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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업이 만난사람]  어린이미술관+동네놀이터+에코뮤지엄 헬로우뮤지엄 김이삭 관장젠트리피케이션으로 사라질 뻔한 헬로우뮤지엄을 구해준 것은 주민들이었다. 헬로우뮤지엄이 동네미술관을 지속하는 이유다. 김이삭 관장 옆에 세월을 이겨낸 옛 아이들의 책상이 놓여있다.소녀는 호텔 부근에 사는 게 틀림없었다. 집에서 혹은 학교에서 빠져나와 어김없이 이곳에 오는 듯했다. 아이가 가는 곳은 호텔 안의 미술관이었다. 막는 이는 없었다. 미술관은 한적했고, 대신 압도적인 색과 선과 질감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는 거기서 오래 머물렀다. 한국의 근대화 70년대가 막을 내리고 이제 88올림픽을 기점으로 하는 현대화-세계화로 나아가는 즈음이었다. “워커힐 아파트서 살았어요. 놀이터서 그네를 타면 멀리 풍납토성까지 보였죠. 놀이터 말고는 놀게 없는데. 근처 워커힐호텔 안에 있던 미술관은 무료였어요. 집서 호텔까지 난 길을 따라 거길 갔죠. 워커힐 미술관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어법을 따르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국전작 전시라든가 미술인 사교모임을 넘어 세계적 거장이 된 작가들 전시들도 많았어요. 공공미술도 많이 다뤘고. 우리 조각상이 여성 인체와 모자상일 때도 거기선 대형, 기하학 작품, 전위적 실험적 작품들이 전시됐어요. 에어컨은 계속 나오지.(웃음) 거기 큰 창가에 대리석 단이 있었는데, 거기 누우면 시원했어요. 옆으로 누우면 자연의 풍경이 보이고 다시 옆으로 누우면 왼편에는 미술작품들이 걸려있는 거죠.”좌풍경, 우미술. 혹은 우자연 좌예술. 그 경계에 누워 한없이 상상하고 즐거워하던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이젠 '중년이 된 그 소녀' 김이삭 관장을 지난 5월 8일 헬로우뮤지엄에서 만났다.헬로우뮤지엄은 지역과 협업한다. 봄봄서울숲을 진행하기 위해 헬로우뮤지엄의 도서관 라보를 옮겨왔다. 왼편부터 김이삭 관장, 김윤지 북큐레이터, 허지유 인턴, 이하린 학예연구원 ◆워커힐 호텔 속 미술관 찾던 소녀 어린이미술관을 세우다김이삭 헬로우뮤지엄 관장은 사뭇 바빴다. 5월 아닌가? 헬로우뮤지엄은 서울숲에서 <봄봄서울숲> 행사를 치루는 중이었다. 헬로우뮤지엄 내 도서관 라보(Library of Art Book)에서 예술 그림책 300여 권쯤을 빼 서울숲 커뮤니티센터로 옮겼다. 거기서 <에릭 칼의 작은 친구들 展>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울숲은 성수동과 함께 신세대 외국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한국-서울의 생태관광지가 된 곳. 이들을 위한 공연과 생태체험도 넣었다. 국악실내악팀 다감의 공연과 독일의 환경운동가 엘렌과의 서울숲 탐사대 등은 그런 활동의 일부다.보여지는 꽃 아래엔 뿌리의 수고가 있다. 김이삭 관장은 일상에서 접하는 예술의 감상을 통해 창조성의 뿌리가 되는 그 감수성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헬로우뮤지엄은 성수동 성수일로 12길 20 성동안심상가에 위치해있다. 2층 전층을 쓴다.  5일 어린이날에는 <얘들아~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단다>를 주제로 성능경 작가가 퍼포먼스를 펼쳤다. 옛 가족사진들과 색색깔의 사탕, 카라멜 껍질들이 현란하게 붙어있다. 경희대자연사박물관과 협업한 압화들과 박제한 물고기들도 빼곡하게 벽면에 피었고, 또 유영한다. 수평수직을 알려주는 레이저 빛이 반짝이는 공간 사이로 학예사, 큐레이터들의 발길도 분주하다. 이곳 저곳마다 작업지시를 줘야하는 김이삭 관장의 시간을 쥐어짜 짬을 만들었다.- 이삭이라는 이름이 궁금했다. 종교적 배경 혹은 다른 뜻? “남동생이 있는데 대원이다. 클 대, 이룰 원. 나는 효정이. 효가 있는 정원.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젠더 감수성 측면에서 첫째를 딸로 낳아서 외할머니가 친할머니 얼굴을 못 봤다는 그런 이야기도 들었다. 시대적 상황이겠지만 기울어진 운동장 같았다. 내가 좀 저항적 기질이 있다. 스스로 이름을 짓자 생각했다. 나는 어떤 거에 감명을 받았지? 아! 