이 남고, 관광자원화도 될 수 있다. [그림 참조] -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데 사실 많은 비용이 든다. 마장동서 운영됐던 기동차 같은 설비차를 새로 설계해야 하고, 중앙관제센터 설치도 해야한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내가 근무했던 포항제철과(광양제철소) 현대제철에서의 경험이다. 복잡한 과정이 중앙서 처리된다. 무엇보다도 상인들이 먼저 이를 이해하고 동의하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사실 어려운 것은 후자일 수도 있겠다.” 박주환 선생은 이상희 이사장과도 만났다. “십분 박주환의 제안을 이해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이이사장의의 결론은 간명했다. “초기에 조성될 때라면 몰라도…, 현재 50여년 굳어진 상황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첫 제안일 뿐. 제안은 두루 사람을 거치며 수정되고 검토될 것이다. 변화는 진행중이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2-01-13 1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