황금빛 벼들. 이삭은 곡식이 여물어 열매가 맺힌 부분이다.”- 현재는 긴 과거를 갖고 있다. 어떤 부모,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궁금하다.“아버진 광고일을, 어머니는 작가생활을 하셨다. 어머니는 개성, 아버지는 평양분이셨다. 두 분은 서울서 만나셨지만 외가 친가 모두 이북이다. 명절 때 만나면 북한방송서 들었던 사투리들도 들리고. 기억 속의 엄마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밖에 작업실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부엌과 엄마 작업실이 늘 혼재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전부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지. 아빠가 어려운 시기를 당하자 엄마는 내조에 매진하셨다. 붓을 한번 꺾으신 건데, 기로에서 가정을 선택하셨던 게 아닐까? 나는 엄마 그림의 따뜻한 색채를 좋아했다. 엄마 친구분들 중엔 '괴팍한 분들'도 많았다. 긴 머리에, 꽃 꽂고. 자기 색깔을 가지고 살던 그분들 모습이 내게 영향을 미쳤다. 엄마도 내가 가부장적 사회 안으로 들어오는 걸 원하지 않았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 세계 안에서 너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시작도 하게 된 거고.”◆어린이미술관에서 동네놀이터로 에코뮤지엄으로그가 '용기를 갖고' 시작한 것이 '비영리미술관' 헬로우뮤지엄이었다. 삼성이 운영하던 어린이박물관이 채 20여년을 채우지 못할 만큼(이곳은 삼성이 서울시 상상미술관 위탁을 받으면서 사업 중복을 이유로 폐관했다), '비영리+예술' 사업은 쉽지 않은 일. 어쨌든 그가 2007년 강남구 역삼동서 개관한 '국내 최초 어린이미술관'은 놀랄 만한 성과를 지금껏 보여왔다. 17년간이나 '생존'한 것. 그와 뮤지엄은 어떤 길을 밟아왔을까?- 관장께선 예술중고교를 거쳐 대학서 회화를 공부하고, 외국에서 미술관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내셔널갤러리와 스미소니언박물관을 거쳤고(그는 이곳서 어린이와 청소년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했다), 한국에선 국립중앙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 개관에 참여했다. 사설 비영리미술관을 운영하고자 했던 게 비대칭적인데.“큰 공간서 일했고, 사회 초년생때 공조직에서 배우기도 했지만, 한계들을 많이 느꼈다. 혼자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보자! 그래서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해봤지만, 지속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주변에서도 다들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 그러신다. 내가 시도하는 것들이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었다. 언젠가 소멸하는 시기가 있긴 하겠지. 금호동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했을 때, 회원들의 성원으로 여기에 왔다. 곧 코로나가 닥쳤을 때 문 닫아야하나 싶었지만, 성동구의 임대료 면제 등 지원이 있었다. 근근히 버텨왔지. 리듬이 있지 않나? 소멸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잘 소멸할 것이고 더 할 일이 있으면 더 잘 해내겠지.”- 참, 늦었다. 헬로우뮤지엄에 대하여 소개를 해주시면?“아이들이 스스로 질문을 가져보도록 하는 공간이다. 예술에 그저 '아름답다' 이렇게만 반응하는 거 말고. 이곳서 행위예술을 펼친다. 할아버지가 왜 부채질을 하지? 왜 운동을 하고 있지?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경험들을 하는 것.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전시, 그림책을 모으고 연구하고, 현대미술 작가들을 연구해 발굴하고, 전시 교육도 한다. 어린이들과 예술을 잇는 매개자라고나 할까?”- 헬로우뮤지엄 변천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2007년 강남서 개관할 때는 어린이미술관, 2015년 금호동은 동네미술관, 2019년 성수동으로 오면서 에코뮤지엄을 내걸었다.”◆창조성의 원천은 감수성, 일상 속 예술 즐겨야 큰다.- 강남서 “대통령의 손자들과 재벌회장이 손녀들의 필수 예술교육 코스”이런 이야기도 있었다는데. “당시가 5일제가 도입돼 전개되는 시기였다. 어린이문화가 시작하는 때인데, 갈 만한 예술공간은 드물었다. 아트 랩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과 실험했다. 나도 스무 명쯤 아이들과 함께 하고. 그저 비닐봉지 열 개만 가지고 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공감각을 어떻게 드로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활동도 했다. 연주가들도 필요하고, 실험적 재료들도 써야하니 비용 포함해 부모들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걸 끝까지 같이 간 집단들이 있었다. 전국서 오신 분들. 그런데 경제적 수요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게 점점 불편해졌다. 교육을 줄이고 전시를 주요기능으로 넣어 금호동에선 더 많은 아이들과 만났다.”- 서울문화재단이나 C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했다고 들었다. C프로그램은 뭔가?“게임회사, 아이티히사 등등이 사재를 털어 만든 공익 벤처기부펀드다. 네셔널 지오그래픽이나 저희 같은 곳을 후원해 주셨다. 금호동 공간을 운영하고, 여기 이사 오는 것까지 도와주셨다. 아이들과 실험하면서 그 안에 아이들을 위한 해방의 공간을 만들 수 있던 힘이었다.”= C프로그램은 실험적 프로젝트에 투자-지원해 왔다. 놀이와 배움을 키워드로 하는 곳들이 주요 대상. 그들의 공간은 질문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실험을 지속하는 힘은 무엇일까?” “학교가 없는 곳,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 교사 대신 테블릿만으로 배움이 가능할까?”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 중심 학습이 가능하려면 어떤 시스템이 필요할까?” 나도 질문했다.- 성수동의 헬로우뮤지엄은 에코뮤지엄을 표방한다. 생태와 환경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지만, 그것을 강조하다 보면 도덕과 윤리, 사회와 정치의 영역과 겹치거나 넘어가게 될 위험이 있지 않나?“환경재단도 아니고, 동물복지에 관심이 있어서 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요? 하고 우리 직원도 물었다. 예술이 삶과 연결되는 지점을 잃으면 예술도 자기 목적성을 잃는다. 어린이를 둘러싼 자본주의적인, 신자유적인, 하나의 꼭지점을 향해가는 획일주의. 전쟁이거나 생태거나, 사회학적인 담론들을 건드리지 않고는, 어린이들 삶에 접근하기 어렵다.  이런 것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 그러니까 문제를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는 것. 이것이 내가 아이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이미 젊은 세대들은 그런 것들을 공공선으로, 자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과 함께 가고자 한다.”= 2019년 10월, 성수동 헬로우뮤지엄 재개관전은 '헬로 초록씨'와 '미술관의 개구장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자연과 인사했다. 성능경, 이건용, 윤진섭 같은 1세대 예술가들과 만났다. '원로'들은 온몸으로 미술관에 밀고 들어와 아이들과 놀았다. 아이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그냥 알아보았고, 감응했다. 전위적인 할아버지 예술가들에게 어린이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왼쪽부터 성능경, 이건용, 윤진섭 작가. 이들 노작가들은 행위예술을 통해 어린이들과 만났다. 예술은 아이들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열쇠다.“미술을 감상한다는 건 그냥 시력을 갖고 보는 일이 아니지 않나. 무슨 말을 어떤 방식으로 한 건지 느끼는 것이다. 시각적 문해력이기도 하다. 작품을 통해 본 세상은 풍요하다. 그냥의 삶과는 다르다. 거기 삶이 바뀌는 고갱이가 있다. 요는 문화자본이 아니라, 감수성이다. 미술엔 그 키가 있다. 도슨트를 통해 해설을 듣다보면 공감하고, 알게도 된다. 식물의 뿌리처럼, 영양분을 빨아들일 기저를 만드는 것. 일상에서 자주 미술과 만나고 알 수 있는 경험을 해야한다. 헬로우뮤지엄은 오랜 동안 그 일을 해온 곳이다.”2024년은 '제네바 아동권리선언'이 채택된 지 100주년이다. 그 당시 아이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먹이고, 보호하고, 구조하고, 교화하는' 것이었다. 102년 전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선언엔 더 진전된 혜안이 있었다.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 주십시오.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2024년 5월, 소파가 한국에 온다면? “공부만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아이들을 핸드폰, 게임화면 구경 시키지 마시고 헬로우뮤지엄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하지 않을까? 40년 전쯤, 자연 속에서 미술관을 향해 걷던 그 어린이가 생각났다. 5월의 성수동에, 우리 사는 마을 곳곳에 그런 어린이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고, 어린이만 아니라 어른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그림책, 아이들 이야기, 노작가의 흔적들도 이삭처럼 주워가야지 싶었다.

뉴스 | 원동업 기자 | 2024-05-10 15:31

지준기문학평론가천우문학관 회장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큰 공적을 이루었을 때, 명성과 이름을 거두고 물러날 때를 잘 간과하는 현자가 되어야 한다. 즉 잡을 때 손 흔들며 명쾌히 떠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덕장이다. 절대 쉽지 않은 어원이지만 실천에 옮기는 자만이 공경받고 후세에도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법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다에서 죽고 산 숲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속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의 화근은 자신에 달려 있다는 뜻이라 생각한다.무릇 사람들은 자신에 걸맞은 옷을 입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며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한 사람과 인연을 가진다면 반드시 멋진 삶의 주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지고지순한 사랑학은 결코 이중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하는 성급한 결정과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은 유유자적한 평상심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인도의 타고르 시인은 조국을 위하여 살고 이념을 사랑하며 아시아인으로서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1917년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는 詩를 헌시로 썼듯이 희망은 현실적인 사상을 생산하는 힘의 원동력임을 명심하기를 바라며 선조 현인들처럼 온 누리를 밝힐 동쪽의 나라 일출에 경의를 표한다는 타고르 시인의 예언자적 세계관과 국가관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번 달의 화두는 자신에게 주어진 때와 시기를 잘 다스리는 자만이 겸양지덕의 으뜸이 아닐까 한다.

뉴스 | 성광일보 | 2024-05-10 15:18

이성훈(수필가, 사진작가)몇 해 전 낙산공원 인근 한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서 사진 촬영을 하다가 우연히 장미나무에 피어 있는 장미꽃을 보았다. 장미 특유의 붉은 색은 피보다도 강렬해 보였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로 이미 생과 사의 구분이 모호한 그대로 박제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살아서 싱싱했을 때보다 더 오묘하고 깊은 색상과 자태를 뿜어냈다. 문득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떠올랐다. 살아서 그대로 미라가 되어버린 장미의 열반인가? 지구상의 유기체 중에 유독 인간만이 생로병사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부하며 피하려고 몸부림친다. 다른 대자연의 생명체들은 있는 그대로의 순리를 받아들이기에 인간과 같이 느끼는 고통은 없다. 오죽하면 불교에선 이러한 “축생"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해탈”만이 궁극의 열반이자 최고의 경지라 선포하였겠는가? 물론 나이 들어 늙고, 병들고, 죽음의 열차의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슬프지 않을 인간은 없다.그토록 아름답던 얼굴과 피부는 생기를 잃고 주름이 자욱하며 꽃보다 곱던 몸은 마른 가시나무처럼 앙상하고 볼품 없어져가고 기억과 의식, 민첩성은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서서히 퇴행되어간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도 피해가진 못 했다. 진정 “하루 밤의 꿈결 같은 젊음의 날들이여, 우리들의 뜨겁고 아름답던 사랑이여…”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필자 역시 슬픔이 찾아오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상대적으로 좋은 점도 있다. 체력과 여건의 한계로, 하루에 이것저것 여러 일을 하고 벌리기보다는 하루 한 가지씩, 그것이 일이 되었건 사람과의 만남이든 좀 더 여유 있게 집중할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리고 와인과 위스키도 오랜 기간 숙성 될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기 마련이다.사람 역시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오크통 속에 좋은 포도 원재료를 넣고 좋은 환경에서 숙성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숙성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진정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가 나며, 눈빛과 표정은 늘 여유롭고 자상하며, 가슴속에는 무언가 뜨거운 태양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의 외적인 심미적 모습은 붉은 태양이 지면서 나타나는 노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좋은 술을 감별하려면 반드시 깊고 넓은 성숙된 안목이 필요하다.현대 사회는 삶의 질 향상과 의료 수준의 발전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허나 100세까지 산다고 하여도 노년기의 삶의 기간만 기형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축복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적어도 오십대의 신체 모습으로 칠십을 보내야 가치 있고 온전한 장수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노력여부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거의 어려운 일이다. 어차피 시간은 흐른다. 남은 시간은 갈수록 적다. 어쩌면 우리 삶의 가장 깊고, 짙게 숙성된 담금 주를 개봉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파티를 준비하고 축제를 즐겨야 한다. 참 벗들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함께 나눌수록 풍성할 것이다. 식탁 위에는 장미꽃 장식과 함께, 각자 살아온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일기장과 사진첩, 좋아하는 시집 몇 권, 달콤한 쿠키 조각, 향이 좋은 쿠바산 시가 몇 개비, 그리고 아직 심신의 상태가 비교적 건강할 때 아낌없이 소중한 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하자. 시기를 놓쳐 버리면 가장 후회되는 것이 이것이라고 앞서 산 이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마음속에 진주를 품어도 밖으로 내뿜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만져볼 수 없다. 사랑도 가슴 속에만 머무르면 완전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려거든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또한 사랑을 할 때에는 실익이나 조건을 따지지 마라. 사랑 그 자체는 고귀하고 영롱한 것이다. “해는 저물 때 가장 붉다.” 붉을수록 뜨겁고 열정을 다한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무한의 별들도 그 수명이 다할 때 가장 밝은 빛을 낸다, 마지막 에너지를 소멸하고 한줌의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날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로 박제가 되어버린 장미가 내게 말했다.“때가 되어 내가 피니 아름다웠고, 때가 되니 내가 지고, 계절이 바뀌면 또 다른 장미가 피어나 만발할 거라고.”

뉴스 | 성광일보 | 2024-05-10 15:09

석천 함영관수필가.지금도 홍시를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는 늦가을부터 겨울에 들어가기 전까지 해수병으로 고생하셨다.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 해수병에 좋다는 홍시를 시기에 맞춰 서둘러 준비를 하셨다. 전통적으로 떫은 땡감을 며칠 동안 볕을 쫴주거나 항아리에 넣어 두면 떫은맛이 제거되고 말랑하게 무르익은 맛있는 홍시가 된다. 달콤한 맛의 홍시는 숙취를 풀어주고 소화를 돕는 등 건강에도 좋다. 홍시는 소화 기능과 잔기침에 좋고 비타민C가 풍부하며 호흡 곤란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며 항상 준비하셨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사랑방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때 옛날 구조 집이라 아랫목 벽에 지금은 잘 볼 수 없는 벽장壁欌이 있었다. 높이가 어른 키만큼 높은 곳에 문이 달려 있었으며 다른 문은 없어 문을 열어봐도 어두컴컴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홍시는 깊숙이 넣어두고 자물쇠로 잠그셨다. 그곳은 할아버지의 비밀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항시 자물통으로 잠가 두었다. 홍시는 언제고 기침이 나오면 잡수실 수 있도록 옆에 두시고 할아버지께서 기침이 시작될 징후가 나오면 우리 형제는 홍시를 할아버지께 대령하고 있었다. 홍시는 너무 말랑말랑해서 터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뤘다. 할아버지가 해수 기침이 시작하시면 한동안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헉헉하셨다. 얼마 후 입 안에 홍시를 물고 계시다 보면 기침이 멈추시어 못다 잡순 홍시를 잡수셨다. 우리 형제는 할아버지가 한참 기침으로 고생하실 때는 그저 바라다볼 뿐 빨리 멈추시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침이 끝나고 나면 벽장에서 홍시 두 개를 꺼내 너희들도 먹으라고 주셨다. 나는 동생과 함께 '게 눈 감추듯' 맛있게 먹고서 할아버지께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그래 이제 나가서 놀아라.”하셨다. 또 홍시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내가 7~8세 때로 기억난다. 그때 이웃에 사는 숙부님 댁에 놀러 갔다. 그곳에는 사촌 누나와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한참을 놀다 보니 찬장 속에 홍시가 꽤 많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갖다 먹자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 대답이 없다. 그래서 내가 일어나 광주리에 담겨 있는 홍시를 꺼냈다. 그때 여동생이 “아버지가 나가시면서 우리가 먹을까 봐 세어놓고 나가셨다.”라고 하면서 먹으면 혼난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내가 먹었다고 할 테니 한 개씩만 먹자고 하면서 세 개를 꺼냈다. 하나씩 먹었다. 동생들이 먹으면서도 혼날 생각으로 맛있게 먹지 못했다. 그 당시 숙부님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딸들까지 미워서 외출할 때 홍시를 세어놓고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 당시 시골에 주전부리가 없을 때라 그들이 홍시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그때 내가 용감하게 꺼내주었는데도 잘 먹지를 못하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무섭게 엄포를 놨으면 먹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을까? 나는 그때 사촌 여동생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먹어도 오히려 너무 많이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자식이 먹는 것이 아까워서 홍시를 몰래 감추신 숙부님이 미웠다.지금도 홍시를 보면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사촌 여동생이 생각난다.

뉴스 | 성광일보 | 2024-05-10 15:02

김근당 소설가팀장인 남자는 그로 인해 경고 처분을 받았다. 남자는 허탈했다. 팀원들의 사기도 침체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는 퇴근 무렵에 기분풀이를 하자고 문자를 보냈다. 고향의 대학에서 흔히 하던 일이었다.주류와 경양식에 음악이 흐르는 카페였다. 팀원들은 남자가 권하는 술에 오랜만이라 취하는 것 같았다. 구석 자리는 조명이 흐르고 분위기가 묘했다. 몇몇 모여 앉은 팀원들이 계속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불빛 흐린 구석에 앉아 있는 선임이었다. 선임은 남자를 흘낏흘낏 건너다보며 직원들에게 계속 속삭였다. “분위기가 다운된 것 같은데 건배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자고, 서로 속닥거리지 말고, 자, 건배!”남자는 직원들의 관심을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선임의 손에 있었다. 건배를 하는 척 술잔을 들고는 조금 지나자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남자는 귀를 세웠다. “저 원시인 같은 인간이 팀장이라고 팀원들 족치기나 하지, 어떻게 업무 라인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르고, 저런 멍청이하고 일 할 수 있겠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저 인간 때문에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니까.”선임의 속삭이는 소리가 남자에게까지 건너왔다. 남자는 술을 마셨다.“그러게 말이야, 회사 평가에서도 업무 성적이 늘 꼴찌잖아.”다른 직원이 속삭였다.“그래 저 인간은 우리와 인격 자체가 달라. 한 세기 전 구식 부품 같다니까.“선임이었다. 남자는 기가 막혔다. 이심전심 의식구조 아니면 그들만의 신호체계 남자는 팀 내 업무를 통제하고 여섯 명 팀원들의 의식과 신호체계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원들끼리 전연 생각지도 못했던 의식이 모아지고 있었다. “이선 씨! 나하고 나가서 바람을 좀 쏘이며 이야기할까요?”남자가 넌지시 말했다. 속삭이던 팀원들이모두 남자를 바라보았다.“좋습니다.”선임이 벌떡 일어났다. 남자가 앞장서고 선임이 따라 나왔다. 카페 옆 작은 공터였다.“이선 씨! 팀장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듭니까?”남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 팀장님. 당신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습니까? 다른 팀에게 내내 뒤지거나 하고 말이야,”선임이 잘 되었다는 듯이 대들었다. 모두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래, 내가 팀장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서툴다 칩시다.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따라잡는다고? 당신 같은 얼치기로는 어림도 없지,”“팀원들 숨통을 조인 건 당신이야, 업무 체계도 모르는 당신 같은 원시인은 우리 일에 방해만 되거든,” 선임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남자의 주먹이 선임에게 날아갔다. 남자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선임이 마른나무 쓰러지듯 땅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사람을 쳤다 이거지,!” 선임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피, 피가......”남자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으려 했다.“필요 없거든,”선임이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는 어딘가로 달려갔었다.남자가 사거리 앞에서 깜짝 놀란다. 영산까지 야산과 농장이던 푸른 벌판에 높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남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주변을 살펴본다. 건물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남자는 정신이 아득하다. 넓고 푸른 들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떠나온 고향처럼 한없이 넓은 초원이었다. 염소와 양들이 풀을 뜯고 목동들이 말을 타고 달렸다. 남자는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린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다. 무섭게 소리치던 할아버지도 처음 보았다. 세나도 그토록 초췌한 모습일 줄을 몰랐다. 10여 년 전 겨울이었다. 남자는 눈보라 치는 벌판으로 순록을 방목하고 파오(이동식 천막집)를 지을 자리를 찾으러 나섰다. 세나와 결혼해서 살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고향의 젊은이들은 결혼하면 독립하여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다. 남자는 방목지를 찾아 서남쪽으로 얼마를 왔는지 몰랐다. 언덕을 넘어서자 해가 지고 있었다. 남자는 야영을 해야 했다. 천막을 치고 메밀 빵과 순록의 젖을 먹고 잠은 순록의 털을 넣은 침낭 속에서 자면 되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이상한 풍경을 보았다. 지친 눈에 헛것이 보이는가 싶었다. 멀리 보이는 것, 그것은 보고 또 보아도 하늘의 별빛보다 큰 빛들이 수없이 보는 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낙타를 몰아 길을 재촉했다. 확인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보이던 불빛들은 의외로 멀리 있었다. 밤새 벌판을 가로지르고 강을 건너야 했다. 도착한 곳은 말로만 듣던 도시였다. 남자는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들과 촘촘히 늘어선 건물들에 압도당했다.   <다음 호에 계속>

뉴스 | 성광일보 | 2024-05-10 14:59